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희철의 '두런두런'1158

제단 촛대 하루 한 생각(27) 제단 촛대 예배당 제단 위 두 개의 촛대엔 예배 시간이 되면 촛불을 밝힌다. 불을 밝혀 예배하는 자리와 시간을 구별한다. 녹은 만큼 타오르는 촛불은 때마다 우리의 믿음과 삶을 돌아보게 한다. 촛대 아래 기도문을 적어두었다. 앞으로는 누가 불을 켜고 끄든지 짧은 기도를 바치기로 한다. “빛으로 오셔서, 우리를 고치고 살리소서.” “우리가 잠들 때에도, 주님은 빛이십니다.” -한희철 목사 2019. 1. 26.
말하는 방식 하루 한 생각(25) 말하는 방식 한 구절에 밑줄을 친다. ‘군자이행언, 소인이설언’(君子以行言, 小人以舌言) 군자는 행동으로 말하고, 소인은 혀로 말한다는 뜻이다. ‘행’(行)과 ‘설’(舌)이 선명하게 대비가 된다.맞다, 말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삶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고, 혀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말없이 말하는 사람이 있고, 말로만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한희철 목사 2019. 1. 25.
곤달걀 하루 한 생각(24) 곤달걀 시간이나 세대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은 많은 경우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나 세대를 어디 눈금 재듯 그렇게 나눌 수 있을까. 뭔가 정서가 다를 때, 사물이나 사람을 바라보는 인식이 다를 때,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푸는 방식이 다를 때, 당혹감으로 느끼고는 한다. 그럼에도 불구, 확연하게 눈에 띄는 기준도 있다. 필리핀 선교를 갔을 때였다. 첫날 진료를 마치고 일과를 마감할 때였다. 서로가 도무지 헤어질 줄을 몰랐다. 이러다간 날 새겠다며 우리가 먼저 떠나자고 했을 때, 셋이었는지 넷이었는지 많은 자녀들과 함께 진료를 받으러 왔던 한 젊은 엄마가 들고 있던 바구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보니 달걀이었다. 선교사님 이야기를 들으니 그건 그냥 달걀이 아니었다. 곤달걀이었다. 어릴.. 2019. 1. 24.
밥과 죽 하루 한 생각(23) 밥과 죽 어렵게 말씀을 준비하고 나면 공감이 되는 심정이 있다. 밥상을 차리고 식구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심정이다. 그날 설교로 죽을 쒔는지 밥을 지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안다. 헤아릴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예배 후 나누는 인사다.과한 표현이나 감정보다는 마음이 담긴 웃음이나 고마움이 담긴 악수, 오히려 그것이 밥에 가깝다. 어디 말씀을 사람들의 반응으로 잴까마는. -한희철 목사 2019. 1. 23.
한 장의 사진 하루 한 생각(22) 한 장의 사진 ‘하루 한 생각’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어쩌면 가장 먼 길 한 사람에게 가는 길어쩌면 가장 험한 길 한 사람에게 닿는 길 그 글은 한 사진 속에 담겼다. 먼 길을 걸어가는 한 사람, 김승범 집사가 찍은 사진이었다. 글과 사진이 너무도 잘 어울렸는데, 자꾸 보다 보니 스멀스멀 송구스럽다. 오직 사진으로만 말해야 하는 사진이었다. 혹시 어울리고 싶다면 사진과는 서너 걸음 떨어진 어디쯤, 머뭇머뭇, 그러면 모를까.무엇 하나 보태거나 뺄 것 없는, 보탠다는 것은 침묵 속에 소음을 보탤 뿐인, 홀로 가는 호젓함을 방해하지 않도록 어서 뒷걸음쳐 빠져나오고 싶은 사진 속에 담긴 생각, 서툰 걸음. -한희철 목사 2019. 1. 21.
또 하나의 나 하루 한 생각(21) 또 하나의 나 필리핀 딸락지역을 다녀왔다. 수년 전 정릉감리교회가 창립 60주년을 맞아 예배당 하나를 세운 아스투리아스가 포함된 지역으로, 장로님 내외분은 그 지역에 시니어학교(11~12학년) 건물을 봉헌하기도 했다. 그런 일을 계기로 의료봉사가 시작이 되었는데, 뭔가 동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해오던 비중 있는 일, 왜 그런 지를 말만 듣고 판단을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싶어 동행을 했다. 의료선교는 모두 3곳에서 이루어졌다. 허름하고 좁긴 해도 예배당에서 진료가 이루어졌는데 깜짝 놀랐던 것은 그곳을 찾는 수많은 아이들이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표현이 송구하지만 ‘깨알 쏟아지듯’ 몰려왔다. 피난민촌처럼 여겨질 만큼의 허술한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에, 저 많은 .. 2019. 1. 20.
같은 것은 서로에게 하루 한 생각(19) 같은 것은 서로에게 산이든 강이든 바다든 어디를 찾아도, 나무든 꽃이든 구름이든 무엇을 보아도,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든 새소리든 물소리든 어떤 소리를 들어도, 자연 앞에서 우리는 편안함을 느낀다. 어릴 적 어머니 품속 같은 안도감, 혹은 위로를 얻는다. 자연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자연의 품에 들 때마다 우리가 편안해지는 것은 한 가지, 우리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을 나도 모르게 감지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쇠가 자석에게 끌리듯이 나침반이 방향에 반응하듯이 이 산 소쩍새가 저 산 소쩍새에게 밤새 응답하듯이 사랑하는 이에게 어느새 마음이 가듯이 성질이 같은 것은 서로에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한희철 목사 2019. 1. 18.
간사함 하루 한 생각(18) 간사함 도무지 간사함에 깃들일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믿음, 그런데도 믿는 자들에게서 보게 되는 간사함은 무엇일까? 우리 눈에 그렇다면 주님 눈에야 오죽할까만. -한희철 목사 2019. 1. 18.
울며 씨를 하루 한 생각(17) 울며 씨를 ‘눈물을 흘리며 씨 뿌리는 자, 기뻐하며 거두어들이리라. 씨를 담아 들고 울며 나가는 자, 곡식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시편 126:5~6, 공동번역) 시편의 노래는 내 안에서 시 하나와 만난다. ‘거친 들에 씨 뿌린 자는 들을 잊기 어렵나니 어찌 견딜 수 있는 곳을 가려 아직 너의 집이라 하랴‘ 황동규의 중 제5가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울며 씨를 뿌린다니, 씨를 담아 들고 울며 나간다니, 생각만 해도 먹먹해진다. 거친 들에 씨 뿌리는 자는 들을 잊지 못한다. 견딜 수 없는 곳을 오히려 자기 존재의 집으로 삼는다. 세상은 그렇게 뿌린 씨로 밥을 먹고 산다. 누가 씨 뿌렸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관심이 없는 채로. -한희철 목사 2019. 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