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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07) 4월 16일 4월 16일은 마치 정지된 시간처럼 다가온다. 다른 것은 다 흘러갔지만 흐르지 않던, 흐를 수가 없었던 시간이 힘겹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처럼 찾아온다. 흐를 수가 없었던 시간이기에 언제나 변하지 않은 아픔의 민낯으로 다가온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이젠 그만 하자고. 그만 하자는 말은 꽤나 점잖은 말, 실은 사납고 섬뜩한 말들이 난무한다. 그것은 마구잡이로 쏘아대는 화살과 같아서 피눈물을 흘리는 이의 가슴에 거듭해서 박히고는 한다. 화살이 박히고 박혀 이미 너덜너덜해진 기가 막힌 가슴들 위로. 왜 사람들은 흘러간 시간의 길이만을 말하는 것일까?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왜 외면하는 것일까? 이제는 그만하자고 말하는 이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2019. 4. 17.
개구리 함정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06) 개구리 함정 시간이 지나가도 잊히지 않는 일들이 있다. 그 때는 몰랐지만 마음속 뿌리라도 내린 듯 오래 남는 기억들이 있다. 잊힌 듯 묻혀 있다가도 어느 순간 불쑥 떠오르곤 한다. 때를 기다려 눈을 뜨는 땅속 씨앗들처럼. 그런 점에서 따뜻한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진짜 부자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 가족들과 나눈 따뜻한 기억 몇 가지가 평생 우리를 지켜준다.’ 했던 도스토옙스키의 말도 그런 의미 아닐까 싶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기억 중에는 초등학교 때 일이 있다. 그날따라 종례시간에 들어온 선생님의 얼굴은 무거워 보였다.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으니 집에 늦게 가야겠다며 밖으로 나가 개구리를 한 마리씩 잡아오라고 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것은 이미 땅이.. 2019. 4. 15.
떨어진 손톱을 집으며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05) 떨어진 손톱을 집으며 책상 위에서 손톱을 깎으면 잘린 손톱이 이리저리 튄다. 펼쳐놓은 종이 위로 얌전히 내려앉는 것들도 있거니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튀어 숨는 것들도 있다. 손톱이 잘리는 것도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배제의 아픔일지, 사방으로 튀는 손톱은 비명을 지르는 것도 같다. 손톱을 깎고 나면 눈에 보이는 손톱을 찾아 치우느라 치우지만 때로는 뒤늦게 발견되는 손톱이 있다. 뒤늦게 발견된 손톱을 치우기 위해 취하는 동작이 있다. 두 번째 손가락 끝으로 꾹 누른다. 꾹 눌러 손톱을 들어 올린다. 들어 올린 손톱이 떨어지면 이번에는 조금 더 세게 손톱을 누른다. 누른 만큼, 손가락 끝에 박힌 만큼 손톱은 달라붙는다. 내게서 멀어진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2019. 4. 15.
노동의 아름다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03) 노동의 아름다움 정릉교회 예배당 맞은편에선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다. 감리교 은퇴 여교역자를 위한 안식관을 짓고 있는데, 담임목사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면 공사하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난 겨울 터를 파기 시작할 때부터 2층을 올리려고 준비하는 지금까지 거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집을 짓는 모습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자세히 바라보기는 처음인데, 재미있다. 공정마다 서로 다른 장비와 재료와 인원이 동원된다. 신기하게 여겨지는 장비들이 한둘이 아니다. 분명히 다양한 과정과 일들이 있을 터인데 어떻게 그 과정을 이해하고 주어진 일을 해나가는 것인지,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주어진 하루의 일을 하고, 그 하루하루의 결과물이 쌓이면.. 2019. 4. 13.
그 농담 참말이에요?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02) 그 농담 참말이에요? 막내와 도봉산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 막 터지고 있는 목련에 눈길이 가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나중에 막내가 사진을 보더니 “거 뭐라고 하죠? 먹물로 그린 그림이요.” 묻는다. 수묵화를 말하지 싶었다. 사진의 느낌이 수묵화를 닮았다는 것이었는데, 그런 이해가 좋았다. 깜박 잊고 하지 못한 말이 있다. 다음에 만나면 농담 이야기를 해줘야겠다. 농담 이야기를 하면 농담(弄談)으로 받겠지만, 들려주고 싶은 말은 농담(濃淡)이다. 색깔이나 명암 따위의 짙음과 옅음 또는 진함과 묽음의 정도를 의미 하는, 그 농담 말이다. 아빠가 워낙 엉뚱한 얘기를 잘하니 농담 이야기를 들으면 녀석은 필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농담 참말이에요?” 2019. 4. 12.
봄비가 꽃비로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01) 봄비가 꽃비로 사나운 바람과 함께 봄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지나가는 길에 교우 가게에 들렀다가 먼저 와 계신 원로 여자장로님을 만났는데, 장로님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가게 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뜻밖의 인사를 건넸다. “봄비가 꽃비로 내려요.” 사나운 바람으로 아기 손톱 같은 벚꽃 잎이 눈발처럼 날리고, 허공으로 날아오른 꽃잎들이 마침내 땅 위로 떨어져 길과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을 예쁘고 아프게 수를 놓고 있었는데, 그를 꽃비라 부른 것이었다. 봄비가 꽃비로 내린다는 백발이 성성한 장로님의 그윽한 인사에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은 한 마디 밖에 없었다. “시인이 따로 없네요.” 2019. 4. 11.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 한희철 목사님의 하루 한 생각 100번 째 글, 세상 어딘가에 있는 우물 같은 사람 2019. 4. 10.
당신이 부르실 때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99) 당신이 부르실 때 특별한 일이 아니면 페이스북에 하루 글 하나씩을 올린다. 예전에 썼던 글을 찾아 올리기도 하고, 그 때 그 때 쓴 글을 올리기도 한다. 오래 전 단강에서 목회를 할 때 썼던 글을 하루 한 개씩 올리는 사이트가 있어 가끔씩 그 중의 하나를 찾아 올리기도 하고, 주보나 이런 저런 잡지와 신문에 썼던 글들을 올리기도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지만, 이왕 시작한 일이니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까지는 이어가려고 한다. 최근에는 ‘당신이 부르실 때’라는 짤막한 글을 연이어 올렸다. 한동안 이어오고 있는 ‘어느 날의 기도’였다. 상투적인 기도에서 벗어났으면 싶어 이따금씩 ‘어느 날의 기도’를 적고는 한다. 누구라면 어떨까, 떠오르는 .. 2019. 4. 9.
아우성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98) 아우성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 길을 지나며 보니 꽃집 바깥쪽에 다양한 다육이 식물들이 눈길을 끌고 있었다. 작은 크기지만 모양과 빛깔이 예뻐 바라보다가 그 중 두 개를 샀다. 계산을 하며 주인에게 물었다. “물은 언제 얼마큼씩을 줘야 하나요?” 식물을 제대로 키울 줄을 몰라서 때로는 물을 너무 안 줘서, 때로는 너무 많이 자주 줘서 죽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주인의 대답이 재미있었다. “보면 알아요. 얘들이 아우성을 칠 때 그 때 주면 되요.” 꽃집 주인의 대답은 더없이 단순하고 쉬웠지만 내게는 쉽지 않았다. 잎의 아우성을 알아차릴 수 있는 눈과 귀가 내게 있는 것인지, 도무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2019.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