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한 봄이다

신동숙의 글밭(125)


애틋한 봄이다




봄이구나 싶어
바라보면
마른풀이 보인다


꽃이구나 싶어
바라보면
굳은살이 보인다


봄바람은
마른풀을 달래고


봄햇살은
굳은살을 품는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어울려 꽃을 피우는
애틋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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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흙밭에 호미질을 하다가

신동숙의 글밭(124)


단단한 흙밭에 호미질을 하다가


이웃에 두 평 남짓 화단이 있습니다. 시멘트와 벽돌로 담을 두르고 마사토를 쏟아 부워서 만든 작은 공간입니다. 로즈마리, 라벤더, 페퍼민트, 애플민트 등 각종 허브 모종을 한 뼘 남짓 간격을 두고 심은 곳입니다. 그리고 화단의 가장 먼 둘레에는 꽃을 볼 작은 묘목 대여섯 그루를 심었습니다. 이렇게 작년 여름에 만들어 두고는 하늘만 믿는 천수답처럼 알아서 크겠지 하고 무심히 겨울을 지났습니다.


문제는 애초에 쏟아 부은 마사토의 높이가 울타리보다 높다는 점입니다. 비가 뜸하다 싶은 날 호수로 마른 흙밭에 물을 주면, 흙으로 스며 드는 양보다 밖으로 흘러 내리는 양이 많아 보였습니다. 입이 짧은 딸아이를 볼 때면 애가 타는 마음 같습니다. 때때로 교만으로 높아지려는 제 마음에도 가운데가 움푹 낮아져 눈물이 고이는 자리를 내고 또 내려 합니다. 교만함은 이득보다는 손해를 보는 경우의 수가 더 많음을 이제는 경험으로 아는 나이가 됐는가 싶어 가슴께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갑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는데, 줄기는 말라 보이고 겨우 가지 끝에 피운 잎도 야위어 보입니다. 안되겠다 싶어서 점심밥을 먹고 난 후 호미와 모종삽과 고무장갑을 챙겨서 친정 엄마하고 일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밖으로 돌던 몸이 집 안에 머물게 되면서 보이기 시작하는 소소한 집안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집니다. 다들 집에 머물면서 뭘하고 있을까 하고요.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들 그런 마음이신지 더러 전화가 걸려 오기도 하고, 전화를 걸고 싶은 얼굴들을 달처럼 별처럼 떠올려 보기도 하면서 하루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화단 중간에 쪼그리고 앉아서 허옇게 마른 흙을 호미로 푹푹 팠더니, 속에 부드러운 흙이 울컥 토하듯 숨을 쉽니다. 가운데 높은 흙을 퍼 담아 옮겨서 낮은 가장자리에 둑처럼 쌓았습니다. 새로운 울타리를 두르 듯 흙을 쌓아서 둑을 만들었습니다. 어릴 적 모래 놀이터에 앉아서 하염없이 쌓고 허물고 또 쌓던 모래 언덕처럼 모래 터널처럼 모래 물길처럼.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허무시는 손길을 따라서 한없이 낮아지려는 마음으로 낮은 숨을 쉽니다. 한 점까지 낮아진 숨에 고요함이 머물면 한 순간 세상은 맑고 평온하게 보입니다. 


이제는 물을 주면 밖으로 흘러 넘치지 않고 뿌리가 물을 머금도록 묘목을 중심으로 사이 사이 낮게 골을 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밭에 일꾼 지렁이가 하는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흙을 먹고서 흙을 길게 토해 내며 흙에 숨구멍을 내는 지렁이의 삶. 제가 쪼그리고 앉아서 호미질로 하고 있는 일이 지렁이가 하는 일들이 아닌가 하고요. 지렁이와 벌레 작은 생명들이 살지 않는 흙이란 이렇게 척박하고 단단해져 숨 조차 쉴 수 없구나.


봄비가 내린 후 강변에 아이들 새끼손가락 굵기만한 지렁이가 보이면 몇 마리 데려다가 풀어 놓자고 웃으며 얘기했습니다. 비가 그친 후 강변을 산책하다 보면 지렁이가 종종 눈에 띕니다. 징그럽기보다는 언젠가부터 지렁이가 고맙고 소중하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한결 넉넉해졌습니다. 우리집 마당에 저절로 자란 페퍼민트와 돌나물과 수국과 꽈리를 몇 뿌리 뽑아다가 한 뼘 간격을 두고 빈 곳에 옮겨 심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르고 단단한 가슴엔 스며들지 못하는 은혜를 생각하면서, 눈 앞에 보이고 만져지는 단단한 흙에 호미질을 하는 일은, 마음을 벼르는 일 못지 않게 개운한 일이 됩니다. 날이 갈수록 마음과 몸이 하는 일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마음을 지키라는 말씀이 해처럼 빛납니다.


더러 말씀을 들을 때면 양심에 폭폭 찔립니다. 단단한 가슴에 호미질을 하듯 진리의 말씀은 호미날 같습니다. 그렇게 폭폭 찔리고 움푹 패이고 부끄러운 듯 마침내 부드러워진 마음의 골마다 꽃씨를 심자고 했습니다. 온라인 동영상으로 듣는 주일 말씀이 또한 날이 선 호미날처럼 쟁기날처럼 그리고 뿌려지는 꽃씨 같습니다. 무심히 단단해지려는 제 마음밭을 일구시는 보이지 않는 손길을 떠올리며, 고마움에 그리움에 봄비처럼 눈물이 내립니다. 낮아진 마음밭에 눈물이 빗물처럼 고이다가 넘쳐 흘러 좁은 물길이 나면 세상으로 흘러가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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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물이 흐르는

신동숙의 글밭(123)


기도는 물이 흐르는



기도는 물이 흐르는
기도는 숨이 흐르는


품으면 꿈이 되고
피우면 꽃이 되는


하늘 숨으로
하나 되어


본향으로
돌아가는


홀로 깊은 침묵의 강
쉼을 얻는 평화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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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말, "제발, 꽃 보러 오지 마세요!"

신동숙의 글밭(122)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말, "제발, 꽃 보러 오지 마세요!"


봄이 오면 장사익 소리꾼의 곡조가 봄바람처럼 불어오는 듯합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둘째가 세 살이 되고 엄마 품을 벗어나려던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 거실에 펼쳐둔 신문을 넘기다가 하얀 목련꽃 한 송이처럼 눈에 들어온 사진이 있었습니다. 하얀 한복을 곱게 입은 장금도 명인의 하얀 춤사위. 진옥섭 연출가의 땀으로 장금도 명인의 민살풀이를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올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생애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글줄에 예약을 부탁했습니다. 그해 6월, 저는 그렇게 십 여 년만에 자유의 몸이 되어서 혼자서 호젓이 서울행 KTX에 올랐습니다. 


6월의 서울 거리는 따사로웠습니다. 졸업 후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 곳이 서울입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긴 세월을 훌쩍 넘기고, 오랜만에 걷던 가벼운 발걸음마다 그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꽃처럼 다시 피어나는 듯했습니다. 라일락꽃이 한창이던 6월의 어느 날, 돈암동 성신여대 앞 태극당 맞은 편에서 222번 버스를 타고 가던 이른 아침 출근길. 버스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히다가 깜짝 놀라서 몸을 바로 세우고 또 부딪히고, 그렇게 모자란 잠을 꾸벅이다가 잠결에 내린 압구정 3호선 버스 정류장, 그 바쁜 출근길에 청담동 언덕길을 없는 듯, 제 뒤를 따라와서 명함을 내밀던, 어느 종갓집 장손처럼 단정하게 생긴 청년의 수줍은 눈빛. 2년 남짓 생활하던 서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픈 사연도 있었지만, 세월이 한 구비 두 구비 흐른 탓인지 좋았던 기억들만 아름다운 선물처럼 남아 있습니다.


제가 앉은 곳은 관람석이었지만, 장금도 명인의 춤사위에 제 호흡을 실었습니다. 고요히 손끝으로 흐르는 선을 따라서 하얀 저고리가 허공에 그리는 수묵화 같은. 가벼운 듯 무거운 발뒤꿈치 끝이 내딛는 땅은 매 순간 이 세상 처음의 땅 같은. 가슴에서 숨이 드나들 듯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무의 춤 같은. 흐르는 물처럼 구름처럼 고독 속에 호젓이 구도자가 걷는 침묵의 길 같은 장금도 명인의 춤사위. 그 긴 침묵을 깨고 봄바람처럼 불어온 소리가 소리꾼 장사익이었습니다. 그 역시 가슴에서 샘솟듯 꽃을 피우듯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 산제비 넘나들던 성황당 길에~"



많고 많은 사건 사고들에 아랑곳없이 올해도 어김없이 남쪽에선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옵니다. 제주도에서 피기 시작한 매화는 섬진강으로 진해로 경주로 점점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페북에 연일 올라오는 벗님들의 꽃소식들로, 세상의 무겁고 어두운 소식들 사이에서도 틈틈이 가슴이 환해집니다. 산수유, 목련, 민들레, 꽃다지, 진달래, 벚꽃, 유채꽃, 제비꽃, 튤립......  추운 겨울을 견딘 후 올해도 한결같이 피어나는 꽃들이 한창인 봄날입니다.


이 봄날에 "제발, 꽃 보러 오지 마세요!" 이 땅에 무수히 많은 봄이 찾아왔지만, 아마도 이 세상에 처음으로 태어난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봄바람을 막으려는 무모한 일처럼 꽃놀이를 막으려는 마음들의 힘겨움이 조금은 헤아려지기에, 어쩔 수 없이 막아야만 하는 그 마음들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민살풀이의 장금도 명인이 내딛던 가벼운 듯 무거운 발걸음처럼 긴 호흡처럼, 훌쩍 떠나고픈 가벼운 마음을 내려놓고 또 내려놓으려 합니다. 


그렇지만 집 안에서 생활해야 하는 이 봄날에도, 사람은 사람이라서 아름답습니다.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 꽃이 지면 같이 울던~" 가슴으로 숨을 쉬는 일이 또한 가슴으로 꽃을 피우는 일임을 스스로가 알아차릴 수 있다면, 매 순간을 영원으로, 지상에서 천국을 사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같이 웃고, 같이 울고, 같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또 있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겨울나무의 고독과 침묵 속에서 활짝 피운 봄꽃처럼, 지난한 일상 속에서 틈틈이 멈추어, 고독과 침묵 속에서 불어오는 성령의 자유자재하신 하나님을 봄바람처럼 느낄 수 있다면, 거룩한 성전인 제 가슴에도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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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뜰에서 불어오는 맑고 투명한 바람

신동숙의 글밭(121)


속뜰에서 불어오는 맑고 투명한 바람


세상에서 불어오는 무거운 소식들로 연일 답답하고 무거운 가슴입니다. 답답하고 무거운 가슴을 내려놓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 어설프게 안고서 주신 하루의 언저리를 서성거렸습니다. 유튜브로 법정스님의 법문을 듣다가, 고미숙 고전평론가의 강의도 듣다가, 목사님의 말씀을 듣다가, 가는 곳마다 법정 스님의 저서 <홀로 사는 즐거움>을 끼고 다닌 하루였습니다. 


저녁밥을 먹은 후 마저 치우지도 못하고, 법정 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을 챙겨서 떠들썩한 식구들의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잠시 출가를 하였습니다. 식구들로부터 떠나와서 출가를 하는 장소는 거실 쇼파가 되기도 하고 제 방이 되기도 합니다. 


식구들과 함께 한 집에 살면서도 서로가 참 다르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다 챙겨주고 일일이 간섭하기보다는 언젠가부터 어설픈 엄마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점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잠시 잠깐 주어지는 엄마의 빈 자리가 도리어 선물 같은 시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늦은 밤에 딸아이는 떡볶이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낮에 아들은 누나 곁에 나란히 앉아서 저도 따라서 색색깔 쿠키 반죽을 빚습니다. 사용설명서를 봐 가면서 오븐에 굽기까지 저 혼자서 다 해냅니다. 엄마의 역할은 그런 자녀들의 모습에 틈틈이 감탄하면서 맛있게 먹어 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홀로 사는 즐거움>을 이미 예전에 읽으면서 연필로 연하게 밑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친 흔적이 많이 있습니다. 거듭 다시 읽어도 읽을 때마다 새롭고, 맑은 샘물을 마신 듯 푸른 하늘을 본 듯 제 속뜰로 맑고 투명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귀한 글들 중에서,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이 봄날에 함께 나누고픈 단락이 있어서 그대로 옮깁니다. 


"<마태복음>에 이런 구절이 있다.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그 모진 추위와 비바람과 뙤약볕에도 꺾이지 않고 묵묵히 참고 견뎌낸 그 인고의 의지가 선연한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소로우의 일기≫에서 소로우는 이렇게 쓰고 있다.
  '꽃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그에게 있는 아름다운 침묵이다.'

앞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한바탕 쓸고 닦아냈다. 아침나절 맑은 햇살과 공기 그 자체가 신선한 연둣빛이다. 가슴 가득 연둣빛 햇살과 공기를 호흡한다. 내 몸에서도 연둣빛 싹이 나려는지 근질거린다."(법정, <홀로 사는 즐거움>, 63~64쪽)


그 옛날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홀로 봄을 맞이하시던 법정 스님의 모습이 고요하고 투명하게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합니다. 글숲을 거닐며 스님의 속뜰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답답하던 가슴을 슬고 지날 때마다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제 가슴을 누르던 것은 바윗돌이 아니라 쌓이고 쌓여서 두터워진 모래 먼지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슬고 슬고 슬면 얼마든지 맑게 슬어낼 수 있는 세상의 먼지, 때때로 진흙탕이 될 때면 한 송이의 연꽃을 피울 수도 있는 그만치의 탁한 세상 말입니다. 이 땅에 한결같이 찾아와 줘서 고마운 봄날, 세상에서 불어오는 탁한 바람을 씻기는 건, 자연의 봄바람과 맑은 영혼의 속뜰에서 불어오는 맑고 투명한 바람인가 봅니다. 


딸아이는 자기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남편과 아들은 둘이서 얘기를 나누는지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소리가 정겹습니다. 그제서야 홀로 글숲을 거닐던 순례길에서 돌아와 저녁식사 뒷정리를 하러 주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늦은 밤 유튜브로 법정 스님의 육성 법문을 틀어 놓고 설거지를 하기로 했습니다. 듣다가 울컥 울컥 눈물이 나서 기침을 막으라는 팔꿈치로 눈물을 닦아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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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금단 현상인가, 예수 따르기인가

신동숙의 글밭(120)


예배 금단 현상인가, 예수 따르기인가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말한다면 침묵을 해야 하지만, 예배당 안에서 무리하게 예배 모임을 강행하려는 일부의 교회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연일 드물게 올라오는 포스팅에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아서 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현재 코로나 집단 감염 예방을 위한 공공수칙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현 시국입니다. 그런 중에 일부의 기독교 목회자와 성도들의 모습에서 예배 금단 현상을 보고 있습니다. 중독과 금단 현상이란 곧 나의 신앙이 깨어 있지 못한, 졸음 운전처럼 졸음 신앙이라는 증거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종교란, 나와 이웃의 생명을 살리려, 깨어 있는 사랑이 될 때에만, 존재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그런 사랑이란, 매 순간 깨어서 나와 이웃을 보살피려는, 자비와 긍휼의 마음이 아닌가 하고요. 그처럼 열린 가슴에는 보다 이기적인 중독이 아닌, 보다 이타적인 중심이 자리 잡을 테니까요.


월 회원권을 끊어 놓고 헬스장과 수영장을 다니며 몸을 푸는 사람들은 하루만 쉬어도 몸이 무겁다고 합니다.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시는 권사님들은 어쩌다 새벽기도를 빼먹은 날은 하루가 영 시원찮고 허전하다 하십니다. 그리고 쉼없이 새벽기도의 재단을 쌓으십니다.


하지만 종교 생활이 단순히 하루의 몸풀기를 위한 중독의 대상으로 전락 될 때, 그렇게 졸음 종교가 향하는 길은 노쇠함이 아닌가 하고요. 저 역시도 빌었던 기도 제목처럼, 제 일신과 가족의 안락함과 물질의 부유함과 어딘지 모호한 세계 평화만을 기도 제목으로 삼으려는 기복신앙은, 맹목적 믿음을 낳고, 맹목적 추종을 낳고, 맹목적 졸음 종교인을 낳고, 중독적 종교 생활인을 낳고, 주변의 이웃들과 사회에 대해선 점차 무관심으로 흐를 소지가 다분한 종교적 태만이 아닌가 하고요. 토머스 머튼의 말처럼, '세례는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삶 속에서 종교생활이 마약처럼 단지 중독의 대상일 뿐이라면, 그것은 생명이신 예수의 복음에 대한 신성 모독은 아닌가 하고요. 성령이 살아서 역사하는 신앙인의 가슴에선, 예배가 맹목적 믿음의 중독이 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가슴에 성령이 살아서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신앙인의 가슴은, 닫힌 가슴이 아닌 열린 가슴일 테니까요. 머튼의 말처럼, '한 종교인의 영적 성숙도는 개방성에 있습니다.' 이방인과 이웃을 향해 언제나 열린 가슴이셨던 복음의 예수를 다시금 떠올려봅니다.


이웃들도 먼저 믿은 기독교인처럼, 똑같이 보고 똑같이 느낄 수 있는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뿌리에서 분화된 개체이니까요.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겐 너무나 상식이 된 개념이기도 합니다. 교회 건물 밖에 있다고 해서, 노아의 방주 밖에 있다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그 옛날 예수는 예배당만을 찾아다니면서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전하시진 않으셨으니까요. 오늘날에도 당분간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고 하여, 삶 속에서 예배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성전은 신앙인의 몸이니까요. 우리의 몸이 성전이니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이미 말씀하고 계시듯이요.


자유이신 하나님을 예배당 건물 안에만 가둬 놓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유이신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든 가실 수 있는 살아 계신 분일 테니까요. 예전처럼 함께 모여서 간절히 주일 예배를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모르는바는 아닙니다. 예전처럼 예배당 안에서 늘 가족처럼 함께 기도하며, 함께 예배 드리고, 함께 식사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살갑게 지내던 성도들이 보고 싶고 그리운 마음들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내 가족과 내 교회의 교인이 소중한 만큼 주위에 이웃도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잃어버린 마지막 한 명까지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 있든, 교회 밖에 있든 자기가 선 자리에서, 매 순간을 깨어 있으려는 자비와 긍휼의 모습으로, 세상을 비추어 주는 기독교가 저는 언제나 그립습니다. 그리고 간절합니다. 기독교를 손가락질 하는 세상 사람들 조차도, 그들의 마음 한 켠에선, 어느 순간 기독교인들이 따뜻한 가슴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따스한 가슴이란,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는 하나된 가슴에 불붙는 온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따스한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은 빛과 소금 같아서, 거리의 전도지와 말이 없이도 가슴으로 바로 느낄 수 있는 그런 따스한 사랑일 것입니다. 예수가 하늘로 오르시며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의 가슴마다 공평하게 성령을 선물로 주고 가셨으니까요.


저에겐 매일 찾아오는 하루가 암흑과 혼돈으로 시작됩니다. 그 무거움으로부터 하루를 깨우는 말씀이 있습니다. 현실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눈을 뜨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거듭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것은, 저에게 다가오는 매 순간이 암흑과 혼돈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어렵습니다. 여기서부터 하루의 첫걸음, 어쩌면 매 순간의 첫걸음을 내딛으려 거듭 이 말씀을 먹고 아니, 품고 살아가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육신의 호흡처럼 가슴이 그 한 말씀으로 끊임없이 숨을 쉬기를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내딛는 한 걸음에 등불 하나를 조심스레 비추는 말씀,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 세상의 무수한 가치관과 혼돈의 땅을 살아가는 저에게 예수가 보여준 온전한 마음이 없었다면, 아니 몰랐다면 제 인생은 여전히 암흑과 혼돈 속에 헤매었을 지도 모릅니다. 진리의 영으로인한 그러한 스스로에 대한 물음과 인도하심이 아니라면, 세상은 그야말로 사이비 신천지와 극악무도한 n번방과 극도의 혼돈과 암흑의 세상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는 제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빛이 됩니다. 예수가 보여준 온전한 마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하나님과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한 말씀을 등불처럼 씨앗처럼 품기를 원합니다. 아마도 육신의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영혼의 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코로나19 바이러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킴으로, 다함께 무사히 견디며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는 중요한 때입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제 스스로에게 거듭 던지는 물음을 되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혹시 예배 금단 현상으로 마음에 갈등을 겪고 계시는, 일부 기독교의 목회자와 성도들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나의 현재 신앙의 반응이 단순한 예배 금단 현상인가, 예수 따르기인가.' 그리고 또 거듭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의료진들을 비롯해서 구석구석 애쓰시는 분들이, 세상엔 드러나지 않은 곳에 더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이라면, 가슴에 살아 있을 성령과 예수가 가시고자 하는 곳으로 마음이 따라가기를. 안락한 예배당만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되고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에게로, 몸이 갈 수 없다면 마음이라도 흘러갈 수 있기를, 예수라면 그리 하시지 않을까 싶은 마음입니다. 제가 성경에서 본 예수는 그런 분이시기에.


오늘의 한 걸음에 비추는 등불 하나는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묵은 교리와 종교적 전통과 맹목적 믿음과 잠든 중독과 금단 현상들의 낡은 옷을 벗고, 홀가분한 자유의 날개옷을 입으신 예수를 가슴에 품기를 스스로가 원합니다. 종교가 예배 금단 현상을 일으키는 마약이 아닌, 깨어 숨 쉬는 생명과 자비와 긍휼과 사랑의 물길이 되어 세상으로 흐를 때에만, 살아 있는 종교로써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은가 하고요. 그리고 이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기가 지나고 더불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러한 교회를 통해서 예수의 복음은, 빛과 소금이 되어서 세상을 향해 비출 수 있을 테니까요. 여기까지 좀 지루한 사색의 산책길을 걸어왔습니다. 여기까지 다 읽으신 분들에게서 인내심의 은총을 봅니다. 노란 유채꽃이 살랑이며 푸른 하늘을 맑게 흔들어 놓고 있는 봄날입니다. 이제막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아름다운 자연이 들려주는 경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오늘도 매 순간 고요한 예배의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내 영혼이 비로소 안식을 누리는 침묵의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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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연약한 생명에게

신동숙의 글밭(119)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연약한 생명에게


한 사람의 역할이 한 가지는 아닙니다. 생활하는 환경과 만나는 사람이 다양한 만큼, 다양한 역할이 때론 다양한 인격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선 순한 사람이 가정에선 엄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저 역시 부족한 사람이다 보니 아이들한테 목소리가 올라갔다가 이내 후회하기도 합니다. 오래전 독립운동을 하기 위에서 집을 나서던 윤봉길 의사의 바짓단을 붙들고서, "아버지 제발 가지 마세요." 매달린 것은 여섯살 난 그의 어린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엔 너무나 어린 나이였던 그의 아들에게 윤봉길 의사는 무정한 아버지였겠지요. 아들이 자라고 인생을 살아가면서는 아버지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었을 테지만, 한국의 독립 운동가와 그의 가족과 후손들은 너무나 힘겨운 삶을 살아온 게 아픈 역사적 현실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한국의 독립 운동가, 당신들의 뜨거운 가슴과 희생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의 깊은 흐름이 되고, 나무의 뿌리가 되어준 당신들에게 역사는 언제까지나 감사하며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그 마음이 경제적 보상으로 연결되지 못한 아쉬움은 아직도 청산 되지 못한 과거사가 덩그러니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체는 아닙니다. 끊지 못한 지배와 피지배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지켜낸 것은 그림자인 경제적 풍요로움과 권력이 아니니까요. 일제강점기 암흑의 터널을 지나며 그들이 지켜낸 것은 한국인의 얼과 한글과 말입니다. 얼과 한글과 말에 깃든 정신과 맑은 영혼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수단으로 삼으려는 그 시선이 일제강점기 때 지배자의 시선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배자 밑에서 제 가족만이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같은 조선인이면서도 그 밑에서 작은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충실한 노예가 된 얼 빠진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나라가 해방이 되었으나, 그 무리들은 여전히 물질적 풍요로움과 권력의 충실한 노예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더욱 물질과 권력의 충실한 노예가 되기 위해서, 자신보다 연약한 사람을 수단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얼이 빠진 마음을 봅니다.


하지만, 연약한 계층을 착취하면서도 그들의 또 다른 인격은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어른과 아버지가 되기도 합니다. 이미 뱃속에서부터 누려온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그들의 자녀는 고액 과외와 유학의 풍요로운 코스 요리가 아니면 밥숟가락을 들지 않겠다고 떼를 쓸 테니까요. 때론 자신보다 연약한 사람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서라도 이제껏 누려온 레스토랑의 코스 요리를 포기할 수는 없는지요. 영혼의 맑은 숨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요.





과도한 욕심의 권력과 물질적 풍요로움이 낳고 낳은 것은 어쩌면 비인격 또는 죄가 아닌가 하는 지점입니다. 왜 그토록 존경받는 선현들이 가난한 이들을 껴안으며 자발적 가난을 강조했는지 헤아려봅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다가 마지막에 물질의 풍요로움과 권력과 안락에 주저앉았던 대부분의 종교와 영성 지도자들이 추한 모습으로 그 인생의 막을 내린 것은 과거 역사가 거울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이미 길들여진 권력과 물질적 풍요로움의 노예가 된 의식에선, 자신보다 연약한 사람이 자신과는 다르게 보이는 것인지요? 그 지점에서 저는 늘 아픕니다. 일제 강점기 때 지배자의 시선과 경제 지배자, 권력 지배자의 시선에서, n번방의 연약한 미성년자를 성노예로 삼은 지배자의 시선을 봅니다. 가슴에 바윗돌을 끼얹은 것 같습니다. 가슴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 무게감으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맥 빠진 손으로라도 틀어진 것들을 바로 추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라나는 아들과 딸들이 영혼의 맑은 숨을 쉴 수 있는 건강한 세상을 수채화처럼 시처럼 이 땅에 흙에 그려봅니다.


존엄한 사람을 내 욕망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시선에서 죄가 시작됨을 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이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선 안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신보다 연약한 사람이나 생명을 수단으로 삼아선 더더욱 안되는 것입니다. 그 옛날 예수가 왜 그토록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를 강조했는지, 그 마음이 빛으로 드러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제가 평소에 지키려고 하는 기본 공식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인격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연약한 생명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가 그의 참 모습입니다.'


예수가 그토록 강조했던 잃어버린 어린 양은 사실은 우리 모두였구나, 라는 깨달음입니다. 나와 또는 가족 중에 누구든 그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교수가 그가 속한 교수의 입장만을 옹호하고, 종교인이 그가 속한 종교인만을 옹호하고, 제 자신이 제가 속한 가족만을 옹호한다면 그것은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자신과 집단 외에 사람은 상관없다는 듯이 타인으로 보고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마음이 바로 죄를 낳는 무지의 시작임을 봅니다.


교수가 그보다 연약한 학생을 챙기고, 종교인이 그보다 무지한 비종교인을 챙기고, 엄마가 이웃집의 자녀도 내 자녀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일 때, 그 사회는 비로소 맑은 숨을 쉴 수 있을 것입니다. 피가 서로 통하는 모습이니까요. 심장에서 나온 혈액은 언제나 발바닥으로 발가락 끝까지 내려갑니다. 손끝까지 온몸 구석구석을 막힘없이 돌아서 정수리까지 올라갔다가 심장으로 되돌아올 때 그 신체는 건강한 몸이 됩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언제나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흘러의 내리지 못하면 안개가 되어 감싸안기라도 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시선, 언제나 시작은 따뜻한 심장, 가슴입니다. 나와 너는 다르지 않다는 시선으로부터 가슴은 따뜻하게 데워질 수 있습니다. 건강한 몸, 건강한 정신, 건강한 인간관계, 건강한 사회, 건강한 인격, 건강한 영혼은 어느 한 구석도 막히거나 소외된 곳이 없는 상태입니다. 어딘가 막히고 쌓인 것을 우리는 병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이 없는 모습일 때, 한 사람은 모두가 모두는 한 사람이 되어 피가 순환하는 모습일 때, 건강한 신체가 될 것입니다. 제 개인이 인격의 결을 고르기 위해서 오늘도 스스로에게 거듭 묻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연약한 생명을 대하는 그 마음이 진정한 나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지켜온 선하고 맑은 하늘을 닮은 홍익인간의 마음, 밝은 배달의 마음입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들으신 이야기 내용을 그대로 옮깁니다.


'예전에 35세 된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학교 다닐 때 최고의 성적을 내고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입사해 늘 어머니는 이 아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회사에서 적응을 못해 한 해 두 해 힘들어 하던 아들은 결국 마음의 병이 생겨 회사를 그만 두고 정신 병을 치료하며 지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35년 동안 아들은 저를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아니 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 같아요. 이제는 모든 것 내려 놓고 아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마음을 쓸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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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풀밭 교실

신동숙의 글밭(118)


초록 풀밭 교실





산책길을 따라서

초록 풀밭 세상이다


초록 풀밭 교실이
문도 벽도 쉬는 시간도 없이
푸른 하늘처럼 열려 있어요


초록 칠판 여기저기
햇살 분필로 칠하는 곳마다


흰 냉이꽃
푸른 현호색
분홍 광대나물

노랑 유채꽃
투명한 이슬


정의로운 풀과 나무들

초록 풀밭 교실에는
햇살 담임 선생님이 계셔서


행복한 초록별 학교에서

제 빛깔들 마음껏 뿜으며

한껏 피어나는 어린 풀꽃들


잠꾸러기 친구야
이제 그 갑갑한 손바닥 폰세상에서 


개구리처럼 튀어 나와
우리 다함께 배우며 뛰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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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목련이 어진 마음으로 피었습니다

신동숙의 글밭(117)


하얀 목련이 어진 마음으로 피었습니다


봄을 들이려고 창문을 열어두었습니다. 방바닥이 가루로 버석입니다. 어김없이 찾아온 불청객 황사입니다. 황사가 방 안에까지 찾아오던 날, 마당에 돌담 위 하얀 목련은 최선의 모습으로 환하게 피었습니다. 


하얀 날개를 단 흰새처럼, 백의의 천사 간호사들의 하얀 마스크처럼, 뛰어 다니는 국립검역원들의 흰방역복 날개처럼, 숨 돌릴 틈 없이 코로나 반응 검사를 하는 의료진들의 김 서린 하얀 땀방울처럼, 흰 꽃등처럼 하얗게 피었습니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는 목련이 기침에 좋다며, 목련꽃이 피는 내내 꽃잎처럼 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목련꽃 봉오리와 목련 꽃잎을 차로 마시면 목이 환하게 시원해진다고도 합니다. 


코로나의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시는 모든 분들에게, 기침에 좋다는 하얀 목련의 순결한 마음으로 응원을 보냅니다. 


하얀 방역복 안에서 온몸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처럼 눈물처럼, 하얗게 피어나는 그대들의 하얀 마음들이 하얀 목련꽃입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하얀 마스크 안에서 환히 피어나는 하얀 땀과 애정 어린 눈물과 어진 미소가 이 세상에서 가장 환한 꽃인 줄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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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분유 먹이기

신동숙의 글밭(116)

강아지 분유 먹이기

 

시골 할아버지 집에 백순이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백순이는 진돗개 어미입니다. 다섯을 낳았는데, 셋만 살아남았습니다. 아들은 주말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듯했습니다.

 

용돈을 챙겨서 강 건너로 강아지 젖병을 사러간다며 마스크를 쓰고 자전거를 타고서 쌩 집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강아지 분유를 사야한다며 저 혼자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유튜브로 뭘 그리 열심히 보는가 싶었더니, 강아지 분유 타는 방법입니다.

 

 

 

 

토요일 아침, 제일 먼저 일어나서는 아빠를 깨웁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습니다. 얼른 가서 강아지 세 마리를 품에 안고서 분유 젖병을 입에 물려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때론 엄마의 밥 그릇에 있는 밥까지 푹 떠가는 식탐꾸러기 아들에게서 신기하게도 모성애를 봅니다.

 

생명은 그런 건가 봅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한테도 꼭 성씨를 붙이니까요. 김복순, 김탄. 강아지를 제 동생 쯤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선교원을 다닐 때면 늘 해마다 우정상을 받아오던 아들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정이 참 돈독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학교에도 갈 수 없습니다. 학원도 쉽니다. 친구집에 놀러 가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잠까지 설쳐 가며 몇 날 며칠을 손꼽아 기다려온 토요일입니다. 강아지 세마리에게 강아지 젖병으로 강아지 분유를 먹이는 일. 차에 가면서 먹으라며 오렌지를 싸주려고 하니, 시간이 걸려서 안된다고 합니다. 평소에 그 좋아하는 오렌지도 마다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우습기도 합니다. 자고 나면 키가 크듯 보이지 않는 마음도 그렇게 자라고 있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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