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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57

강가에서 한희철의 얘기마을(100) 강가에서 점심상을 막 물렸을 때 어디서 꺼냈는지 소리가 사진 한 장을 들고 와서는 “아빠, 바다에 가자.” 하고 졸랐습니다. 무슨 얘긴가 싶어 사진을 봤더니 언젠가 강가에 나가 찍은 제 사진이었습니다. 이제 두 돌이 지난 소리는 아직 강과 바다를 구별 못합니다. 얼핏 내다본 창 밖 봄볕이 따사롭습니다. “좋아, 가자.” 신이 난 소리가 벌써 신발을 챙겨 신고 문을 나섭니다. 아내가 규민이를 안고 나섰습니다. 흐르는 냇물을 따라 강가로 갑니다. 냇물 소리에 어울린 참새, 까치의 지저귐이 유쾌하고, 새로 나타난 종다리, 할미새의 날갯짓이 경쾌합니다. 서울에서 있는 결혼식에 대부분의 마을 분들이 올라간 탓에 그 넓은 강가 밭이 모처럼 한적합니다. 파란 순이 돋아 나온 마늘밭이 당근 .. 2020. 10. 1.
아픈 만큼 따뜻하게 한희철의 얘기마을(99) 아픈 만큼 따뜻하게 끝내 집사님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애써 웃음으로 견디던 감정의 둑이 한 순간 터져 엉엉 울었다. 고만고만한 보따리 몇 개 좁다란 마루에 쌓아놓고 무릎 맞대고 둘러앉아 드린 이사 예배.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고 집사님 손 아무 말 없이 잡았을 때, 집사님은 잡은 손을 움켜쥐곤 바닥에 쓰러져 둑 무너진 듯 울었다. 그렇게 울고 떠나면 안 좋다고, 옆의 교우들 한참을 달랬지만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쓰리고 아린 세월. 잠시라도 약해지면 무너지고 만다는 걸 잘 알기에 덤덤히, 때로는 우악스럽게 지켜온 지난날의 설움과 아픔이 막상 떠나는 시간이 되어선 와락 밀물처럼 밀려들었던 것이다. 어린 아들 데리고 하루하루 고된 품을 팔아 끊어질 듯 이어 온 위태했던 삶,.. 2020. 9. 30.
이상한 마라톤 한희철의 얘기마을(98) 이상한 마라톤 단강으로 목회를 떠나올 때 몇몇 분들이 좋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첫 목회지이기도 하고 첫 목회지가 농촌이기도 한지라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중 아직도 기억하는 말이 ‘농촌 목회는 마라톤이다’라는 말입니다. 농촌목회를 하고 있던 한 선배의 이야기입니다. 단거리가 아닌 마라톤이라고, 농촌목회를 마라톤에 빗대었습니다. 단거리는 잠깐만 뛰면 되니까 있는 힘을 다한다, 그렇지만 마라톤은 다르다, 한참을 뛰어야 한다, 그러기에 필요한 것이 체력안배다, 무엇인가를 단 번에 해내려고 덤비다간 자칫 제풀에 지쳐 쓰러지고 만다, 그런 뜻이었습니다. 햇수로 4년, 그동안 농촌에서 목회를 한 짧은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농촌 목회는 마라톤이다’라는 말은 .. 2020. 9. 29.
밤 서리 한희철의 얘기마을(97) 밤 서리 동네 형, 친구와 같이 장안말 산에 오른 건 밤을 따기 위해서였다. 가을 산에는 먹을 게 많았고 그건 단순히 먹을 걸 지나 보석과 같은 것이었다. 신나게 밤을 털고 있는데 갑자기 “이놈들!” 하는 호령 소리가 들려왔다. 산 주인이었다. 놀란 우리들은 정신없이 도망을 쳤다. 하필 주인 있는 밤나무를 털었던 것이다. 한참을 산 아래로 내려와 헉헉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잡히지 않은 것과 제법 자루를 채운 밤이 다행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정신없이 도망을 치느라 친구가 신발 한 짝을 어디엔가 잃어버린 것이었다. 검정고무신이었지만 신을 잃고 가면 집에서 혼날 거라며 친구는 울먹울먹했다. 그때 동네 형이 제안을 했다. 내가 가서 신발을 찾아오겠다, 대신 오늘 딴 밤은 .. 2020. 9. 28.
어느 날의 기도 한희철의 얘기마을(96) 어느 날의 기도 외로운 영혼을 이젠믿습니다.숨 막히는 이유빈틈없는 소유뿌리 없는 비상보다는아무것도 아니어서 텅 빈외로운 영혼들외로워도 외롭지 않은외로워서 외롭지 않은아무것도 없어꾸밈없는 영혼을축복하소서,주님. - (1993년) 2020. 9. 27.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 한희철의 얘기마을(95)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 어릴 적 교회학교는 따뜻한 교실이었다. 들로 산으로 쏘다니다가도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놀던 것을 그만 두고 교회로 향했다. 믿음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린 때다. 이제쯤 생각하기로는 성경 이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회에 가면 언제라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책도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흔치 않던 시절, 우리들 가슴엔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여름이었다. 마침 그날이 수요일이었는데,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요란하게 내렸다. 빗소리에 가려졌는지, 선생님이 안 계신 건지 예배시간이 되었는데도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다 교회로 갔다. 검정 고무신에 우산도 없이 내리는 비를 쫄딱 맞은 채였다. 뚝뚝 빗물을 떨구.. 2020. 9. 26.
삶이 우리를 가르치는 방법 한희철의 얘기마을(94) 삶이 우리를 가르치는 방법 지금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에 이야기합니다. 안갑순 속장님이 담배를 대한 건 놀랍게도 일곱 살 때부터였습니다. 충(회충)을 잡기 위해 담배를 풀어 끓인 물을 마신 것이 담배를 배운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 옛날, 감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속장님은 시집을 갈 때에도 담배를 챙겨갔다 합니다. 끝내 고집을 부려 풀지 않는 보따리 하나를 두고선 모두들 땅문서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담배꾸러미였습니다. 어느 날 며느리가 담배를 핀다는 것을 우연히 눈치 챈 시아버지는 노발대발하는 대신 아무도 모르게 은근히 담배를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시아버지가 어디 밖에 나갔다 오신 날 서랍을 열면, 말없이 약속된 서랍을 열면, 거기엔 언제나 담배 몇 갑이 있었다는 것.. 2020. 9. 25.
그날은 언제인지 한희철의 얘기마을(93) 그날은 언제인지 “축제의 모임 환희와 찬미소리 드높던 그 행렬. 무리들 앞장서서 성전으로 들어가던 일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미어집니다.”(시 42:4) 말씀을 읽다 가슴이 미어지는 건, 시인의 마음 충분히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떠나간 이들 모두 돌아와 함께 예배할 그날은 언제일지, 이 외진 땅에서 그려보는 그 날이 옛 일 그리는 옛 시인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 (1991년) 2020. 9. 24.
고마운 사랑 한희철의 얘기마을(92) 고마운 사랑 심방 다녀오는 길, 사택 김치거리가 떨어졌다는 얘길 들었다시며 김천복 할머니가 당신 밭에 들러 배차(이곳에서 배추를 배차라고 부른다)를 뽑는다. “올 김장 어뜩하나 걱정했는데 나와 보니 아, 배차가 파-랗게 살아있질 않겠어유. 을마나 신기하고 감사하든지. 그러고 보면 곡식이 사람보다두 더 모진 것 같애유.” 지난 번 물난리에 며칠간 물에 잠겼던 강가 밭. 포기했던 배추가 살았다며, 그렇게 하나님 아부지는 먹고 살 길을 다 마련해 주신다며, 배추를 뽑으며 연신 고마워한다. 당신네 김치 할 땐 아까워 못 뽑은 통배추를 쑥쑥 뽑아 짚으로 묶는다. 고마운 사랑,고마운 사랑. - (1991년) 2020. 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