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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490

밥맛 잃은 김에 일종식을 벗삼아 지난 오월에 떨어진 밥맛이 줄곧 내리막길이더니 햅쌀이 나오는 시월에 밥만 먹어도 맛있다는 시월에 이태원 골목길의 배고픈 청년들 저녁밥 먹는 저녁답부터 부르던 경찰 부르던 국가 부르던 엄마 부르던 아빠 저녁해가 넘어가도록 어둔 밤이 다하도록 부르다가 숨이 멎은 가슴들 마지막 숨을 거둔 이름들 그날에 밥맛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오월 잃은 밥맛은 다시 돌아올 줄 모른다 그럼에도 날마다 좋은날 밥맛 잃은 김에 일종식을 벗삼아 오늘로 오십삼일째 되는 일종식과 오후불식 저절로 한나절의 졸음이 가시고 길어진 하루에 정신이 성성적적한 촛불이다 돌짝밭을 뚫고서 돋아나는 푸른 숨결에 문득 하루 삼시 세 끼의 망상을 누가 만들었을까 2023. 5. 19.
2022년 신학기, 일반고 학생들의 학폭 대응기 춥고 건조한 겨울을 푸르게 지나온 소나무가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로 솔잎마다 낱낱이 따스한 봄햇살을 쬐며 온 산과 마을로 푸른 숨을 내뿜고 있는 봄날입니다. 어느새 우리 마을의 골목길까지 노란 송화가루가 날려와 골목길이 노랗습니다. 봄날의 숲속은 또한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의 교실처럼 시끌시끌 소란스러운가봅니다. 겨우내 마른풀 더미 밑에 움츠려 있던 숲의 작은 생명들이 깨어나며 흙을 들썩이는 소리, 마른 가지 끝 노랑빛을 피우던 산수유꽃이 지고, 듬성듬성 분홍빛을 피우던 진달래가 진 후 비로소 산은 연두빛 살을 찌우기 시작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얼굴처럼 활짝 활짝 빛이 납니다. 하얀 목련이 교정을 환한 등불처럼 밝히는 3~4월의 신학기 교실에서는 책상도 낯설고 담임선생님 얼굴도 낯설고 앞으로 일 년을 함께 .. 2023. 4. 30.
나는 까막눈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까막눈이 되었네 보이는 세상은 태초의 흑암 불과 100년 전에 쓰여진 우리 조상의 역사서도 나는 읽을 줄 모르게 되었다 정약용 선생이 아들에게 보낸 친필 편지도 일연 스님의 도 나는 읽을 줄 모르게 되었다 홍익인간의 단군이 나온다는 과 도 가믈가믈 현묘하다 중도와 중용도 모르면서 중3학년이 되어 치른 중간고사에서 올백을 맞았을 때(음악 빼고) 눈먼 기쁨 그 너머로 별통별처럼 스치던 깨달음 지금 학교 선생님들이 여기저기서 아무 쓸데없는 장난을 치고 계시는구나 교실의 칠판을 그대로 선생님 입말을 그대로 절대 믿음 절대 복사 그렇게 나는 까막눈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문득 가슴으로 스친 그 한 톨의 진실을 국민의 의무.. 2023. 3. 14.
나무는 참선하는 사람 나무는 참선하는 사람 한 자리에 오롯이 앉아서 땅의 흙을 끌어 안으려는 뿌리들의 결가부좌(結跏趺坐) 둥치의 꽂꽂이 세운 허리 숨으로 나를 지우는 무념무상(無念無想) 잔가지들의 자유로운 비상(飛上) 참선하는 나무가 걸어다니는 나무에게 지구별에서 꿈꾸는 하나의 소망은 아마도 나란히 곁에 앉아서 평화의 숨을 나누자는 천명(天命) 숨을 쉬는 일 숨을 쉬는 일 숨 하나로 나를 지우는 일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이 땅에서 천국의 안식을 누리는 삶 2023. 2. 26.
별, 중의 별 보아도 보이지 않는 별무리가 보고프면 별, 중의 별 중학생 아들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흐르는 성운 이마와 턱과 양 볼의 우주 손길이 닿는 곳마다 별은 별을 낳고 별과 별 사이로 펼쳐진 빈 하늘에 스치는 생애 맨 처음 얼굴 중학생의 얼굴에 빛나는 별무리 중용과 중도의 은덕이 깃든 사람의 얼굴 아침 저녁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찰라마다 청년 윤동주의 별이 바람에 스치듯 우리는 이마와 이마를 맞대어 서로의 우주를 향하여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2023. 2. 15.
별 하나 촛불 하나 국민학교 교실에서 서툰 손으로 맨 처음으로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는 작은 창문 곁에 노랑 촛불 하나 중학생이 되어서 동무들이 떠들썩할 때 혼자 맞이하던 크리스마스 전날 밤의 소망은 문방구에서 산 오래 오래 아껴둔 빨간 사과 양초에 불을 밝히는 일 정말로 나는 내 작은 방 창가에 혼자 앉아서 어둔 방엔 나와 촛불 하나뿐 촛불 하나면 아무리 춥고 어둔 겨울 동짓달도 따뜻하였지 그 어둡고 어둡던 스무살의 어둔 터널 속에서도 스치듯 보이던 단 하나는 먼먼 별빛 닮은 별 하나 하늘과 땅이 혼돈하여 온통 혼란스럽던 내 젊은 날의 세상에서 낮고 낮은 곳으로 가장 작고 그늘지고 가난한 곳으로 내려오신 예수의 마음 하나 나의 촛불이 되신 별 하나 2022년 올 겨울도 이 땅 어딘가에선 참 많이도 춥고 서럽고 억울한 사람들.. 2022. 12. 22.
하얀 구절초 곁으로 하얀 구절초 곁으로 가을걷이를 다한 빈 들녘 빈 들녘 곁으로 옛 서라벌 토함산 능선을 배경으로 하얀 구절초를 찍으려고 가까이 다가가서 곁에 앉았더니 흰빛을 잃은 구절초 내 그림자가 그랬구나 보이지 않던 해가 바로 내 등 뒤에 있었구나 토함산 자락을 넘어가는 저 하얀 구름을 따라서 나도 슬쩍 푸른 동해로 고개를 기울인다 이 땅 어디를 가든 해를 등진 순간마다 회색빛 그림이 되는 한 점의 나를 보며 착한 길벗 하얀 구절초가 하얗게 웃어준다 2022. 11. 18.
지구별 학교, 이태원 교실 얘들아 있잖아 엄마가 어릴적에 뛰놀던 골목길에선 동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노랫소리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지 아침 밥숟가락 놓자마자 뛰쳐나가서 뛰놀던 그 옛날 엄마의 골목길은 신나는 놀이터였고 생의 맨 처음 배움터였지 아랫집과 윗집을 이어주는 앞집과 앞집을 이어주는 놀이에서는 그 누구든지 친구가 될 수 있는 어디로든 통하는 길 그 골목길 사이로 우물만한 하늘이 보이는 우리들의 땅 오늘도 골목길에서 언니들을 따라부르던 동네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아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온 세상 어린이가 하하하하 웃으면 그 소리 들리겠네 달나라까지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노래를 부르며 자라난 온 세상 아이들이 오늘은 친구와 친구끼리 .. 2022. 11. 13.
가을에는 밥만 먹어도 맛있지 칠십 노모 주름진 입에서 절로 흘러나오는 말소리 오십을 바라보는 딸이 입으로 저절로 받는 메아리 가을에는 밥만 먹어도 맛있지 경주 토함산 자락 사금처럼 빛나는 가을 들녘 천년의 고도 이곳 황금의 땅에서 황금벼가 누렇게 익어갑니다 옆으로는 푸릇푸릇 배춧잎들이 가을 하늘을 우러르며 키가 자라니 덩달아 입과 입이 춤을 춥니다 겨울에는 밥하고 김치만 먹어도 맛있지 들녘을 달리던 가을 바람이 구절초 꽃잎에 머물러 옳지옳지 맞장구를 칩니다 2022. 1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