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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499

한 개의 입 가려야 할 곳이 두 눈이 아니라서 막아야 할 곳이 두 귀가 아니라서 아직은 한 개의 입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쯤에서 문명의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면 만약에 눈과 귀까지도 가리고 막아야 할 때가 온다면 정신 의식이 미개한 국가가 일으키고 있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탐욕과 전쟁과 어리석음 미개한 국가가 만들어 놓은 허상인 풍요의 굴레 그 늪과 같은 감옥에서 벗어나 맑은 가난이 주는 선물 같은 자유와 배달의 하늘을 오늘 내가 앉은 이 자리에서도 볼 수 있다면 아직은 입 하나쯤은 가려도 괜찮은 것이다 마스크가 주는 고요와 침묵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으며 2021. 5. 6.
아이들 입맛 달래, 냉이, 언개잎, 두릅, 제피잎, 쑥 털털이 쓴 나물 입에도 대지 않으려는 우리 아이들 치킨, 피자, 떡볶이에 자꾸만 봄이 밀려난다 올해도 아이들의 몸 속에 봄을 심지 못해서 큰일이다 이 아이들이 커서 맞이하는 봄은 무슨 맛일까 내 어린 시절 뒷동산에서 뛰놀다 심심해서 꺽어 먹던 배추 꽃대 맛은 지금도 푸른데 아이들 고사리손으로 캐온 쑥을 모아서 쑥 털털이 해서 나눠 먹던 마을 아주머니들은 고향 어린 몸에다 봄을 심을 수 있었던 가난이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인 줄을 두고두고 곱씹는다 2021. 5. 5.
본업 몸을 위해서 먹고 사는 일은 나의 본업이 아니다 언제까지나 부업이지 참을 찾아 그리워하는 일이 몸 받아 태어난 나의 본업이지 그것이 참 잘 먹고 참 잘 사는 일 참과 하나가 되는 참된 일 진선미의 마음이 꽃 피우는 언제까지나 나의 본업이지 참참참 귓전을 맴도는 노랫말 낮은 풀꽃들의 어깨춤 같은 높이 나는 새들의 날갯짓 같은 한 가락에 떠는 현처럼 한 바람에 춤추는 들풀처럼 하늘과 땅을 잇는 숨으로 참과 나를 잇는 일 2021. 5. 4.
햇살 돌틈에 누운 풀 한 포기를 비 걸음으로 달려와서 바람 손으로 부둥켜안고서 해맑은 웃음으로 일으켜 살리는 마음 2021. 5. 3.
나뭇가지 손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이 피고 잎이 피듯 어머니의 손끝이 갈라져서 연분홍 꽃이 피어나고 아버지의 손마디가 툭툭 불거져서 푸르른 잎이 피어난다 오늘도 찻잎을 매만지는 손이 나뭇가지를 닮아갈 무렵 저녁밥 먹으러 오너라 부르는 소리 없는 쓸쓸한 저녁에 나뭇가지가 나뭇가지에게 어진 손을 뻗는다 2021. 4. 30.
처음 3분 라벤더의 연보라빛 곡우 무렵 찻잎의 연두빛 식물이 물과 만나 물들어가는 시간 처음 3분의 만남에서 태초의 우주를 본다 찻잎을 물에 넣고 3분을 우려내면 라벤더와 찻잎은 향이 좋고 단맛을 머금는다 하지만 3분을 넘기면 식물은 쓴맛과 불순함을 내뿜는다 한민족의 경전인 단군의 천부경 일시무시일 석삼극무진본 하나에서 시작해 하나로 돌아가고 그 하나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그 하나 속에는 천지인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들어있는 3의 원리 우주 탄생 빅뱅의 처음 3분은 수소와 헬륨 원자가 결합하는데 걸리는 시간 한밝, 크고 밝은 민족 배달민족의 피 속에 각인된 숫자 3의 신비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작심 3일이라는 옛말과 겹쳐본다 사람의 마음은 3일이 지나면 변한다지만 하루에 수 십 번도 나는 그 3분의 고개.. 2021. 4. 29.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2021년 새해 일지의 제목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으로 정했다 해가 뜨고 지는 일처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일신우일신, 날마다 새롭게 무엇을 새롭게 한다는 뜻인가 아무래도 그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말을 떠올릴 적마다 새로운 깊은 산골 돌 틈에서 샘솟는 석간수 한 모금 마시는 듯하다 이제 머지않아 물은 오월의 신록빛으로 물들겠지 2021. 4. 28.
한 점의 꽃과 별과 씨알 한 점의 꽃 한 점의 별 꽃밭에서 눈 둘 곳 잃을 때 어디 한군데 마음 둘 곳 없을 때 머리위 한 점의 별을 찾듯 발아래 한 점의 꽃을 찾는다 여기 흔한 한 점의 꽃은 낮아지고 작아진 가장 가까운 얼벗 이 땅에 흩어놓으신 별자리 오늘도 하루를 걷다가 마음이 길을 잃으면 한 점의 꽃과 별 그 사이에 사는 나를 지운다 숨으로 나를 지우며 나도 한 점이 된다 한 점의 숨으로 머문 한 점의 빛, 씨알 2021. 4. 27.
얼벗 햇살에도 찌푸릴 줄 모르는 얼굴 곱디 고운 나의 오랜 얼벗 한적한 길을 걷다가 작디 작은 얼굴이 보이면 모른 체 쪼그리고 앉아 벗님과 같은 숨으로 나를 지운다 같은 데를 바라보면 빈탕한 하늘이 있다 2021. 4.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