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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58

해안(亥安)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5) 해안(亥安) ‘해안’이라는 지명은 낯설었다. 오히려 ‘펀치볼’이 더 익숙하다. 우리나라 땅인데도 영어로 된 이름이 더 친숙한 아이러니라니! ‘펀치볼’은 6.25전쟁 당시 미군 정찰병들이 해안의 특이한 지형을 보고는 과일 화채를 담는데 쓰이는 ‘Punch Bowl’과 그 모양이 흡사하다고 해서 별명처럼 붙여준 이름이라 한다. 해안을 떠나며 언덕에 서서 바라보니 그곳이 왜 펀치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를 한눈에 이해하게 되었다.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채 그 안에 펼쳐진 드넓은 땅, 펀치볼은 그야말로 하늘을 향해 놓인 빈 그릇 같았다. ‘해안’이라는 이름의 뜻도 뜻밖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다와 육지가 맞닿은 곳을 가리키는 ‘海岸’이 아니었다. 실제로.. 2017. 8. 24.
함께 짐을 진다는 것은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4) 함께 짐을 진다는 것은 “펀치볼은 그 옛날 운석이 떨어져 생겼다는 설과 차별침식분지라는 설이 양분합니다. 전 노아의 홍수 지구 재편 때 만들어진 하나님 작품이라고 주장합니다. 해질 무렵이면 그분이 빚은 작품을 만난다는 기대도 격려가 될 겁니다.” 함광복 장로님이 그렇게 표현했던 펀치볼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처음부터 긴 팔 옷을 입고 나선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조금만 가면 돌산령터널이 나오는데 돌산령터널 안은 한 여름에도 추우니 꼭 긴팔 옷을 챙겨 입으라고, 전날 보건지소에서 만난 마을분이 일러준 말을 너무 고지식하게 따른 결과였다. 바람막이 긴팔 옷은 이내 땀에 젖고 말았는데 그러면서도 터널이 금방 나타나겠지 싶어 옷을 벗지 않은 .. 2017. 8. 22.
이 땅 기우소서!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3) 이 땅 기우소서! 산은 말없이 길을 품고길은 말없이산을 넘느니좋은 벗 좋은 길좋은 벗 좋은 길 -‘동행’ 매해 여름이 되면 부산 에서 주최하는 독서캠프가 열린다. 책 좋아하고, 이야기 좋아하고, 노래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격의 없는 만남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여 2박3일 시간을 함께 보낸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사소한 것에 감탄하고, 별 것 아닌 것에 웃음과 눈물이 터지는, 따뜻하고 진지하고 맑은 모임이다. 오래 전부터 이야기 손님으로 참여를 하고 있는데, 몇 해 전 모임을 가질 때였다. 모임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을까, 모임을 마치는 날 ‘동행’이라는 짧은 글 하나를 썼고 노래꾼으로 참여한 박보영 씨가 곡을 붙였다. 즉석에서 만들어진 노래였지.. 2017. 8. 18.
지팡이와 막대기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2) 지팡이와 막대기 길을 걷는 동안 내내 한 손에 스틱을 잡았다. 스틱 하나의 무게가 얼마나 되랴만, 그래도 짐의 무게를 줄이려고 하나만 챙겨 떠난 스틱이었다. 스틱은 몇 가지 점에서 유용했다. 무엇보다도 안전을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인도가 따로 없는 도로를 걸을 때면 자동차가 지나는 쪽 손에 스틱을 잡았는데, 운전자가 길을 걷는 나를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역할도 했다. 스틱을 손에 잡았다는 것은 하나의 막대기를 손에 들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갑자기 돌발 상황이 생겼을 때, 그것을 막아낼 수 있는 최소한의 도구를 내가 들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그럴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동네를 지날 때마다 짖어대는 개들.. 2017. 8. 14.
숨겨두고 싶은 길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1) 숨겨두고 싶은 길 아직 휴가철이 아니어서 그런지 십이선녀탕 입구는 한산했다. 아예 문을 열지 않은 식당들이 많았는데 다행히 문을 연 식당이 눈에 띄어 들어가니 할머니가 맞아 주셨다. 걷는 시간을 통해 덤처럼 누렸던 즐거움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생각지 못했던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을 때마다 누렸다. 식당에서 만난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손님이 없어 자연스럽게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자식들 이야기, 농사짓는 이야기…,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은 물론이고 점심을 먹으면서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이렇게 시골에 살면 외롭지 않으세요?” 할머니에게서 묻어나는 표정을 보면 전혀 외로운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여쭤보.. 2017. 8. 11.
도움 받으시다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0) 도움 받으시다 우연히 눈에 띈 표지판 덕에 번잡한 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길을 걷던 중 한 미술관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런 곳에 이런 미술관이 다 있구나 싶은, 독특한 조형미를 갖춘 이었다. 때마침 한 젊은 남자가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몇 시에 개관을 하는지를 물어보았더니 10시라 했다. 시계를 보니 8시 40분, 시간 차이가 제법 났다. 그냥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가 말했다. “관심 있으면 들어오셔도 돼요.” 덕분에 2층으로 된 미술관을 혼자서 둘러보았다. 나를 받아준 직원은 일일이 전시관의 조명을 켜주며 불편 없이 둘러보게 해주었다. 수화 김환기, 고암 이응노 등 익숙한 화가의 작품도 있었지만 낯선 작가의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누군가의 이름이 낯선 것은.. 2017. 8. 8.
작은 표지판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19) 작은 표지판 진부령 정상에서 용대리를 향해 내려가는 길은 걷는 즐거움을 맘껏 누리게 했다. 아직 세상이 눈을 뜨지 않은 이른 아침, 산안개가 피어오르는 한적한 길, 그런 길을 혼자 걷는 즐거움을 어느 누가 흔하게 누릴까. 오가는 차도 드물뿐더러 길도 내리막길어서 나도 자연스레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 같았다. 제법 걸어 내려왔다 싶을 때 저만치 앞쪽으로 기가 막힌 광경이 펼쳐진다. 기암괴석이 질주하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용대리(龍垈里)라는 지명이 바로 저 바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용 용’(龍) 자에 ‘터 대’(垈) 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암괴석은 영락없이 용의 등 비늘을 빼닮았다. 용의 등 비늘을 닮았지 싶은 바위가 산등성이를 내달리고 있.. 2017. 8. 4.
왜 걸어요?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18) 왜 걸어요? 이 또한 드문 경험이었다. 그곳이 식당이든, 길가 평상이든 배낭을 내려놓고 쉴 때면 누군가 다가와 먼저 말을 붙이는 이들이 있었다. 낯선 이에게 말을 붙인다고 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닐 터, 그런 점에서 새롭기도 하고 드물기도 한 경험이었다. 생각해보면 내 행색과 무관하지 않은 일이겠다 싶다. 조금만 유심히 보면 나는 길을 걷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가까운 길이 아니라 먼 길을, 한 나절이 아니라 여러 날 걷는 사람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배낭 때문이었다. 배낭이 유별났던 것은 아니다. 길을 걷다 만난 이들 중에는 배낭의 무게를 궁금해 하는 이들도 있었다. 따로 재어보질 않았으니 나도 몰랐다. 일정 중에서 도피안사를 찾아갈 때였다. 신라 시대.. 2017. 7. 31.
오래 걸으니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17) 오래 걸으니 오래 걸으니 비로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걷기 전에는 몰랐고, 알았다 해도 희미한 것들이었다. 내 발이 비로소 내 땅에 닿고 있다는,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 발이 내 땅에 닿고 있다는 느낌은, 그동안 내 땅에 발 딛고 살면서도 내 발이 충분히 현실에 닿지 못했다는, 허공을 딛듯 현실과 거리감을 두고 살아왔다는, 본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어설프고 어색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낯설고 새로웠다. 오래 걸으니 어느 순간부터 땅이 내 발을 붙잡는 것 같았다. 속도에 대한 느낌도 새로웠다. 걸어보니 이게 맞는 속도구나 싶었다. 풀이 자라는 속도, 꽃이 피어나는 속도, 바람이 지나가는 속도, 곡식이 자라는 속도, 나비와 잠자리가.. 2017. 7.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