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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60

할머니의 첫 열매 한희철의 얘기마을(85) 할머니의 첫 열매 주일낮예배를 드릴 때 제단 위에 덩그마니 수박 한 덩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수박농사를 지은 분이 없을 텐데 웬일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농사를 지어 추수하면 교우들은 첫 열매를 제단에 드립니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요. 예배 후 알아보니 허석분 할머니가 가져오신 것이었습니다. 텃밭에다 몇 포기 심었더니 뒤늦게야 몇 개 달렸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사택에 모여 수박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할머니 걱정과는 달리 속도 빨갰고 맛도 여간 단 게 아니었습니다. 노인네가 작실서부터 수박을 가져오느라 얼마나 혼났겠냐며 교우들도 할머니의 정성과 사랑을 고맙게 새겼습니다. 씨는 내가 심었지만 키우기는 하나님이 키우셨다며 첫 열매를 구별하여 드리는 할머니의 정성.. 2020. 9. 15.
나누는 마음 한희철의 얘기마을(84) 나누는 마음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받았다. 그저 심부름만 했을 뿐이라고 인사 받을 때마다 대답했지만 계속되는 인사엔 남이 받아야 할 인사를 내가 대신 받는 것 같아 송구스럽기도 했다. 물난리 소식을 들었다며 수원에 있는 벧엘교회(변종경 목사)와 원주중앙교회(함영환 목사)에서 성금을 전해 주었다. 지하 셋방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신혼부부가 드린 결혼반지가 포함된 정성어린 손길이었다. 어떻게 써야 전해 준 뜻을 살릴 수 있는 것인지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다가 라면을 사기로 했다. 크건 작건 수해 안 본 집이 없는 터에 많이 당한 집만 고르는 건 아무래도 형평성을 잃기 쉬울 것 같았다. 먹거리가 아쉬운 집에 겨울 양식으로 전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 일은 나중에 다시 관심을 갖.. 2020. 9. 14.
목사라는 말의 무게 한희철의 얘기마을(83) 목사라는 말의 무게 목사라는 말의 무게는 얼마큼일까?때때로 스스로에겐 너럭바위 얹힌 듯 무거우면서도,때때로 사람들의 회자 속 깃털 하나만도 못한 가벼움이라니. - (1991년) 2020. 9. 13.
상처 한희철의 얘기마을(82) 상처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힘든 일이지 싶어 저녁 어스름, 강가로 나갔다.모질게 할퀸 상처처럼 형편없이 망가진 널따란 강가 밭, 기름진 검은 흙은 어디로 가고 속뼈처럼 자갈들이 드러났다. 조금 위쪽에 있는 밭엔 모래가 두껍게 덮였다.도무지 치유가 불가능해 보이는, 아물 길 보이지 않는 깊은 상처들.한참을 강가 밭에 섰다가 주르르 두 눈이 젖고 만다. 무심하고 막막한 세월.웬 인기척에 뒤돌아서니 저만치 동네 노인 한분이 뒷짐을 진 채 망가진 밭을 서성인다.슬그머니 자릴 피한다.눈물도 만남도 죄스러워서. - (1991년) 2020. 9. 12.
글 쓰는 손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한희철의 얘기마을(81) 글 쓰는 손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짜증날 정도로 무더운 날, 아예 마당에 나가 풀을 뽑았다. 집안에 앉아 축축 처지느니 ‘그래, 네가 더울 테면 어디 한번 더워 봐라’ 그러는 게 낫겠다 싶었다. 풀 돋기 시작한 봄 이후 교회 주위로 몇 번은 뽑았지만 여전히 풀들은 돋아났다. 비 한번 오고나면 쑥 자라 오르곤 하는 풀들, 풀의 생명력이란 여간 끈질긴 것이 아니다. 뒤따라 나온 소리와 같이 한나절을 풀을 뽑았다. 흠뻑 젖은 온 몸의 땀이 차라리 유쾌했다. 밤 늦은 시간 책상에 앉아 주보 원고를 쓴다. 어깨도 쑤시고, 잘려 나간 새끼손톱하며 돌멩이가 깊숙이 배겼다 빠져버린 손가락 끝의 쓰라림 하며, 맨손으로 잡아 뽑느라 힘 꽤나 썼던 손마디가 쉽게 펴지질 않는 불편함 하며, 글을 쓰기가.. 2020. 9. 11.
기도하며 일하시라고 한희철의 얘기마을(80) 기도하며 일하시라고 아무래도 우리 뒤에 올 목회자는 마음이 모질어야겠다고, 막 전화를 끝낸 내게 아내가 말합니다. 그 뜻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따금씩 교우들은 예배시간을 앞두고 전화를 합니다. 전화의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일을 나가게 되어 예배를 드리러 갈 수 없게 됐다는 내용입니다. 송구스러움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같은 대답을 합니다. 기도하며 일하시라고, 그것 또한 예배라는 대답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무슨 일 있어도 예배 먼저 드리고 하라고, 엄격하질 못합니다. 어쩌면 교우들 눈에 나는 편한 목사일지도 모릅니다. 원칙보다는 형편을 우선적으로 여기는 듯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 또한 쉬운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슴 깊이 묻어둔, 끝내 양보할.. 2020. 9. 10.
다친 손 한희철의 얘기마을(79) 다친 손 지난 봄철 홍역으로 시작된 규성이의 병치레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쁜 일철, 논둑 밭둑에서 잠들어야 했던 어린 규성이가 막 홍역이 끝나자 이번엔 손을 덴 것입니다. 뜨거운 김이 하얗게 오르는 밥솥에 엉금엉금 기어가 손을 얹고 만 것입니다. 겨우 걸음마를 배워 밥솥 잡고 일어설 나이, 뜨겁다고 이내 손을 떼지 못한 것인데 그러느라 손을 제법 데고 말았습니다. 좋지도 못한 교통 사정, 규성이 엄마가 서너 달 혼났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병원을 다니며 다 나았다 싶었는데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다친 상처는 다 아물었지만 웅크리고 펴지지 않는 손, 손이 아물며 안으로 오그라든 것입니다. 처음엔 엉덩이 살을 떼어 이식수술을 해야 한다는 등 엄두가 안 나는 이야기라 낙심천만이.. 2020. 9. 9.
규성이 엄마 한희철의 얘기마을(78) 규성이 엄마 작실에서 내려오는 첫차 버스에 규성이가 탔습니다. 엄마 품에 안긴 어린 규성이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습니다. 감기가 심해 원주 병원에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엊그제 들에 나가 고추며 참깨를 심었는데, 점심을 들에서 했다고 합니다. 솥을 돌 위에 걸고 나무를 때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인 것이지요. 먼 들판까지 점심을 이어 나르기 힘든 것도 이유였겠지만, 시어머니며 남편이며 몇 명의 품꾼이며, 어쩜 일하시는 분들께 따뜻한 점심을 차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새댁인 규성이 엄마가 점심을 차리는 동안 어린 규성이는 밭둑 위에서 혼자 버둥거리며 누워 있어야 했는데 흐리고 찬 날씨, 감기가 되게 걸린 것입니다. 어린 규성이가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어린 .. 2020. 9. 8.
그리운 햇살 한희철의 얘기마을(77) 그리운 햇살 가물어 물을 대던 기다란 호스가 곳곳에 그대로인데 이번엔 물난리다. 그칠 줄 모르는 빗속에 삽을 들고 물꼬 트는 손길들이 분주하다. “비도 좀 어지간히 와야지. 밤새 빗소리에 한잠도 못 잤어.” 간밤에 잠을 못 이룬 건 투정하듯 말하고 있는 한 사람만이 아니다. 김영옥 집사님 네 강가 밭은 또 물에 잠겼다. 뽑을 때가 다 됐던 당근이 그대로 물에 잠기고 말았다. 드넓은 강가 밭의 대부분은 당근, 당근을 팔 때가 되었는데 다시 물난리다. 하루가 다르게 굵어가던 당근이 빗속에서 짓무른 탓인지 뿌리로부터 썩어 들어오는 것이다. 미리 선금을 주고 이 밭 저 밭 밭떼기로 산 사람은 아예 앓아누웠다. 사정이야 어찌됐건 팔았으니 됐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2020.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