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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익어가게 하는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94) 우리를 익어가게 하는 “마음이 조금은 평안해지셨어요?” 막 차에 타려는 권사님께 안부를 여쭈었다. 속회 모임을 마치고 속도원들과 점심을 드시러 가는 길이라 했다. 지난주일 목사의 급한 걸음을 알면서도 기도를 부탁할 만큼 권사님은 지금 안팎의 어려움으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계시다. 이애경 그림 “괜찮아요. 돌아보면 살아온 걸음걸음이 기적 아닌 적 없었거든요.” 권사님의 대답은 단순했다. 차에 타며 권사님이 남긴 가볍고 따뜻한 웃음, 고난은 그렇게 우리를 익어가게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2019. 4. 4.
당신이 중단시키기 전까지는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93) 당신이 중단시키기 전까지는 뛰어난 이야기꾼 엔소니 드 멜로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어느 신부가 한 부인이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빈 성당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시간이 가고 두 시간이 가도 부인은 아직도 거기 그대로 앉아 있었다. 신부는 그 부인이 절망에 빠진 영혼이라고 판단하고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다가가서 말했다. 사진/송진규 “제가 어떻게든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오, 감사합니다, 신부님.” 하고 부인은 말했다. “필요한 도움을 모두 받고 있었어요.” 그 말 아래, 두어 줄 떨어진 곳에, 부인이 한 한 마디 말이 더 적혀 있었다. “당신이 중단시키기 전까지는!” 목사인 내가 하는 일이, 목사인 내가 하는 설교가 제발 그런 것이 아니기를! 2019. 4. 2.
거기와 여기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92) 거기와 여기 참 멀리 갔구나 싶어도 거기 있고 참 멀리 왔구나 싶어도 여기 있다 시인 이대흠의 ‘천관’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강으로 간 새들이 강을 물고 돌아오는 저물녘에 차를 마시며, 막 돋아난 개밥바라기를 보며 별의 뒤편 그늘을 생각하는 동안, 노을은 바위에 들고 바위는 노을을 새기고, 오랜만에 바위와 놀빛처럼 마주 앉은 그대와 나는 말이 없고, 먼 데 갔다 온 새들이 어둠에 덧칠될 때, 시인은 문득 거기와 여기를 생각한다. 멀리 갔구나 싶어도 거기 있고, 멀리 왔구나 싶어도 여기 있는, 그 무엇으로도 지워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거리와 경계가 우리에겐 있다. 2019. 4. 2.
달 따러 가자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91) 달 따러 가자 윤석중 선생님이 만든 ‘달 따러 가자’는 모르지 않던 노래였다. “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 가자 장대 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으로 뒷동산에 올라가 무동을 타고 장대로 달을 따서 망태에 담자” 지금도 흥얼흥얼 따라 부를 수가 있다.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2절이 있는 줄을 몰랐고, 그랬으니 당연히 2절 가사를 모를 수밖에 없었다. “저 건너 순이네는 불을 못 켜서 밤이면 바느질도 못한다더라 얘들아 나오너라 달을 따다가 순이 엄마 방에다 달아 드리자” 쉘 실버스타의 달 따는 그물 1절은 2절을 위한 배경이었다. 낭만적으로 재미 삼아 달을 따러 가자고 한 것이 아니었다. 장대 들고 망태를 멘다고 어찌 달을 따겠는가만, 달을 따러 가자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밤이.. 2019. 3. 31.
다시 한 번 당신의 손을 얹어 주십시오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90) 다시 한 번 당신의 손을 얹어 주십시오 며칠간 기도주간을 보내고 돌아와 갖는 새벽기도회, 오랜만에 나누는 말씀이 새롭다. 마가복음서의 순서를 따라 주어진 본문이 8장 22~26절, 벳세다에서 한 눈먼 사람을 고쳐주시는 이야기였다. 두어 가지 생각을 나눴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은 그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바깥으로 따로 데리고 나가신다. 동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고치면 소문이야 금방 멀리 퍼지겠지만, 예수님은 소문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었다. 그를 따로 만나신 것은 그에게 눈을 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눈을 고치신 후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실 때도 마찬가지다.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신다. 집집마다 들러 소문.. 2019. 3. 30.
사랑을 한다면 한희철의 하루 한 샐각(89) 사랑을 한다면 화장실 변기 옆에 시집 몇 권이 있다. 변기에 오래 앉아있는 것은 좋은 습관이 아니라는데, 잠깐 사이 읽는 한 두 편의 시가, 서너 줄의 문장이 마음에 닿을 때가 있다. 시(詩) 또한 마음의 배설(排泄)이라면, 두 배설은 그럴 듯이 어울리는 것이다. 변기 옆에 놓여 있는 시집 중의 하나가 이다. 이대흠 시집인데, 구수한 사투리며, 농익은 생각이며, 시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중의 하나가 ‘성스러운 밤’이었다. 삼십 년 넘게 객지를 떠돌아다니다 갯일에 노가다에 쉰 넘어 제주도에 집 한칸 장만한 홀아비 만수 형님이 칠순의 부모를 모셨는데, 기분이 좋아 술 잔뜩 마시고 새벽녘에 들어오던 날, 그 때까지 도란거리던 노인들이 중늙은이 된 아들놈 잠자리까지 챙겨놔서.. 2019. 3. 29.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88) 길 창밖 동쪽으로 집 한 채를 새로 짓고 있다. 연립주택이지 싶은데 몇 층까지 올리는 것인지 제법 높이 솟아올라, 창 하나를 거반 다 가렸다. 창을 통해 내다볼 수 있었던 하늘이 조금 좁아지게 되었다. 저렇게 높은 건물이 서면 달라지는 것은 풍경만은 아닐 것이다. 바람의 길도 달라질 것이다. 바람에게 어디 정해진 길이 따로 있을까만, 이후로 바람은 자연스레 저 건물을 비켜 지나갈 것이다. 새들의 길도 달라질 것이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날아나던 공간을 이제부터는 조심해서 날아야 한다. 익숙한 대로 날다간 벽에 부딪치고 말 일, 더 높이 비상하여 지나든 옆으로 돌아가든 다른 길을 택해야 한다. 우리가 당연한 듯 어떤 일을 할 때에도, 누군가는 그 일로 인하여 다른 선택을 해야 .. 2019. 3. 29.
비아 돌로로사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85) 비아 돌로로사 정릉교회 현관 앞 주차장 옆으로 작은 마당이 있다. 예배당을 지으며 마을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마당에는 소나무를 비롯한 나무들과 두 개의 파고라가 설치되어 있어, 규모는 작지만 정겨운 느낌을 준다. 사순절을 보내며 마당에 ‘비아 돌로로사’ 14처를 만들기로 했다. 비아 돌로로사는 ‘고난의 길’이란 뜻으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신 길을 일컫는 말이다. 공간이 협소한 까닭에 아쉬운 선택을 해야 했다. 터가 넓고 형편이 된다면 각 처소마다 그곳에 알맞는 조형물을 세우고 싶은 일, 14처를 알리는 내용을 코팅하여 파고라 기둥에 붙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어제 저녁이었다. 창을 통해 바라보니 누군가가 파고라 기둥 앞에 서서 거기.. 2019. 3. 25.
가장 위험한 장소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86) 가장 위험한 장소 아이들의 사망 원인 1위는 ‘금 밟고 죽는 것’이고, 어른들의 사망 원인 1위는 ‘광 팔다가 죽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웃고 말 일을 설명하는 것은 멋쩍은 일이다. 광 팔다 죽는 것이야 금방 짐작이 되지만, ‘금 밟고 죽은 것’이 뭘까 갸우뚱할지 모르겠다. 놀이를 하다가 밟은 금을 말한다. 엉뚱하게도 마크 트웨인은 이런 말을 했다. “침대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이다. 80% 이상의 사람들이 거기서 사망하니까.” 이만한 역설과 통찰이라면 삶이 단순하겠다 싶다. 2019. 3.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