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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499

석 삼 방문이 활짝 열리며 아들이 바람처럼 들어와 누웠는 엄마 먹으라며 바람처럼 주고 간 종재기 푸른 포도 세 알 누가 시키지도 않았을 텐데 누가 한국 사람 아니랄까봐 피 속에 흐르는 석 삼의 수 더도 덜도 말고 석 삼의 숨 하나 둘 셋 하늘 땅 사람 2021. 9. 27.
용담정 툇마루 경주 구미산 용담정 툇마루에 앉으며 먼지처럼 떠돌던 한 점 숨을 모신다 청청 구월의 짙은 산빛으로 초가을 저녁으로 넘어가는 구름으로 숲이 우거진 좁다란 골짝 샘물 소리로 이곳에서 나고 자란 수운 최제우님의 숨결로 용담정에 깃든 이 푸른 마음들을 헤아리다가 장독대 위에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달을 보며 빌던 정성과 만난다 시천주(侍天主) 가슴에 하느님을 모시는 마음이란 몸종이던 두 명의 여인을 한 사람은 큰며느리 삼으시고 또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으신 하늘처럼 공평한 마음을 헤아리다가 용담정 산골짜기도 운수 같은 손님이 싫지 않은지 무료한 마음이 적적히 스며들어 자리를 뜨기 싫은데 흙마당에 홀로 선 백일홍 한 그루 아직 저 혼자서 붉은 빛을 띄어도 마땅히 채울 것 없는 마음 그릇에 모실 만한 것이란 초가을.. 2021. 9. 26.
가을잎 푸른 하늘 길 없는 길을 하얀 뭉게 구름 흘러가는 가을날 푸른 무화과잎 소리 없는 소리로 아무리 손을 뻗어도 아직은 뿌리가 깊어 손인사 하듯 제자리에서 흔들릴 뿐 눈물처럼 떨군 가을잎 한 장 가을 바람이 좋아 얼싸 안으며 돌아 발길에 부대끼다 흙먼지로 돌아가도 이 땅이 좋아 푸른 하늘처럼 2021. 9. 16.
생각은 그림자, 마음이 실체 대상과 마주하는 찰라 거울에 비친 듯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한 마음이 있습니다. 곧이어 생각이 그림자처럼 뒤따릅니다. 종종 그 생각은 마음을 지우는 지우개가 됩니다.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림자가 된 생각에게 맨 첫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무의식 또는 비몽사몽, 명상이나 기도의 순간에 대상과 마주하는 바로 그 순간과 동시에 마음 거울에 비친, 떠오른 그 첫마음이 바로 우리의 본성 즉 본래 마음에 가깝습니다. 곧이어 뒤따르는 의식화된 생각은 단지 본래 마음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실체는 마음입니다. 한 생각을 일으켜 이루어 놓은 이 세상은 마음의 그림자 곧 허상일 뿐입니다. 그 옛날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인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석가모니와 예수가 손가락으로 끊임없이 가리키며 보여준 .. 2021. 9. 11.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기" 이따금 아이들에게 질문을 한 후 돌아올 대답을 기다리는 경우가 있다. 어린 생각에도 엄마한테 혼이 날까봐, 어린 마음에도 자기에게 곤란하다 싶으면, 아이들은 무심코 엉뚱한 말로 둘러대거나, 금방 들통날 적절치 않은 말이 입에서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러한 미흡한 말들은 당장에 주어진 현실을 회피하고 싶다거나, 현실을 충분히 직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아둔함에서 비롯된다. 모두가 일종의 거짓말인 셈이다. 그럴 때면 내 유년 시절의 추억 속 장면들이 출렁이는 그리움의 바다로부터 해처럼 떠오른다. 나의 자녀들과 지금 현재 겪고 있는 똑같은 순간이 나의 유년기에도 있었고, 지금도 그대로 겹쳐진다. 함께 뛰어놀던 동네 언니들이랑 무슨 말을 주고 받을 때면, 큰 언니들은 웃음 띈 얼굴로 사뭇 진지한.. 2021. 9. 10.
말 한 톨 내려주신 말 한 톨 어디에 두어야 하나 글을 아는 이는 종이에 적어두고 글을 모르는 이는 가슴에 심더라 종이에 적어둔 말은 어디로 뿌리를 내려야 하나 가슴에 심어둔 말은 잊지 않으려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기다가 마음밭으로 뿌리가 깊어져 제 육신의 몸이 곧 말씀이 되어 마음과 더불어 자라나고 단지 말을 종이 모판에 행과 열을 맞추어 가지런히 글로 적어두었다면 다시금 마음밭에다가 모내기를 해야 할 일이다 말이란 모름지기 마음을 양식으로 먹고 자라나는 생명체이기에 마음밭에 뿌리를 내린 말의 씨앗에서 연두빛 새순이 움터 좁은길 진실의 꽃대를 지나는 동안 머리를 하늘에 두고서 발은 땅으로 깊어져 꽃과 나무들처럼 너른 마음밭에 저 홀로 서서 꿈처럼 품어 꽃처럼 피울 날을 기다리는 말 한 톨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2021. 9. 9.
오늘의 잔칫상 딸에게 차려줄 때에는 모양새에 신경을 써야 하고 아들에게 차려줄 때에는 양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차려주신 오늘이라는 밥상은 나날이 잔칫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한 명 한 명의 입맛 하나 하나를 다 만족시켜 주는 자연, 그 얼마나 신경을 쓰셨으면, 심지어는 변화하는 우리의 입맛에 발 맞추어, 자연의 진화라는 방법으로 거듭 새로운 잔칫상을 차려 주고 계십니다. 오늘도 새롭게 차려 주신 하루라는 잔칫상에 오늘도 행복한 잔칫날입니다. 어디서부터 눈을 두어야 할 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 지 2021. 9. 8.
가는 길마다 한 점 숨으로 나의 익숙한 산책길은 이 방에서 저 방을 잇는 강화마루 오솔길 하루에도 수없이 오고가는 이 산책길에 내 가슴 옹달샘에선 저절로 물음이 샘솟아 지금 있는 일상의 집이지만 물음과 동시에 낯선 '여긴 어디인가?' 나의 가장 먼 여행길은 집에서 일터를 오고가는 아스팔트 순례길 날마다 오고가는 이 여행길에 무엇을 위하여 달리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 사이에선 숨구멍으로 보이던 마음을 펼치어 언제나 가슴으로 산과 하늘을 가득 맞아들인다 나의 입산 수행길은 일층에서 이층으로 오르는 시멘트 돌층계 틈틈이 오르는 입산 수행길에 오르는 걸음마다 고요한 숨으로 평정심을 지키려는 가는 길마다 한 점 숨으로 되돌아오려는 이러한 내 안의 '나는 누구인가?' 2021. 9. 6.
늘 빈 곳 우리집 부엌에는 늘 빈 곳이 있다 씻은 그릇을 쌓아 두던 건조대가 그곳이다 바라보는 마음을 말끔하게도 무겁게 누르기도 하던 그릇 산더미 그곳을 늘 비워두기로 한 마음을 먹었다 숟가락 하나라도 씻으면 이내 건조대를 본래의 빈 곳으로 늘 빈 곳 하나가 있으므로 해서 모두가 제자리에 있게 되는 이치라니 이 세상에도 그런 곳이 있던가 눈앞으로 가장 먼저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하늘은 늘 빈 곳으로 이 세상을 있게 하는 듯 구름이 모여 뭉치면 비를 내려 자신을 비우듯 바람은 쉼없이 불어 똑같은 채움이 없듯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던가 가슴에 빈탕한 하늘을 지닌 사람 그 고독의 방에서 침묵의 기도로 스스로를 비움으로 산을 마주하면 산이 되고 하늘을 마주하면 하늘이 되는 기도의 사람 늘 빈 곳에선 떠돌던 고요와 평.. 2021. 8.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