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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

이 땅 기우소서!

by 한종호 2017. 8. 18.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3)


이 땅 기우소서!


산은 말없이

길을 품고

길은 말없이

산을 넘느니

좋은 벗 좋은 길

좋은 벗 좋은 길


-‘동행’


매해 여름이 되면 부산 <기쁨의 집>에서 주최하는 독서캠프가 열린다. 책 좋아하고, 이야기 좋아하고, 노래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격의 없는 만남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여 2박3일 시간을 함께 보낸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사소한 것에 감탄하고, 별 것 아닌 것에 웃음과 눈물이 터지는, 따뜻하고 진지하고 맑은 모임이다.


오래 전부터 이야기 손님으로 참여를 하고 있는데, 몇 해 전 모임을 가질 때였다. 모임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을까, 모임을 마치는 날 ‘동행’이라는 짧은 글 하나를 썼고 노래꾼으로 참여한 박보영 씨가 곡을 붙였다.


즉석에서 만들어진 노래였지만 어렵지 않게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던 것은 가사와 곡이 단순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행’의 의미를 서로가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 더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길을 걷기 시작한지 나흘째 되는 날,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함께 길을 걸을 사람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전날 밤 김정권 목사님이 찾아 왔다. 길을 떠나며 몇 몇 분들에게 기도 부탁을 할 겸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둔 형이 하루라도 같이 걷고 싶다면서 먼 길을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길을 걷는 일정 동안 형이 유일하게 시간을 낼 수 있는 날이라고 했다.


정권 형은 지금 영월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수요일 저녁예배를 마치고 늦은 시간에 영월에서 떠나 원통으로 달려왔다. 어둔 밤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형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을 했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다음날 일정을 위해 시간을 아꼈다. 형과 둘이 한 방에서 같이 자는 잠, 피곤한 내가 코를 심하게 골아 형이 잠을 못 이루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나는 눕자마자 곯아떨어지고 말아 그날 밤이 어떻게 갔는지는 모르겠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간단히 씻고는 문제가 된 발을 처치했다. 발가락은 물론 발바닥에도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으니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떠나기 전날 오집사님이 전해준 약품을 꺼내 할 수 있는 모든 처방을 다했다. 걷기 초반에 탈이 나면 안 된다 싶었기 때문이다. 두툼한 폼 드레싱을 통째로 발바닥에 깔고 압박붕대로 칭칭 감은 뒤에 양말을 신었다.


오늘 걸어야 할 구간은 원통에서 시작하여 양구 해안, 펀치볼까지다. 함장로님이 적어준 로드맵에는 30km로 되어 있지만 이틀간의 경험에 의하면 그보다는 분명 더 먼 길을 걸어야 할 것이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아는 이는 다 아는 익숙한 말이다. 오지 중의 오지라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입대를 해서 인제나 원통으로 배치를 받으면 마치 땅 끝으로 배치를 받는 느낌이 들었던, 바로 그 원통 길을 걸어서 가게 된 것이다.


곳곳에 탱크로 된 조형물이 있었다. 평화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탱크라는 역설.


역시 원통은 최전방 지역이다 싶었다. 지축을 울리며 지나가는 탱크도 여러 대를 보았고, 곳곳에서 총소리도 자주 들려왔다. 탱크가 지나갈 때면 아예 길 밖으로 서너 걸음 피해 있어야 할 만큼 탱크의 위용은 대단했다.


일정 내내 날씨가 비슷했지만 그날 형과 걷는 길은 더욱더 유별났다. 하늘에선 구름을 찾기가 어려웠고 볕은 벌침 같이 쏟아졌는데,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길을 걷는 내내 그늘을 만나기도 쉽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혼자라면 훨씬 더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선배가 함께 걸으니 한결 마음이 든든했다. 정권 형은 원통에서 목회를 한 경험이 있어 인근 지리에도 익숙했다. 때마다 길을 묻지 않아도 되는 것만 해도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한지 몰랐다.


땡볕 아래를 걷다 한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정권 형이 길가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 마을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후배 목사님이었다. 같이 인사를 나누고 다시 길을 가려 하는데, 굳이 점심을 먹고 가라고 붙잡는다. 아직 길은 멀고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 그런데도 후배의 말을 따라 식당으로 들어갔던 것은 그 마을을 지나가면 한동안 식당이 없다는 말 때문이었다.


후배가 안내한 식당은 후배 목사님 교회의 교우가 하는 식당이었는데, 길가 바로 옆에 있는 작고 허름한 식당이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최고의 식당이었다. 그날 우리가 먹은 콩국수를 두고 선배는 당신 생애에 가장 맛있는 콩국수였다고 했는데, 그 칭찬이 빈말이 아니었던 것은 나 또한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주문을 한 콩국수는 한참 만에 나왔는데, 식당을 꾸려가는 분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주문을 받은 뒤에야 콩을 갈았다. 그래야 고소함을 지킬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면발은 신기할 만큼 쫄깃했다. 궁금해서 여쭸더니 직접 반죽을 해서 만든 면발이라고 했다. 팔과 어깨가 아프도록 치대면 그렇게 쫄깃해진다는 것이었다. 면발이 그렇다면 말씀의 깊은 맛은 더욱 가볍게 드는 것이 아닐 것이었다.


그 식당에서 콩국수 맛보다 더 감동했던 것은 할아버지의 말이었다. 콩국수를 정말로 맛있게 먹었다고 인사를 드리자, 당신들은 식당을 찾는 이들은 손님들이라 생각하지 않고 모처럼 찾아온 형제를 대접한다는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한다고 했다. 저 맘 하나면 되지, 무엇이 더 필요할까 싶었다.


고맙고 든든한 점심을 먹고 다시 나선 길, 도로는 더욱 달궈져 있었다. 도로 위에 계란을 깨뜨리면 얼마든지 프라이가 될 것 같았다. 온몸은 땀으로 젖었고, 어쩌다 그늘을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그늘 아래로 들어 배낭을 베고 누웠는데, 점점 그 횟수가 늘어났다. 쓰러지는 것보다는 고꾸라지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아예 잠이 들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고단한 일정이 아닐 수가 없었다.


벌침 같은 볕 아래를 걷는 것은 순간순간 한계를 경험하는 일이었다. 드물게 그늘이 보이면 그야말로 고꾸라지고는 했다.


그날 기억될 것은 지글지글 가마솥 같던 날씨도, 가도 가도 목적지가 나타나지 않던 35km 거리도 아닐 것이다. 먼 길을 찾아와 함께 걸어준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 길이 멀고 험할수록 동행은 더욱 든든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마음에 새긴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갈라진 이 땅 기워달라는 기도가 간절함으로 남은 날이었다.


또 한 가지, 잊지 못할 일이 있다. 점심을 먹으며 정권 형이 드린 기도다. 형은 나직한 목소리로 간절함을 담아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갈라진 이 땅을 기우소서!”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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