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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

해안(亥安)

by 한종호 2017. 8. 24.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5)


해안(亥安)


‘해안’이라는 지명은 낯설었다. 오히려 ‘펀치볼’이 더 익숙하다. 우리나라 땅인데도 영어로 된 이름이 더 친숙한 아이러니라니!


‘펀치볼’은 6.25전쟁 당시 미군 정찰병들이 해안의 특이한 지형을 보고는 과일 화채를 담는데 쓰이는 ‘Punch Bowl’과 그 모양이 흡사하다고 해서 별명처럼 붙여준 이름이라 한다.


해안을 떠나며 언덕에 서서 바라보니 그곳이 왜 펀치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를 한눈에 이해하게 되었다.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채 그 안에 펼쳐진 드넓은 땅, 펀치볼은 그야말로 하늘을 향해 놓인 빈 그릇 같았다.


‘해안’이라는 이름의 뜻도 뜻밖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다와 육지가 맞닿은 곳을 가리키는 ‘海岸’이 아니었다. 실제로 ‘해안’에는 어디에도 바다와 맞닿은 곳이 없어 ‘海岸’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곳이다.


‘해안’은 ‘亥安’이라 쓰고 있었는데, ‘돼지 해’(亥)에 ‘편안할 안’(安)을 합한 말이었다. 이름이 ‘亥安’이 된 데에는 유래가 있다고 한다. 분지로 이루어진 그 지역엔 유독 뱀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뱀의 천적이 되는 돼지를 많이 키우게 되었는데, 돼지들이 그 많던 뱀을 잡아먹고 나서야 그 지역이 안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亥安’이라니, 이야기를 듣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화채 그릇 모양으로 둥근 산이 둘러싼 해안, 그 그릇이 얼마나 큰지 감자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해안에서는 두어 가지 마음에 남을 일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해안보건지소 직원들의 친절을 잊을 수가 없다. 원통에서 동행한 김정권 형은 그날 서울로 올라가야 해서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길을 떠났고, 다시 나만 혼자 남았다. 마침 해안에 도착한 시간이 보건소가 문을 닫기 전, 서둘러 보건소를 찾았던 것은 발 상태 때문이었다. 물집 잡힌 것이 여전하여 앞으로 걸어갈 길이 걱정이 되었다.


배낭을 멘 채 지친 모습으로 들어섰기 때문일까, 훅 풍기는 땀 냄새 때문이었을까, 늘 보던 익숙한 주민의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보건소 직원은 조심스레 나를 바라보며 어떻게 왔는지를 물었다. 잠시 상황을 설명하며 발에 잡힌 물집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야기를 들은 보건소 직원은 순간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보건소를 담당하는 공중보건의가 출타 중이어서 규정상 자신들은 진료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서려 하자 잠깐 기다려 보라 하더니 이내 시원한 음료부터 가져다주었다. 과일즙을 희석시킨 음료가 참 시원하고 개운했다. 이번에는 다른 직원 한 분이 압박붕대와 폼 드레싱을 찾아 전해주었다.


의자에 앉아 음료를 마시는 동안 그들은 내게 왜 길을 걷는지를 물었고, 걷는 이유를 말하자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혹시, 목사님이세요?”


무엇이 나를 목사로 보이게 했을까?


“어떻게 알았어요?” 하자


“실은 우리도 크리스천이랍니다.” 하면서, 비무장지대를 따라 걸으며 기도를 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렇게 짐작을 했노라고 했다.


서로 모르는 사람이지만 잠깐 사이 서로를 신뢰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두 직원과 나누는 대화는 미덥고 즐거웠다.


보건소에서 나와 보건소로 가면서 본,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던, 주인이 멀리 나가 있어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모텔 앞으로 와서 주인이 올 때를 기다리며 벽에 기댄 채 바닥에 앉아 있는데, 조금 전에 만났던 보건소 직원이 급히 그곳을 찾아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모텔을 하는 분과 통화를 했는데, 식당 뒤편에 있는 문이 열려 있답니다. 그러니 식당에 들어가서 편히 쉬며 기다리라 해서요.” 알고 보니 2층 모텔과 같은 건물 1층에 있는 식당의 주인이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나그네 된 입장에서 보자면 해안보건지소의 두 여직원은 천사처럼 친절했다. 지나가는 지친 길손에게 그들은 의무 이상의 배려를 전해 주었다.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보라색 붓꽃이 맘껏 피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해안을 떠나 양구를 향할 때였다. 돌산령터널을 향해 걸어가다가 ‘펀치볼 야생화공원’ 앞을 지나게 되었다. 눈이 모자랄 만큼 드넓은 땅에 온갖 꽃들이 피어 있었다. 노란꽃창포가 눈길을 끌었고,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보라색 붓꽃이 맘껏 피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양구군 해안면은 토지 경사도가 높고 마사토가 많이 함유되어 있는데다가 토질은 모래와 모래 진흙으로 되어 있어 겨울이 지나며 언 땅이 녹을 때나 많은 양의 비가 올 때면 다량의 흙탕물이 발생하여 하천 생태계의 오염이 심각했다고 한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군에서는 토사 유출의 방지를 위해 피복력이 강한 향토 야생화와 토양을 덮어 풍해나 수해를 방지하여 주는 지피식물 (地皮植物)을 집단으로 재배하기로 한 것이었다. 야생화 단지를 조성함으로써 생태계를 보존하고 수질을 개선하는 등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시도한 것이었으니, 그런 발상의 전환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 여겨진다.


토사 유출과 흙탕물 방지를 위해 만든 것이 야생화공원이라니, 그런 생각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맞다, 많은 경우 꽃은 좋은 대안이다.


야생화 단지를 바라보며 길을 걷고 있자니, 망초 꽃이 가득 피어난 구역이 눈에 들어온다. 망초 또한 넓은 땅에 무리지어 피어나니 마치 안개꽃처럼 은은하고 아름다웠다.


순간 드는 생각, 야생화공원에서 일부러 저곳에 망초를 심었을까, 그냥 방치한 땅에 망초가 피어난 걸까, 하긴 망초도 야생화이니 얼마든지 저 자리를 차지할 권한이 있는 꽃인데…, 그러다가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흔한 꽃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 일러주기 위해 일부러 그곳에 심은 거라고.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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