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506 목필(木筆) 한 겹의 솜털을 입은 목련 꽃봉오리 붓끝을 닮은 한 겹의 옷 한 겹의 온기 한 겹의 나눔 제아무리 시린 밤도 한 겹의 사랑이면 들숨 한 점에 스르르 실눈을 떠 한 점의 눈길 마주칠 수 있다면 한 점의 별빛 찾아볼 수 있다면 아무렴 서러운 날도 포근히 날 수 있다지 2024. 1. 3. 홀로인 듯 혼자가 아닌 홀로 앉아 차를 마시면 홀로인 듯 혼자가 아닌 우리의 찻자리 차 한 모금에 입가로 번지는 둥근 미소 관세음보살상의 미소를 닮은 길상사의 성모마리아상과 성령님의 진리 차 한 모금에 눈앞으로 펼쳐지는 둥근 하늘을 닮은 마음속 한밝의 하늘 본래면목을 보고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 홀로인 듯 혼자가 아닌 이곳 흙으로 빚은 이 몸을 어루만지는 손길 이슬처럼 둥근 진리의 몸이 되도록 새로운 숨을 쉼 없이 불어넣고 있는 없는 듯 있는 숨은 숨 2024. 1. 1.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가?(1) 2023년 올 한 해 나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가? 하늘에 먹구름이 자욱한 계묘년의 마지막 날 한결 가벼워진 나의 얼굴을 묵상한다 문득 연한 눈썹이 부끄러워 덫칠을 하기 시작한 스무 살 낮동안엔 얼굴이 간지러워도 무심코 손이 갈 수 없었던 성역 어린 날 뜬금없이 생겨난 미명의 수줍음을 한 겹 가려주던 그 두 줄기의 선 그 한 겹의 다크 그레이 펜슬 자욱 그 한 꺼풀의 성벽을 허물기까지 스무 이레가 걸렸다 올 한 해 자유로이 나의 얼굴을 웃게 한 건 아이들이 쓰다 남긴 스킨 서너 방울과 온 가족의 바디로션 두세 방울 양 눈썹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개운한 나의 하늘에 해처럼 떠오르는 법정 스님의 찻잔을 든 손 마른 가지 끝에 꽃을 피운 스님의 거칠고 야윈 손마디 같은 하늘을 우러러 툭 터진 꽃자리 스스로 툭 .. 2023. 12. 31. 통도사, 시월의 나한들 무풍한송로를 걸어서 통도사 대웅전으로 향하는 맨발의 산책길은 나와 너를 지우는 기도의 순례길 절마당 가득한 가을 국화꽃 틈새로 가족들의 이름을 공양 올리려는 염원은 시월의 하늘에 닿아 푸르고 인파에 떠밀려도 홀로 고요해 대웅전 유리창으로 보이는 금강계단 부처님의 진신사리탑 갈빛의 좌복에 깃들어 오늘의 백팔배 숙제를 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발이 멈춘 곳은 길바닥을 구르다가 홀로 멈춘 듯한 조막만 한 마른 잎 하나 새벽 빗자루질에 쓸리지 않은 듯 용케 인파에 밟히지 않은 듯 몸이 저절로 허리를 구부려 손끝으로 집어든 갈빛 마른 잎 하나 어디로 돌려보낼까 그제서야 옆을 봅니다. 좌측으로 난 돌층계를 오르며 가지 않은 길을 갑니다. 작은 나무 아래 풀섶이 좋아 보여 허리를 구부려 조심스레 내려놓고 고개를 드니 .. 2023. 10. 5. 우리 인생의 출발점 국화차 한 모금에 그윽해진 가슴으로 고요히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의 출발점은 어딜까 하고 우리가 태어난 집일까? 마음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졸업한 학교일까? 마음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닌 첫 직장일까? 마음은, 아니라고 합니다. 혹, 저잣거리에 떠돌듯 물고 태어났다는 흙숟가락 금숟가락일까? 물음과 물음을 따라서 흐르는 생각을 따라서 깊어진 가슴으로 깊은 숨을 쉽니다. 숨을 쉽니다. 숨을 고릅니다. 날숨과 들숨이 평화롭게 걸어갑니다. 숨을 고르는 이 순간 우리 인생의 출발점에서 날숨과 들숨 같은 생(生)과 사(死)가 사이좋게 걸어갑니다. 해인사의 장경각 법보전 주련에 새긴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時) 날마다 새롭게 숨을 고르는 이 순간마다 모두에게 공평히 내려주시는 은총과 맞닿은 지금이라는 .. 2023. 9. 30. 오늘 뜬 달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답 어둑해진 경주 토함산 하늘가에 뜬 달 하루 일을 마친 엄마가 중1수학 좌표와 그래프를 마친 중2아들에게 오, 달이 떴네 천 년 전 경덕왕도 보았을 서라벌의 달이네 했다 아들은 달님에게 새 자전거 얘기 엄마에겐 좋은 과학 시간 아랫쪽으로 활처럼 휜 저 달이 무슨 달일까? 물어보려는데 일편단심 아들은 새 자전거 얘기 입속에선 상현달과 하현달이 구르지만 침묵한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어 우리 내일도 같이 밤하늘을 바라볼까? 오늘의 달보다 더 살이 쪘을지 더 홀쭉해져 있을지 오늘 뜬 달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그랬더니 고요히 아들의 두 눈이 달에게로 간다 2023. 9. 23. 하루 하늘과 땅 사이로 울리는 하하하 루룰루 노래처럼 흐르는 물처럼 오늘도 좋은 날 되시라고 까마득히 먼 그 옛날 그 한 사람 그 입에서 꽃 핀 하루 2023. 9. 22. 밥맛 잃은 김에 일종식을 벗삼아 지난 오월에 떨어진 밥맛이 줄곧 내리막길이더니 햅쌀이 나오는 시월에 밥만 먹어도 맛있다는 시월에 이태원 골목길의 배고픈 청년들 저녁밥 먹는 저녁답부터 부르던 경찰 부르던 국가 부르던 엄마 부르던 아빠 저녁해가 넘어가도록 어둔 밤이 다하도록 부르다가 숨이 멎은 가슴들 마지막 숨을 거둔 이름들 그날에 밥맛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오월 잃은 밥맛은 다시 돌아올 줄 모른다 그럼에도 날마다 좋은날 밥맛 잃은 김에 일종식을 벗삼아 오늘로 오십삼일째 되는 일종식과 오후불식 저절로 한나절의 졸음이 가시고 길어진 하루에 정신이 성성적적한 촛불이다 돌짝밭을 뚫고서 돋아나는 푸른 숨결에 문득 하루 삼시 세 끼의 망상을 누가 만들었을까 2023. 5. 19. 2022년 신학기, 일반고 학생들의 학폭 대응기 춥고 건조한 겨울을 푸르게 지나온 소나무가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로 솔잎마다 낱낱이 따스한 봄햇살을 쬐며 온 산과 마을로 푸른 숨을 내뿜고 있는 봄날입니다. 어느새 우리 마을의 골목길까지 노란 송화가루가 날려와 골목길이 노랗습니다. 봄날의 숲속은 또한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의 교실처럼 시끌시끌 소란스러운가봅니다. 겨우내 마른풀 더미 밑에 움츠려 있던 숲의 작은 생명들이 깨어나며 흙을 들썩이는 소리, 마른 가지 끝 노랑빛을 피우던 산수유꽃이 지고, 듬성듬성 분홍빛을 피우던 진달래가 진 후 비로소 산은 연두빛 살을 찌우기 시작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얼굴처럼 활짝 활짝 빛이 납니다. 하얀 목련이 교정을 환한 등불처럼 밝히는 3~4월의 신학기 교실에서는 책상도 낯설고 담임선생님 얼굴도 낯설고 앞으로 일 년을 함께 .. 2023. 4. 30. 이전 1 2 3 4 5 6 ··· 5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