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503 삶은 감자가 들려주는 오늘도 고마운 하루를 주시는 흰구름 더불어 푸른 하늘이 푹푹 익어가는 여름날 마트 진열대에 투박한 손글씨로 1키로 2,980원 떨어진 감자값에 순간의 반가움 너머로 한 생각 바람 한 줄기 흙밭에서 떨구던 땀방울 채 마르기도 전에 짠 눈물에 시려 더운 한숨 짓지는 않았을까 산골에 사는 사람 감자 구워 먹고 산다던 윤동주 시인의 한 줄 글에 찌는 가슴으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감자는 밥도 된다는데 문득 스친 거울 속 내 얼굴에도 삶은 감자 같은 무상심심 미묘한 빛 어릴까 새벽예불과 일과를 다하고 나서던 아침 양팔 활짝 핀 꽃처럼 나를 부르시며 안으로 들어오라시며 반기시던 시봉 스님 한 분에겐 떠나는 순간 한 분에겐 새로 온 순간 삶은 감자 껍질 같은 수행자의 옷자락 그 스침에 없던 내가.. 2024. 9. 3. 씻은 손 씻은 손 합장하여 하나 둘 셋 물방울 떨구어 종이수건에도 닦지 말고 잠시 그대로 두고 물기가 어디로 가는고 없는 듯 있으면 바람이 말려주고 손이 스스로 손을 말린다 닦지 않아도 닦을 게 없다 2024. 5. 27. 너의 단점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너에게서 보이는 너의 단점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내 안에 없는 것은 티끌 하나도 비추어 보일 수 없다는 거울처럼 선명한 이치를 문득 눈치챈 찰라부터 널뛰던 나의 불평은 멈추고 세상의 모든 빛은 나를 향할 뿐 천상천하 유아독존 내가 눈을 감으면 눈앞의 부처도 볼 수 없고 내가 귀를 닫으면 예수의 복음도 들을 수 없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 2024. 4. 30. 약단밤 빨간 신호등에 차를 멈추면 창문을 내리고 무조건 내미는 손 손바닥만한 흰 종이 봉투를 열면 무분별지가 하얗게 열린다 다 맛있다 늘 맛있다 배가 고프면 내가 먹고 배가 부르면 가장 먼저 만나는 이에게 주고 곱씹은 약단밤을 삼키며 오로지 한 생각 뿐 가지산 너머로 해가 지기 전에 약단밤들 모두 다 따뜻한 손으로 순한 날의 태화강물처럼 흐르고 흘러 평화의 동해바다로 차도 사람의 발길도 닿지 않으나 모든 생명에게 안전한 그 빈 땅에 멈추어 선 오토바이 한 대 봄날인가 했더니 어느덧 여름인 4월 말 계절을 잊고 웃음 짓는 민들레 한 송이 꽃대 같은 아저씨 그 손에서 피어난 약단밤이 달디 달다 2024. 4. 29. 기도비 출입문 구석에 놓인 작은 접이식 탁자 위에는 기도비 삼만 원 종이접기로 만든 돈봉투가 있고 명단을 적는 출석부가 있고 그런데 사람이 없다 기도비를 받는 사람도 없고 돈봉투를 지키는 사람도 없다 각자의 기도비를 종이 돈봉투에 넣고 스스로 자기 이름을 적을 뿐 겨울 밤하늘이 까맣도록 새벽녘 별빛이 또록해지도록 접었던 두 다리를 폈다가 다시 접는 철야정진 법당 안엔 백여 명이 훌쩍 넘는 대중의 독경소리 침묵 간간히 꽃피는 웃음소리 뿐 기도비는 저 혼자서 밤새 제 청정 도량을 지킨다 이제 산등성이 너머 동녘 하늘이 밝아오는데 어제 치운 눈길 위로 또 쌓이기 시작하는 하얀 눈 새벽 예불 길에 싸리 빗자루를 제 몸인 듯 놀리며 눈을 치우는 사람은 있는데 밤새 수북이 쌓인 기도비를 치우는 사람 아무도 없네 기도비는 .. 2024. 1. 8. 마른잎 풍경 언 땅 가지 끝에 매달린 마른잎 풍경 빛나던 시절 그 모습 그대로 색이 바랜 물이 빠진 무심한 몸을 황금빛 햇살이 안아 내 얼굴도 색이 빠진 후엔 맑은 소리 울리는 마른잎 풍경이 될까? 버석한 몸 마르고 닳도록 씨앗을 품고 부르는 자장가 살으리 살으리 사르랑 사르랑 살갗을 스치는 겨울바람 결에 울리는 땅에는 평화 하늘에는 영광 귀 있는 자에게 들리는 말씀 오막살이에도 들리는 탄일종 귀 속의 귀에 울리는 법문 빈 가슴 울리는 마른잎 풍경 2024. 1. 5. 목필(木筆) 한 겹의 솜털을 입은 목련 꽃봉오리 붓끝을 닮은 한 겹의 옷 한 겹의 온기 한 겹의 나눔 제아무리 시린 밤도 한 겹의 사랑이면 들숨 한 점에 스르르 실눈을 떠 한 점의 눈길 마주칠 수 있다면 한 점의 별빛 찾아볼 수 있다면 아무렴 서러운 날도 포근히 날 수 있다지 2024. 1. 3. 홀로인 듯 혼자가 아닌 홀로 앉아 차를 마시면 홀로인 듯 혼자가 아닌 우리의 찻자리 차 한 모금에 입가로 번지는 둥근 미소 관세음보살상의 미소를 닮은 길상사의 성모마리아상과 성령님의 진리 차 한 모금에 눈앞으로 펼쳐지는 둥근 하늘을 닮은 마음속 한밝의 하늘 본래면목을 보고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홀로인 듯 혼자가 아닌 이곳 흙으로 빚은 이 몸을 어루만지는 손길 이슬처럼 둥근 진리의 몸이 되도록 새로운 숨을 쉼 없이 불어넣고 있는 없는 듯 있는 숨은 숨 2024. 1. 1.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가?(1) 2023년 올 한 해 나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가? 하늘에 먹구름이 자욱한 계묘년의 마지막 날 한결 가벼워진 나의 얼굴을 묵상한다 문득 연한 눈썹이 부끄러워 덫칠을 하기 시작한 스무 살 낮동안엔 얼굴이 간지러워도 무심코 손이 갈 수 없었던 성역 어린 날 뜬금없이 생겨난 미명의 수줍음을 한 겹 가려주던 그 두 줄기의 선 그 한 겹의 다크 그레이 펜슬 자욱 그 한 꺼풀의 성벽을 허물기까지 스무 이레가 걸렸다 올 한 해 자유로이 나의 얼굴을 웃게 한 건 아이들이 쓰다 남긴 스킨 서너 방울과 온 가족의 바디로션 두세 방울 양 눈썹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개운한 나의 하늘에 해처럼 떠오르는 법정 스님의 찻잔을 든 손 마른 가지 끝에 꽃을 피운 스님의 거칠고 야윈 손마디 같은 하늘을 우러러 툭 터진 꽃자리 스스로 툭 .. 2023. 12. 31. 이전 1 2 3 4 5 ··· 5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