아들 입에 달라붙은, 욕(辱)

  • "시바 시바 시바새키" "스파시바"~~~ 웃고 갑니다.^^

    한길 2019.12.20 08:47
    • 오늘도 웃음으로 시작하는 주일 되시고요.

      신동숙 2019.12.22 08:25 DEL

신동숙의 글밭(35)

 

아들 입에 달라붙은, 욕(辱)

 

4학년이 된 아들에겐 갈수록 늘어나는 게 있답니다. 먹성과 욕(辱)이랍니다. 어디서 배운 건지, 어디서 들은 건지 아주 입에 찰싹 달라붙은 욕은 떨어질 줄을 모른답니다.

 

"수박을 먹을 때는 씨발~라 먹어어"
"시바 시바 시바새키"
"스파시바"

 

욕은 아주 신나는 노래가 되어 흥까지 돋웁니다. 해학과 풍자의 멋을 아는 한국 사람 아니랄까봐요. 그럴수록 엄마의 마음도 같이 기뻐해야 되는데, 도리어 점점 무거워만집니다.

 

뭔가 바르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일 테지요. 엄마의 잔잔한 가슴에 마구 물수제비를 뜨는 아들의 욕. 참, "스파시바"는 욕이 아니라며 능청스레 당당하게 알려주기까지 합니다. 러시아 말로 "감사합니다" 라는 뜻이라면서요. 그러면서도 입에선 ㅅㅅㅅ 시옷이 호흡처럼 노래가 되어 흘러나옵니다.

 

그러지 마라고 타일러도 보고, 욕을 하면 밥을 안준다며 운동 학원을 안보내준다며 협박도 해보지만, 그것도 잠시 그때 뿐입니다. 기세등등 아주 엄마 머리 위에서 놀려고 들지요. 왠지 기분이 상한 채 학교에서 돌아오는 날엔 시옷이 입에서 춤을 춥니다. 노래가 되고 춤이 되는 아들 입에 달라붙은 욕.

 

옆에서 들으니 아들이 틈틈이 보는 유튜브의 인기 유튜버 형들의 입에선 억센 말들이 거침없이 튀어나옵니다. 요즘 아들의 주관심사는 먹방, 강아지, 양궁입니다. 볼을 실룩이며 오물오물 먹는 입을 보면 그저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아들이지요. 엄마보다 몸무게가 더 많이 나가지만 엄마는 번쩍 들어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늘 일어나는 귀여운 얼굴이지요.

 

아들의 입에서 욕이 침 튀듯이 튀어 나올 때면, 모른 척하기도 해보지만 그럼에도 흐르는 시냇물처럼 시끌시끌 그칠 줄 모르는 욕. 그래서 엄마도 이에 상응하는 욕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답니다. 아들의 입에서 시옷이 마구 튀어나올 때, 엄마도  시옷으로 마구 대꾸해주기로요.

 

 

 

이 사랑하는 사람아
사랑둥이
사랑둥둥아

사랑동이
사랑동동아
이 사랑하는 사람아
(하나님) 자녀야

 

이렇게 시옷이 가득 들어간 '사랑욕'을 잔뜩 들은 아들은 잘 들었는지 안들었는지, 가만히 곁에 있다가 별 말없이 그냥 지나간답니다. 이렇게 사랑욕을 하고 난 후 무엇보다 좋은 건 엄마의 마음입니다. 아들의 콩돌 같은 욕으로 한순간 땡글하게 뭉쳤던 쓴마음이 흐르는 물처럼 스르르 풀린다는 점입니다. 후유증 없이 즉석에서 효과 빠른 엄마의 '사랑욕'이지요. 운율에 맞추어 노래가 되기도 하고요. 아무리 그래도 자녀를 믿고 맡길 분은 하나님 밖엔 없답니다.

 

* (  )안에는 주어진 여건과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 부처님, 내,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우리, 한국의 등등으로 바꾸어 뭐든 들어갈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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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가슴에 품은 것은

  • 고흐의 눈길 처럼, 햇살처럼.. 그림자가 없는 시선을 가질 수 있다면~~~

    한길 2019.12.19 09:15
    • 내 가슴에 빛의 예수를 품는다면요.

      신동숙 2019.12.19 10:00 DEL

신동숙의 글밭(34)

 

고흐가 가슴에 품은 것은

 

'영혼의 화가', '태양의 화가'라는 명성이 어울리는 고흐. 그가 남긴 그림과 편지글들은 내 영혼을 울린다. 그리고 눈이 부시도록 따뜻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빛깔로 내 가슴을 물들인다.

 

1853년 3월 30일, 네델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그는 엄격한 칼뱅파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877년에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 공부를 한 후 작은 시골 교회에서 목회를 하기도 했으나, 그 시대가 감당하기엔 그의 가슴은 너무나 뜨거웠는지도 모른다.

 

고흐가 가슴에 품은 건 무엇인가? 그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뜨거운 심장을 지니게 했는지. 그의 그림과 글을 천천히 읽어가다 보면 뿌리 깊이 고뇌하는 한 영혼과 만난다.

 

눈 오는 밤, 조금은 쓸쓸한 이 겨울에 어울리는 한때의 유행가. 가수 조정현의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 입에서 입으로 불려지던 그 노랫말이 가슴까지 내려와 현실이 되는 일이 쉽지 않음을 세월이 갈수록 느낀다.

 

 

 

 

임신한 몸으로 남자한테 버림받고 겨울날 길을 헤매고 있던 시엔과 어린 딸. 병색이 짙은 그녀를 목욕시키고, 보살펴 준 고흐. 고흐의 눈길이 닿은 곳은 인간의 끝 지점이다. 아픔, 외면, 추함, 버림받음, 가난, 질병, 배고픔, 신경질, 연약함, 슬픔, 불행. 그런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가족들로부터도 타락했다고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던 고흐. 그 어둡고 낮고 가난한 자리에 고흐의 사랑은 뿌리를 내린다.

 

아름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온통 어둠인 그 낮은 곳으로 향하는 고흐의 눈길, 그의 눈길은 햇살처럼 환하고 따뜻하다. 하지만 그때는 차라리 뜨거웠으리라. 불덩이 같던 그의 가슴을 감당하기엔 그 시대가 너무나 어두웠다. 아니 어쩌면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당장 내 가족 중 누군가가 시엔과 같은 이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온다면 어떻게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마음을 무겁게 누른다.

 

평생을 따라다닌 그의 뿌리 깊은 고뇌와 고독. 그가 닿고자 한 곳은 햇살이 닿을 수 있는 끝 지점이고, 빗물이 눈물처럼 고이는 땅이고, 예수가 친구가 되어 함께 머물던 자리다. 그런 그가 가슴에 품은 건 빛, 진리에 뿌리를 내린 사랑이었다.

 

사실 묘사에 치중하던 당대의 그림들에선 볼 수 없는 화풍을 새롭게 창조한 그림. 고흐의 그림엔 유독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가 없는 시선은 세상에 단 하나 뿐이다. 빛이다. 빛이 밖에 있다면 어떻게든 그림자는 따라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자신이 빛이 된다면, 빛을 가슴에 품고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은 온통 눈물 겹도록 눈부신 순간들 뿐일 테니까. 낮고 작고 외지고 소박하고 하찮고 소외된 것들을 품으려는 그 연하고 선한 마음 앞에서 나는 흔들린다.

 

진리와 사랑의 예수처럼, 고흐의 가슴에 깊이 뿌리 내린 진리와 사랑이 그의 가슴을 온통 빛으로 채웠을 터. 내겐 글을 쓰는 일이 빛을 비추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건 크고 많고 거창한 일이 아니다. 그저 작은 관심 하나, 작은 눈길 하나. 따뜻한 말 한 마디면 충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건, 곁에 있는 사람의 눈가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이면 충분한지도 모르니까.

 

찬바람 부는 겨울날 햇살이 내려앉은 마른 풀섶에는 사이사이 어린 초록풀들이 싱그럽다. 햇살이 내려앉는 곳, 우리의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는 곳마다 이 세상 그 어디라도 봄이다. 고흐 영혼의 그림처럼 따뜻한 노란 빛깔이다.

 

작은 위로 하나
...

작은 위로 하나
어둔 마음에 띄우는
작은 별 하나

작은 위로 하나
외로운 마음에 피우는
작은 꽃 한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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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있어요?", 고독의 방으로부터 온 초대장

  • 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들로, 그간 내면의 소리(질문)에 둔감했나 봅니다. 이 밤에 세상 밖의 소리를 차단하고,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고독의 방으로.... 편안한 밤 되세요^^

    한길 2019.12.18 22:25
    • 질문하는 만큼 넓어지고 깊어지고요. 고독의 방에서 평온한 시간이 좋겠습니다. 그저 하나님과 머물고 싶은 마음으로요.

      신동숙 2019.12.19 09:59 DEL

신동숙의 글밭(33)

 

"어디 있어요?", 고독의 방으로부터 온 초대장

 

잠결에 놀란 듯 벌떡 일어난 초저녁잠에서 깬 아들이 걸어옵니다. 트실트실한 배를 벅벅 긁으며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눈도 못 뜨고

 

"아빠는?" /  "아빠 방에"

"누나는?" /  "누나 방에"

"엄마는?" /  "엄마 여기 있네!"

 

그렇게 엄마한테 물어옵니다

 

 

 

 

아들이 어지간히 넉이 나갔었나 봅니다. 그런 아들의 모습에 살풋 웃음이 납니다. 저도 모르게 빠져든 초저녁잠이었지요. 으레 잠에서 깨면 아침인데, 학교에 가야할 시간이고요. 그런데 눈을 뜨니 창밖은 깜깜하고 집안은 어둑합니다. 잠에서 깬 무렵이 언제인지 깜깜하기만 할 뿐 도저히 알 수 없어 대략 난감했을 초저녁잠에서 깬 시간 밖의 시간.

 

해와 달이 교차하는 새벽과 저녁은 우리의 영혼이 말을 걸어오는 무렵이기도 합니다. 저녁답 노을처럼 아련한 제 어릴적 기억이 스칩니다. 초저녁 잠에서 깬 순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허전함, 세상에 덜렁 혼자 남겨진 듯한 그 쓸쓸한 기분을.

 

아들에겐 얼른 떠오른 것이 가족이었나 봅니다. 굳이 궁금해서라기보다는 반사적으로 마음에 일어난 물음으로 다가옵니다. 마지막에 "엄마는?" 하면서 묻는 대상은 다름 아닌 엄마입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쳐가야 할 의식의 진화 과정이 있어 보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제각각이라도 우리의 내면에서는 비슷한 흐름을 보이는 것이지요. 저 역시 지나온 과정이었고요.

 

생각 이전에 마음에서 저절로 일어난 물음. 반쯤 얼이 빠져서 엄마에게 묻는 질문의 마지막은 "엄마는?"입니다. 문득 아들의 물음이 선문답처럼 다가옵니다. 눈앞에 엄마를 두고도 엄마를 찾는.

 

앞으로도 아들이 살아가다가 혹은 길을 걸어가다가 문득 문득 내면에서 들려오는 질문이 있을 테지요.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진리의 영인 성령이 있으니까요. 불교에서는 불성, 그리고 영성, 본성이라고도 하는 그 내면의 소리.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근원적 물음. 어느 고요한 순간 마음으로부터 나직이 들려올, "나는 어디 있어요?"

 

그리고 어느날엔가는 이런 물음도 들려올 테지요. "예수님, 어디 있어요?", "하나님, 어디 있어요?", "나는 누구인가요?" 생각 이전에 일어나는 마음의 소리.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자녀가 걸어갈 인생길은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새로운 길일테고요. 그런 삶의 여정에서 어느 순간 자녀에게 일어날 그 근원의 물음들을 떠올리면 아득해집니다. 대신 대답해 줄 엄마가 없을 때가 언젠가는 올 테니까요. 자녀가 오롯이 홀로 맞이해야 할 그 고독의 시간들.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엔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지요. 그런 자녀의 삶 곁에는 항상 자연과 진리의 말씀과 좋은 스승과 벗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자연의 소리 없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를. 하나님과 만나는 고요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묵묵히 그윽하게 익어가는 영혼이기를.

 

그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깨어 있는 영혼이기를. 어느 날 고독의 방으로부터 온 초대장. 무심한 듯 잔잔한 그 좁은 길. 하나님, 또는 근원으로 향하는 그 조심스런 발걸음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물결 아래로 깊이 흐르는 강물처럼 일상 속에서 유유히 흘러가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는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러 가시니라'(마가복음 6장4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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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를 사랑한 분들(1)

  • 감자처럼 마음 착하고 마음 순하게,
    그리고 동글 동글 예쁘게 살고 싶네요~♡

    한길 2019.12.17 09:43
    • 감자처럼요. 권정생 선생님의 마음이 둥글둥굴 닮긴 시지요.

      신동숙 2019.12.17 17:45 DEL

신동숙의 글밭(34)

 

감자를 사랑한 분들(1)

 

감자를 사랑한 분들의 얘기를 꺼내려니 눈앞이 뿌옇게 흐려집니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가마솥 뚜껑을 열었을 때처럼, 눈앞이 하얗습니다. 감자를 사랑한 분들을 떠올리는 건 제겐 이처럼 구수하고 뜨겁고 하얀 김이 서린 순간과 마주하는 일입니다.

 

가마솥 안에는 따끈한 감자가 수북이 쌓여 있고, 제 가슴에는 감자를 사랑한 분들 얘기가 따스한 그리움으로 쌓여 있답니다.

 

감자떡

점순네 할아버지도
감자떡 먹고 늙으시고
점순네 할머니도
감자떡 먹고 늙으시고
...

권정생 선생님의 <감자떡> 中

 

 

  삽화 그림 <감자를 먹으며> 글 이오덕 · 그림 신가영

 

딸아이를 학원으로 태워주는 차 안에서, "점순네 할아버지는 감자떡 먹고 늙으시고~"(백창우曲) 노래를 불러 줬더니, 뒷좌석에 앉은 딸아이가 푸하~ 하고 웃음을 터뜨립니다. 아마도 '감자떡 먹고 늙으시고'란 노랫말이 난생처음 들으면서 좀 촌스러운 듯하면서도 마치 가마솥 뚜껑을 열었을 때처럼 순간 환해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저도 모르게 한순간 웃음이 터졌을 테지요. 권정생 선생님의 싱싱하고 따뜻한 유머가 시대를 초월해 먹힌 것이지요.

 

우리도 집에 가서 감자 구워 먹을까 했더니, 딸아이는 모짜렐라 치즈를 많이 올려 달라고 합니다. 엄마가 주고 싶은 건 순수한 감자맛인데 아이들의 입맛은 이미 너무도 많이 국경을 초월해 있습니다. 이제와서 돌이키기엔 공연히 힘겨운 씨름이 될 것만 같습니다.

 

감자에 묻은 흙을 깨끗히 씻어서 오븐에 굽습니다. 감자는 따끈할 때 후후 불어 가면서 먹어야 제맛인데, 아이들은 아직 감자의 밍밍한 듯하면서도 쌉싸름하고도 담백한 그 깊은 맛을 잘 모릅니다. 아마도 모를 테지요. 그러니 아들은 설탕을 찾고 딸아이는 케찹을 찾을 테고요. 둘 다 함께 좋아하는 건 치즈를 듬뿍 올린 구운 감자입니다. 제 입맛도 가끔 치즈를 찾을 때가 있으니까요. 이쯤에서 회심으로 돌이켜야 할 건 정작 제 입맛인 듯 합니다.

 

어쩔 땐, 엄마가 한눈 판 사이에 치즈만 걷어 먹고 감자만 남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세 살 버릇 아니, 입맛 여든 간다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엄마가 입맛을 잘못 길들였나 싶은 자책감이 잠시 스치기도 하고요. 또 한 편으로는 엄마 손길을 떠난 아이들의 입맛을 도로 길들이려는 욕심을 내보기도 하지만 이내 제 풀에 꺾이곤 합니다. 안그러면 철없는 아이들에겐 효과 만점인 매스컴 광고처럼 순수한 감자맛 스토리텔링을 덧입힌다면 어떨까 싶은 것입니다. 엄마의 숙제입니다.

 

눈만 돌리면 마트마다 알록달록한 먹거리들이 가득 쌓여 있어도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은 저만 그런지요. 언젠가 귀동냥으로 들었던 옛날 어른들의 얘기가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밭에서 감자 서리한 얘기. 입가에 까맣게 보리 이삭 구워 먹던 얘기. 칡뿌리 캐 먹던 얘기. 어릴 때 보리밥과 감자 옥수수 수제비를 질리도록 먹어서 커서는 한동안 안 먹었는데 나이가 드니 이제는 그 맛이 그립다는 얘기들. 그렇고 그런 옛이야기에 제 마음은 그리움으로 살이 찝니다.

 

굴뚝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커리에 감자 하나씩.

윤동주의 <굴뚝> 中

 

아무래도 쌀 농사보다는 감자 농사가 사람의 손이 덜 갑니다. 언젠가 집에서 먹다가 싹이 오른 감자를 마당에 있는 손바닥만한 흙밭에 툭툭 던져서 흙으로 덮어둔 적이 있답니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우연히 발견한 동글동글한 감자알. 나중에야 싹이 난 조각을 던져둔 그 전 일이 기억납니다.

 

따로 물을 준 것도 아니고 고추처럼 지지대를 세워준 것도 아닌데, 감자는 순하게 착하게도 어느새 자라 있습니다. 본격적인 농사가 되면 수고로움이 없진 않을 테지만. 쌀 농사에 비하면 단순한 감자 농사가 글공부하는 농부에겐 어울린다 싶은 것입니다. 차 한 잔과 감자 두 세 알이면 한 끼 요기도 되고요. 맑은 몸과 정신으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집중하기엔 감자가 그만이다 싶은 것입니다.

 

감자는 사람 손이 덜 간 만큼 하나님이 내려주신 비와 햇살과 더불어 흙이 품에 안고서 부지런히 감자알을 키웠을 테지요. 동글동글 순하게 착하게 보이지 않는 손길로 쓰다듬으며 정성으로 키웠을 테지요. 이어지는 권정생 선생님의 <감자떡>처럼요.

...
점순네 아버지도
감자처럼 마음 착하고
점순네 어머니도
감자처럼 마음 순하고

아이들 모두가 감자처럼 동글동글 예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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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과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

  • 오늘 하루,, 함께 씨를 뿌리고 함께 김을 메고, 가족이 함께 저녁밥을 먹는,, 그렇게 더불어 어울려 살아가는 삶을 꿈꾸어 봅니다. 분업이 아닌 협업의 삶을...

    한길 2019.12.17 05:06
    • 저도 꿈꾸어봅니다.

      신동숙 2019.12.17 17:44 DEL

신동숙의 글밭(33)

 

<오페라의 유령>과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

 

나를 위해 언제나 기도하시는 백집사님, 그분의 정성과 성실함 앞에 더이상 거절을 할 수 없어서 동행한 25주년 공연 실황 녹화. 스크린으로 보는 <오페라의 유령>.

 

화려하고 웅장한 노래와 춤, 의상, 배우들의 아름다움 앞에 내 마음 왜 이리 기쁘지 아니한가.

 

무대 위 200벌이 넘는 화려한 의상과 목소리와 배우들의 표정. 뼈를 꺾은 발레 무희들의 인형 같은 몸짓과 노랫소리. 지하실에서 울려 나오는 노래 노래 노래 오페라의 유령. 눈과 귀를 현혹시키는 저 화려함 현란함 요란한 박수 갈채 속에서 나는 그 뿌리를 보는 것이다.

 

건물 안과 건물 밖을 나누고
무대 위와 무대 아래를 나누고
주인공과 엑스트라를 나누고
공연자와 관람자를 나누고
로얄석와 일반석을 나누고
고용인과 노동자를 나누고
건물주와 세입자를 나누고
천국 티켓이 있고 없고
나누고 쪼개어진 사랑 앞에 아픈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햇살처럼 평등한 말과 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누구나 책을 읽고, 생각하고, 대화하고, 일하고,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자유롭고 공평한 삶을 그려본다.

 

사람이 가장 행복한 상태를 교육학에선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배우고 생각하고 말하며 그것을 함께 나누는 삶.'이라고. 나아가 분업보다는 협업을 지향하는 삶을 원한다. 더불어 어울려 살아가는 삶. 함께 씨를 뿌리고 함께 김을 메고, 가족이 함께 저녁밥을 먹는 일상이다. 그런 일상이 예술이 되는 삶을 그려본다.

 

공연장 건축에 노동으로 참여하지 않는 어느 설계자와 고용인의 무쇠같은 심장을 본다. '내가 대접 받고 싶은대로 남을 대접하라.' 성경의 황금율이다. 내가 노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서 설계도만 가지고 남을 시키는 행위는 이 말씀에 의하면 죄에 해당된다. 설계자와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다함께 참여하는 건축이라면 여러모로 설계도가 달라질 것이다. 아마도 건축사가 새롭게 쓰여질 것이다. 그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가 보는 죄란, 나와 남이 다르다고 보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생명을 수단과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만큼 무서운 시선이 있을까. 그 극치가 마루타 실험이 아니던가. 머릿 속 설계도만 건네 주고 정작 자신은 노동에서 빠진 후 감독만 하겠다는 시선이 근본적으로 그와 다르지 않음을 본다. 노동을 해야하는 입장이 자신이거나 자신의 아들이라면 돌을 쌓기 위해 위험천만한 공중 밧줄 하나에 달랑 몸을 매달진 않을 테니까. 사람이 수단이 되어서 지금도 이 땅 어디선가 하늘로 올라가는 슬픈 바벨탑들. 그렇게 하늘로 오르는 벽돌은 킬링필드의 성곽이 될 수밖에 없다. 그곳에선 언제든 위험천만한 일이 도사리고 있을 테니까.

 

반대로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는 시각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에서 파생된 개체. 나와 너는 하나다 라고 보는 시각에서 사랑은 출발할 것이다. '내가 대접 받고 싶은대로 남을 대접하라.'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살면서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람이 마음이 아니었던가. 교회에서 성도들이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제목이 아니던가.

 

 

 

설계도와 고용인의 감독 하에 건물을 올리다가 손가락이 잘려 나가고 낙상했을 이름 없이 꺼져간 피고용인들의 단말마를 듣는 것이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문이 닫힌 공연장 밖, 엄마 손을 잡고 서 있는 애타는 어린 눈망울을 보는 것이다. 서로가 주인공이 되려고 주고 받았을 무대 뒤의 질투와 모함을 보는 것이다. 물론 게중에도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나름의 선량한 양보도 분명 있었으리라.

 

슬픈 피라미드, 무서운 채찍을 휘두르던 멋진 카리스마 앞에 눈을 가리고 귀를 닫고 입을 막은 선량한 내 이웃들의 탄식기도, 그들의 체념과 눈물로 <오페라의 유령>은 세상에 나왔으리라. 이 한 편의 공연은 진정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한 공연인가를 두고 사유를 이어가는 것이다. 사랑 앞에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서 뒤돌아 주저 앉으며 절규하던 오폐라의 유령, 그의 눈물 앞에 잠시 나도 가슴이 울렸다.

 

한 편의 웅장한 공연을 올리기까지 수고한 자들의 땀방울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 땀방울이 하늘의 비처럼 공평하게 이 땅에 내릴 수 있었다면 바라보는 내 마음은 얼마나 흡족했을까.

 

별이 쏟아지는 저 대지 위 장막 곁으로 모닥불 하나 피워 놓고, 마을이 다함께 준비하며 더불어 함께 하는 모든 순간들. 흥얼거림이 기도가 되는, 누구나 어울려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노래하고 춤추는 저 맑은 이들의 천진난만한 아름다운 영혼을 본다. 덩달아 하나님도 기뻐서 춤추었을 태초의 춤과 노래를 보는 것이다. 천장에 막힘 없이 곧바로 하늘로 피어오르는 저 불꽃을 어찌 하늘이 흠향하지 않겠는가.

 

우리들 한가운데 예수를, 낮에는 꽃처럼 밤에는 모닥불처럼 피워 놓고, 그 둘레에 공평한 춤과 노래와 기도를 감사함으로 찬양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아름다운 우리들 모두의 영혼이 자신만의 향기를 내뿜으며 맑게 아름답게 꽃 피어나는 모습을 꿈꾼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이다.'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예수의 수고로움을 단 하루만이라도 한 순간이라도 덜어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모두의 꽃 피어남은 곧바로 하늘로 올라갈 이 땅이 내뿜는 기쁨의 샘, 아름다운 하늘의 메아리가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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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건 가슴에 품는다

  • 예배를 기다리며 이 글을 가슴에 품습니다 좋은 것들을 품는, 그래서 가슴이 따듯해지는 하루 되시길~♡

    한길 2019.12.15 10:49
    • 좋은 것들은 가슴에 품고 또 그 온기를 나누고요.
      따뜻한 밤 되셔요.

      신동숙 2019.12.15 20:17 DEL

신동숙의 글밭(32)

 

좋은 건 가슴에 품는다

 

좋은 건 가슴에 품는다. 거꾸로 말하면, 가슴에 품을 수 있는 건 좋은 것이다. 여기서 마음이라 칭하지 않고 가슴이라고 한 것은 실제로 심장을 중심으로 가슴에서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슴이 넉넉하거나 이타적인 사람은 못된다. 내 마음에 들면 취하고 그렇지 않으면 밥 한 숟가락 입에 넣지 않는 꽉 막힌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 내겐 어려서부터 다른 무엇보다 늘 마음이 문제였다.

 

놀이터에서 땅거미가 질 때까지 흙투성이 땅강아지가 되도록 장에 가신 엄마를 기다리며 온종일 배를 골아도 나는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엄마 얘기로는 젖배를 골아서 그렇다는데. 태어날 때부터 몸에 배부른 기억이 없다면 상대적인 배고픔에도 무딘 것인지. 애초에 결핍을 먼저 경험했다면 그 결핍이 오히려 몸에 익숙함이 될 수 있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내겐 배고픔보다 더 커다란 허기, 결핍이 먼저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헤아려보면 환경적인 가난은 내겐 근본적인 문제가 안되었다. 언제나 마음이 문제였다. 놀이터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으면 뒷산 바위산에 올라가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여섯 살 무렵이던 그때 가슴으로 들어온 커다란 하늘이 내 마음의 밑그림이다.

 

 

 

20대에 어느날 책을 읽다가 내 마음을 사로잡은 구절을 만났다. 논어의 한 구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하면 마음대로 행해도 법에 걸림이 없다. 그런 사람이 말을 하면 시가 되고...' 세상에 그런 경지가 있다니! 마음대로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해도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오히려 마음대로 행 하는 것이 세상에 덕이 된다니!

 

내겐 숨 쉬는 동안 끈질기도록 문제가 되는 것이 마음인데, 윤동주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살아있음 자체가 괴로움인 나에게 그런 마음 공부라면 안 할 수 없지. 그때부터 내 가슴에 한 알의 씨앗처럼 심겨진, 삶을 움직이는 길이 된 것은 마음에 자유함을 주는 마음 공부였다.

 

당시에 서점가에 붐이 일던 인디언, 티벳, 인도의 명상 서적, 스님들의 저서, 라즈니쉬와 마하리쉬 등 요가 수행자, 자연주의자, 철학서, 정신분석과 심리학 서적, 심심풀이 심리테스트, 시, 동화책, 고전, 국악, 클래식, 발라드, 가곡, 그림,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 마음을 맑게 밝힐 수 있다는 좋은 건 뭐든지 마음 닿는 데까지 읽으려고 했다. 그럴수록 마음을 탁하게 하는 것은 저절로 멀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마음을 보고 있었다.

 

어깨가 빠지도록 도서관에서 집으로 책을 날랐으니까. 집에서 내다 버린 책도 적지 않다. 읽었던 책들 중에서 마음에 남아 내세울 만한 건 몇 권 안되지만, 그저 지나온 걸음이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 나중에 자녀와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 모든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잠언 4장 4절)'  그 말씀에 비추어 적어도 그동안의 걸음이 틀리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비로소 마음이 쉼을 얻게 되었다.

 

신약에서 예수의 말은 살아서 숨 쉬고 있었다. 그전에 접했던 마음으로 인도해 주던 모든 글들이 진리의 그림자이거나 어딘가 모자란 한 조각이었다면 예수의 마음은 온전했다. 이 땅에 사람으로 난 자 중에서 어디에도 걸림 없이 내 가슴으로 바로 들어온 마음은 예수 뿐이다.

 

내 마음 깊이 흡족해서 내 영혼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는 사람들 중 스치는 옷깃에서  예수의 향기를 맡을 때면 마음이 좋아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 가슴에 한 점 별빛으로 때론 햇살처럼 들어온 예수를 모실 곳은 가슴으로 품는 방법 말고는 나는 달리 알지를 못한다.

 

건물도 내 가슴에 품을 수가 없다. 다이아몬드도 가슴에 품을 수가 없다. 학력과 재력과 명예와 인기도 잠시 필요에 따라서 악세사리는 될 수는 있겠지만, 가슴에 품기에는 불순물이 많아서 내 마음엔 저절로 꺼려지는 것이다.

 

가슴에 품을 수 있는 것만이 내 영혼이 좋아하는 것임을 본다. 그리고 자연. 환한 햇살은 아무런 걸림 없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사랑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가슴으로 먼저 들어온다. 그리고 우리말의 아름다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장 1절)'. 하나님이 공평하게 내려주신 말과 글은 특정인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의 밑그림이 된 커다란 하늘에 길이 되어 주는 건 말과 글이다. 진리의 몸이 된 예수와 자연의 아름다움이 좋은 길이 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공명이 되는 이들은 내겐 길벗이 될 테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이들 중에는 내 가까운 가족부터 벗과 지인까지 그 수가 더 많다. 그래서 외로운 길이었지만, <논어>에서 '덕 있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같은 뜻을 지닌 이가 있다.'( 송대선 목사님의 시편사색 中)

 

밥을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픈 것을 이제는 기력이 소진되는 느 낌으로 가늠한다. 그래서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는다. 마음의 일도 그와 마찬가지여서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채움과 비움이 끝없음을 예감한다. 견뎌야 하는 그 지난한 순례길에서 내겐 좋은 벗이 시詩를 쓰는 일이다. 시를 쓰는 것만큼 명료해진 마음으로 말씀의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싶다.

 

음악과 그림 등 다른 방법도 있다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과 글로 오신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다른 방편으로 예술 활동을 하는 이가 마음의 글을 매일 한 줄이라도 적는다면 보다 스스로가 마음에 흡족함을 느낄 수 있고, 하고 있는 일이 더 온전해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글과 동행하지 못하는 그림과 음악이 때론 길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을 본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내가 소망하는 인생은 모든 사람이 시인의 가슴을 지니는 것이다. 학자, 과학자, 육체 노동자, 감정 노동자, 학생, 주부, 농부, 성직자, 유아들까지 누굴 막론하고 마음이 있는 사람에겐 그 가슴에 맴도는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 오랜 동안 가슴에 맴도는 이야기를 글로 옮겨 적으면 시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는 그 그윽한 자리에 언제 초대를 받을지 모르는 일이다. 언제나 두루 살피시며 적당한 마음밭에 소망의 씨앗을 떨구시는 분도 거두시는 분도 진리의 성령일 테니 넉넉한 마음으로 맡길 뿐이다.

 

좋은 건 가슴에 품는다. 오늘 아침의 햇살도 가슴에 품는다. 좋은 말씀 한 구절도 가슴에 씨앗처럼 품는다. 품는다는 것은 가슴이 따뜻해지고 환해지는 경험이다. 그리고 가슴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고요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일상이 기도가 되고, 시와 노래가 되어 맑고 환하게 흐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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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람

  • 따신 입김으로 녹아지는 하루💞

    한길 2019.12.13 09:19
    • 내게서 전해질 온기가
      미흡하다 할지라도요.

      신동숙 2019.12.13 09:44 DEL

신동숙의 글밭(31)

 

겨울 바람

            
찬 손으로
내 양볼을 부비며

 

빨갛게 물들이는
겨울 바람

 

호오오오

 

하얗게 피우는
따신 입김에

 

겨울 바람이
언 손을 녹여요

 

2019.1.4. 詩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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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수제비를 뜨는 아이들

  • 저 역시 여전히 조심스럽게 살아가고 있네요 행복한 하루되세요💞

    한길 2019.12.13 09:17
    • 조심스런 가운데 가볍고 자유로운 하루 되시기를요.

      신동숙 2019.12.13 09:42 DEL

신동숙의 글밭(30)

 

물수제비를 뜨는 아이들

 

볼에 닿는 햇살이 따사로운 겨울날 오후다. 양짓녘엔 봄인 듯 초록풀들이 싱그럽다. 따스한 바람이 불어 금빛 마른풀에선 맑은 소리가 들릴 듯 말듯 울린다. 지난 며칠간 매서웠던 추위에 잔뜩 움츠러들었던 가슴이 저절로 녹아서 걸음마다 한겹한겹 마음이 열리는 평온한 날씨다.

 

날씨가 포근해서일까. 학원 중간에 시간이 남았을까. 모처럼 개천에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떠드는 것처럼 또랑또랑 들려온다.

 

뭘 하는가 싶어서 다리께에서 가만히 내려다본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갈 뿐 오히려 다리 중간에 멈춰 선 내 모습이 어색한 그림이긴 하다. 하지만 내게는 자연 속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한 폭의 정겨운 그림이다. 이 아름답고 재미난 광경을 무심히 지나칠 수는 없지. 지금쯤 학원에 있을 아들 연배로 보이는 사내 아이들. 아들을 데려다가 저 무심하게 행복한 그림 속 한 명으로 등장시키고픈 충동까지 인다.

 

 

 

자연 속에 아이들은 언제나 행복해 보인다. 무심코 어린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을 그 어떤 아픔과 슬픔도 자연은 만져준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바람결이 물결이 부드러운 손이 되어 슬어주고, 함께 놀아주고, 햇살이 따스하게 다독여주고, 하늘이 저 커다란 품으로 안아주리라는 자연에 대한 믿음이 있다.

 

물이 둥글게 퍼져 나간다. 잠시 후 한두 명의 아이가 몸을 구부렸다가 일으키며 잠시 몸을 뒤로 빼고는 팔을 크게 휘둘러 앞으로 휙 던진다. 그렇게 물수제비를 뜨고 있다. 누가 가르쳐 줬을까.

 

예전에 가끔 우리 아이들이 순간 신나는 표정으로 물 속에 돌을 던지려 들면 말리곤 했다. 무심코 던진 돌에 작은 생명이 맞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 아이들은 에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대꾸를 해온다. 그럴 때 엄마의 대답은 혹시나 만일에 한 생명이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일러준다. 그러면 알아들은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순간 돌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고 돌아서면 또 금새 잊어버리지만.

 

만일의 그 한 생명. 세월이 갈수록 조심스러운 이유다.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무심한 눈길 하나라도. 그 단 한 생명을 염두에 두게 된다. 예수의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에 대한 이야기가 어쩌면 그런 마음의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무리를 두고서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던 예수의 심정을 해처럼 내 가슴에 떠올리는 일. 두고두고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된 말씀. 그리고 여전히 나는 세상이 조심스럽다.

 

물 속 송사리, 민물새우, 다슬기가 무사하기를 비는 마음을 바람결에 띄워 보낸다. 서산으로 기우는 노을을 배경으로 물이 빠져 나간 개천에서 놀고 있는 개구쟁이들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답고 정겨운 한 폭의 그림이다. 다름없이 아들 손을 잡고 나도 당장이라도 저 속에 뛰어 들고픈 그리운 내 어릴적 그림이다.

 

어쩜 저렇게 아이고 어른이고 한결같이 물가에선 물수제비를 뜨고 싶어할까. 알 수는 없지만, 그 조차도 물 속이 궁금하거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저 물이 그리운 건 아닌지. 그 마음의 출렁임을 누군들 막을 수 있으랴.

 

물수제비 포물선은
한순간인데

 

동해에서 떠올라
마을 위를 지나며
서산으로 넘어가는

 

태양의 포물선은
꼬박 하루해가 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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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깊이 뿌리를 내리는 대나무

  • 진리의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세상의 흐름 속에서 때론 거슬러 오르는 근원을 향한 삶을,, 기어이 살아내야겠습니다

    한길 2019.12.11 11:30
    •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계십니다.

      신동술 2019.12.12 11:45 DEL

신동숙의 글밭(29)

 

묵묵히 깊이 뿌리를 내리는 대나무

 

링링, 타파, 미탁. 지난 가을 한반도를 지나간 태풍의 이름입니다. 올해는 유난히 바람이 크게 불고, 강수량이 많았던 가을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강변 마을 인근에도 침수를 우려한 차량 대피 안내방송이 나올 정도로 세 번의 태풍은 태화강의 많은 생명들을 거세게 지우며 지나갔습니다.

 

물이 빠져나간 태화강변. 그동안의 수고로운 손길을 뿌리 치듯 남은 것이라곤, 뿌리까지 뽑혀 쓰러진 나무들, 진흙탕이 된 강변둑, 심지어는 껍질이 벗겨지듯 바닥이 뜯겨져 나간 산책로의 허망한 모습들 뿐입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속수무책. 올해 가을 비로소 국가정원으로 지정된 태화강. 행사 지구가 가을 국화로 방문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 반면, 상류 지역은 중장비와 인력을 동원해 겨우 쓰러진 나무와 진흙탕이 된 길의 윤곽만 걷어냈을 뿐입니다.

 

울산시에선 계절마다 마당의 정원을 가꾸듯 태화강변을 가꿉니다. 강변길을 따라서 봄부터 가을까지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제게도 커다란 행운이고 행복입니다. 양귀비, 작약, 무궁화, 해바라기, 금계국, 초롱꽃, 코스모스, 황하 코스모스, 국화. 강변길을 따라서 철쭉, 오디 나무, 배롱나무, 봄이면 화사한 벗꽃이 산책길의 벗이 되어주는 아름다운 길. 저만치 수풀에는 백로가 한가롭고, 오리 식구들이 정겹게 살아가는 집.

 

하지만 태화강변은 큰 비가 오면 침수가 됩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시멘트로 강둑을 덮어버리지 않은 지혜롭고 어진 선택에 늘 마음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해마다 태화강을 지켜보면서 자연의 거대하고도 섬세한 흐름을 느낍니다. 강을 따라 드넓게 펼쳐진 하늘에 맘껏 상상력과 마음을 펼쳐 놓을 수 있는 곳. 다 슬고간 후에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풀이 돋아 오르고 꽃이 피어나는 태화강국가정원은 생명이 살아서 숨 쉬는 땅입니다.

 

 

 

 

뻘에 묻혀 있던 뿌리가 뽑힌 나무들을 걷어내고도 한참의 시간
이 흘렀습니다. 그 중 유일하게 건재한 나무가 바로 대나무입니
다. 해가 뜨는 동해 쪽으로 살짝 기울긴 했어도 뿌리가 뽑히지 않은 대나무.
 
겨울이 가까워지고부터 강변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면, 새로 대나무가 심겨진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잦은 침수와 범람에 태화강을 살리는 대책은 크고 작은 대나무를 심는 일. 태화강엔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십리대밭이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 심어 놓은 어린 대나무 앞에 붙여진 나무 팻말. 태화강 백리대밭.
산시의 생태친환경적인 알찬 계획을 엿보면서 내심 흐뭇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조금은 느리더라도 생명들과 함께 가는 그 걸음이 기쁘고 뿌듯하고 감동스럽고 고마운 마음입니다.

 

대나무는 그 뿌리가 깊습니다. 3년 동안 땅으로 뿌리만 내린다는 대나무. 성장이 보이지 않는 3년 동안의 기다림. 그 어둡고 지난한 시간을 거친 후 비가 올 때마다 무섭게 키가 자라는 대나무. 깊이깊이 땅 속으로 침잠하며 뿌리를 내리는 대나무.

 

사람에게도 저마다의 특성이 있습니다. 풀꽃 같이 여린 사람, 배롱나무 같은 사람, 코스모스를 닮은 사람. 심지가 깊어 자칫 강직해 보이는 사람, 개성 만큼이나 다양한 우리네 삶입니다. 누구나 다 대나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진흙뻘에 묻혔던 여린 풀꽃이 다시 피어 오르는 모습에서 오히려 풀꽃의 강인함을 봅니다.

 

한가지 기억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 중에는 그 뿌리가 대나무처럼 깊은 고마운 이들입니다. 꽃처럼 화사하지 못해 평소엔 눈길을 끌지 못하는 대나무. 내 주위에도 그런 사람이 없는지 돌아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기 안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는 이들. 묵묵히 깊이 진리에 뿌리를 내리는 곧은 이들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세상의 온갖 사건 사고의 잦은 범람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진리의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보이지 않는 신앙인, 생활인, 농사를 짓는 이들. 소박하고 단순한 삶 속에서 자연과 학문과 예술로 내면의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이들. 스스로 깊어짐으로 일상의 삶이 예술이 된 이들. 유행을 따라가는 표류하는 삶이 아닌, 자연과 진리와 자기 자신이 길이 되어 고독 속에 침잠하는 이들.

 

이렇듯 깊이 뿌리를 내리는 이들이 어쩌면 세상의 흐름 속에서 때론 흐름을 거슬러 오르는 근원을 향한 삶을 사는 이들이 아닌지. 이 땅과 우리 내면의 땅을 지켜주고 있는 파수꾼이 아닌지 생각해 보는 숙연한 새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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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서리를 녹여줄 햇살 한줄기

  • 한줄기 햇살의 은혜를 구합니다~♡

    한길 2019.12.10 10:33
    • 오늘 아침에도요. "빛이 있으라"
      내 마음을 향해서..

      신동숙 2019.12.11 08:49 DEL

신동숙의 글밭(28)

 

아침 서리를 녹여줄 햇살 한줄기

 

겨울이 되고 아침마다 서리가 하얗게 차를 뒤덮고 있는 풍경을 본다. 딸아이의 등교 시간을 맞추려면 바로 시동을 걸고서 출발을 해야 하는 시각. 시동을 걸면 2~3초 후 엔진소리가 들려온다. 그 시간의 공백 만큼 자동차는 밤새 속까지 싸늘하게 차가웠다는 신호겠다. 우선 와이퍼 속도를 최대치로 올리고 워셔액을 계속 뿌려 가면서 앞유리창에 낀 얼음을 우선 급한대로 녹이기로 한다. 뒷유리창과 옆유리창까지는 어떻게 해 볼 여유는 없다.

 

차를 출발 시킨 후 골목을 돌아 나오는 동안에도 좌우로 와이퍼의 힘찬 율동과 워셔액 분사는 계속된다. 아침 기온이 그런대로 영상에 가까운 날씨엔 뚝뚝 살얼음이 떨어져 나가듯 그대로 물이 되어 녹아서 흐르면 그만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침 기온이 영하일 경우에 대략 난감해지는 것이다.

 

하얀 서리를 녹이기 위해 분사한 워셔액이 찬바람과 만나면서 도로 얼어 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와이퍼의 부지런함까지 가세를 한다. 영하의 날씨에 와이퍼의 노력이란 앞유리창에서 순간적으로 얼음이 된 워셔액을 라이스 페이퍼처럼 얇게 도포하는 일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자꾸만 하얗게 시야를 가릴 뿐이다.

 

골목을 빠져 나온 후 큰 도로로 접어들 때까지 앞유리창이 하얗다면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그때가 언젠가. 바쁜 출근 차량들이 이쪽저쪽에서 엉켜 들었다 풀리기를 멈추지 않는 러쉬아워의 시각. 큰 도로에 차를 멈출 수도 없고, 가려진 시야에 자칫 잘못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 운전을 하는 일이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아 운전대를 잡은 두 손엔 잔뜩 힘이 들어간다.

 

이때 믿는 것은 오로지 한가지 밖엔 없다. 태양빛이다. 다행이 딸아이의 중학교 방향이 동쪽에 있다. 아침해와 마주보며 달리는 것이 마지막 보루가 된다. 와이퍼의 율동과 워셔액의 힘겨운 노력이란 따뜻한 햇살 한줄기에 미치지 못함을 절절히 깨닫는 순간이다. 가리게로 눈을 살짝 가린 후 마주보는 태양빛의 찬란함이란. 감사와 감탄의 기도가 터져 나온다.

 

 

 

아. 그렇다면, 밤새 싸늘히 식은 가슴으로 맞이하는 아침이란. 그런 날엔 내 눈에도 잔뜩 하얀 서리가 끼어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이 거기에 닿는다. 얼음장 같은 가슴을 채 녹이지도 못하고 하얗게 서리가 끼어 앞도 분간 할 수 없는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았을 하늘과 가족과 만나는 사람들과 그동안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는 것이다. 내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갑다면, 내 시선도 서리가 낀 유리창이었을 테니까. 선명하게 볼 수 없는 그런 시선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알 수 없는 시린 가슴을 견디지 못해 나 스스로가 만들어 내었을 와이퍼의 율동과 같은 힘겨운 노력들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워셔액과 같은 눈물이 흐르고 또다시 얼어 붙는. 그런 노력에도 내 가슴이 계속해서 싸늘하다면, 순간의 시선을 녹일 수는 있을지언정. 정작 영하의 날씨처럼 가슴이 녹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스스로의 힘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 시선에는 다시금 하얗게 서리가 끼었을 테지. 싸늘한 서리가 내 시야를 가리고, 누군가에겐 얼음 화살을 쏘았을지도 모를 차가운 아픔.

 

딸아이를 내려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그렇게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다. 백미러로 본 뒷유리창엔 아직도 서리가 하얗다. 중앙선 너머로 달려오는 차들의 앞유리창이 십 여 분 전의 내 모습과 어딘지 닮아 있다. 겨우 눈만 내놓은 모습들. 뱅뱅이 안경을 낀 듯한 모습에 살풋 웃음이 일다가도, 이내 기도한다. 부디 목적지까지 다들 무사히 도착하기를 비는 마음이다. 차가 집에 당도할 무렵엔 뒷유리창도 녹아 있을 테지.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태양을 향해 있었으니까.
 
어쩌면 싸늘히 식은 가슴이 오로지 구할 수 있는 것은 따스한 햇살 한줄기가 아닌지. 스스로가 등을 돌리지만 않는다면, 태양을 마주 향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추운 겨울날 아침마다 자동차 앞유리창의 서리를 녹여 줄 한줄기 햇살의 은혜를 구하는 간절함으로. 밤새 식었을 내 시린 가슴은 아침마다 따스한 한줄기의 햇살을 구한다.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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