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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세 번의 평화 진입로로 끼어드는 찰라 측방 거울을 스친다 속도를 늦추는 차가 보이면 얼른 진입을 한 후 삼 세 번 비상등으로 뒷차에게 보내는 신호 속도를 늦추어줘서 고맙다는 뜻 그러면 신기하게도 뒷차는 알아들었다는 듯 우리는 사이좋게 달린다 그리고 가끔은 횡단보도 중간에서 보행 신호등을 놓친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때도 비상등으로 삼 세 번 이 순간 도로가 멈추고 뒷차가 고요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걸음 속도에 삼 세 번이 부족할 때가 있다 그러면 또 삼 세 번 또 삼 세 번 삼 세 번 한 점이 되어 숨을 고르면 인도에 올라서서 평화의 숨을 고르신다 하늘 땅 사람 가슴에는 늘 삼 세 번의 숨이 머문다 2021. 7. 9.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 되어 “참으로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요새이시며, 곤경에 빠진 불쌍한 사람들의 요새이시며, 폭풍우를 피할 피난처이시며, 뙤약볕을 막는 그늘이십니다.”(사 25:4)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소서 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전통적인 전례를 중시하는 교회는 지난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켰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탈출공동체가 땅에 파종하여 거둔 첫 번째 열매를 하나님께 바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여름에 수확하는 곡물이 보리라 하여 맥추절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래저래 7월은 농부들에게 분주하고 힘든 달입니다. 보리, 밀, 귀리를 베어내고, 가을 농사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농가월령가는 이맘 때의 풍경을 이렇게 그립니다. “大雨도 時行하고 더위도 극심하다. 초목이 무성하니, 파리.. 2021. 7. 8.
죽은 제비 이속장님이 갖다 준 고추모종을 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에 놀러 온 종순, 은옥이와 함께 교회 뒤에 있는 작은 밭으로 올랐다. 전에 살던 반장님 댁이 담배모종을 위해 뒷산 한쪽을 깎아 만든 비닐하우스가 있던 자리이다. 언덕으로 오르는 곳에 S자 모양의 계단을 만들고선 그 밭에다 토마토, 빨간 호박, 참외, 도라지 등을 조금씩 심었다. 마른날이 계속되면 물도 주고 가끔씩 풀을 뽑기도 한다. 우리끼리 아기 이름을 따서 ‘소리농원’이란 이름을 붙였다. 밭으로 오르는데 보니 제비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 죽어 있었다. 어디 잘못 벽에 부딪쳤지 싶다. 작은 몸뚱이, 저 작은 몸뚱이에서 그 힘찬 날개 짓이 나오다니. 언제 죽었는지 한쪽 날개를 집어 드니 등짝엔 벌써 개미들이 제법 꼬여있었다. 죽은 제비를 들자 종순.. 2021. 7. 8.
빗속을 달리는 저녁밥을 시켰다 빗속에 망설임도 잠시 배고프다 보채는 아들의 성화를 못 이긴다 음식을 내려놓으신 후 달아나시려는 기사님에게 시원한 거 한 잔 드릴까요? 했더니 살풋 웃으시면서 마음만 받겠다고 하신다 다른 기사님들은 테이프를 붙여서라도 음료를 가져가신다고 했더니 그러면 시원한 거 말고 따뜻한 물 한 잔만 주세요, 하신다 온종일 비 맞고... 말씀이 뚝뚝 끊겨도 더 묻지 않는다 얼른 뜨거운 물 반 찬물 반 담아서 커피와 설탕을 조금만 탔다 잠시라도 나무 의자에 앉아서 드시고 가시랬더니 고맙다고 하시며 문을 나가신다 온종일 그칠 줄 모르는 늦은 장맛비가 어스름 저녁 하늘을 짙게 물들이는데 비옷 안으로 삐쩍 마른 나무처럼 오토바이 옆에 서서 떨리던 몸을 녹이는지 걷기에도 미끄러운 빗길을 또 달려야만 집으로 돌아.. 2021. 7. 8.
어린왕자의 의자 서재, 책상의 위치를 바꿨다. 날씨는 덥고 무료하기에 책상 위 책꽂이를 한쪽 옆으로 내려놓고 벽 쪽을 마주했던 것을 서쪽 창가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높이가 잘 맞는 건 아니지만 의자에 앉으면 창문을 통해 많은 것이 내다보인다. 교회 앞 허술한 방앗간 지붕, 아이 뒷머리 기계로 민 듯 나무 모두 잘라내고 잣나무를 심은 신작로 건너편 산, 그리고 그 너머 하늘과 맞닿은 강 건너 산, 그러니까 책상 앞에 앉으면 강원도에 앉아 충청북도의 산을 마주하는 셈이다. 의자를 조금 움직여야 하지만 학교 쪽으로 난 길을 통해서는 학교 갔다 돌아오는 아이들을 볼 수도 있다. 해질녘의 노을과 밤늦게까지 지워지지 않는 어둠속 산과 하늘의 경계선, 막 깨어나는 별들. 몹시 슬플 때에는 해 지는 모습 보기를 좋아했다는 어린왕자,.. 2021. 7. 7.
눈물과 비 이따금 당신들의 눈물을 마주하게 됩니다. 서러운 얘기 서럽게 하다 자신도 모르게 주르륵 흐르는 눈물, 혹은 쓰러져 주체할 줄 모르는 눈물, 그렇게 당신들의 눈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난 망연히 마주할 뿐 무어라 말할지를 모릅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쓰리고 아픈 마음, 괴롭고 힘겨운 시간들, 도대체 와 닿지 않는 생의 위로, 따뜻한 기운, 난 그저 안쓰럽게 당신들의 슬픔을 마주하며 그걸 마음으로 느낄 뿐,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 흔한 성경말씀도 그럴 땐 떠오르지 않고, 떠오르는 몇 구절은 당신들의 눈물과 거리가 느껴집니다. 못난 전도사죠. 그러고 돌아서는 길,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서는 길, 마음속엔 비가 내립니다. 늘 비가 내립니다. - 1988년 2021. 7. 6.
심심 마음에 일이 없는 심심한 날 땅의 일감을 모아 지피던 열심의 불을 끈 후 까맣게 애태우던 마음이 하얗게 기지개를 켠다 심심함의 터널은 호젓이 걷는 오솔길 마음이 마음을 부르는 고독과 침묵이 보내온 초대장 심심 산골 마음의 골짜기에서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면 심심 하늘에 비추어 내 마음 겹겹이 투명해진다 2021. 7. 6.
흔들리는 생 텅 빈, 흔들리는 직행버스.안내양이 책을 꺼내든다. 보니 세계사 참고서. 흔들리는 글씨, 흔들리는 내용, 흔들리는 생. “안녕히 가세요.” 버스에서 내리려하자 어느새 책을 접고 밝게 인사를 한다. 떠나간 버스에서 한참을 눈을 못 떼다. - 1988년 2021. 7. 5.
새장이 갇힌 한 마리 어린 새는 어떻게 울었는지 옛날을 잃어 버렸다가 비오는 밤, 토하듯 울어대는 제 어미의 슬픈 소리를 듣곤 생각나는 듯 방울방울 빗줄기를 목쉬게 한다. - 1988년 2021. 7.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