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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레몬 홍차 신동숙의 글밭(273) 가을은 레몬 홍차 차 한 잔이 주는 여유와 여백을 좋아합니다. 가을빛이 짙어갈 수록 도로변에 서 있는 가로수들도 저처럼 여유와 여백을 좋아하는지, 여름내 푸른 잎들로 무성하던 나무들이 이제는 자신의 둘레를 비우고 덜어낸 자리마다 하늘의 여유와 여백으로 채워가고 있는 11월의 가을입니다. 사람에게도 자신이 살아가는 물질적인 삶의 둘레를 비운 만큼 마음의 하늘이 차지하는 공간은 넓어지리라 여겨집니다. 해 뜨기 전부터 시작하여 해가 져도 그칠 줄 모르는 분주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 멈춤이란 얼음땡 놀이에서 구하는 멈춤의 순간 만큼이나 몸과 마음과 숨을 부자유하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숨을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생명들에겐 왠지 부자유스러운 멈춤을 물 흐르듯이 자유로이 흐를 수 .. 2020. 11. 12.
할머니의 바람 한희철 얘기마을(142) 할머니의 바람 자신의 주름진 얼굴을 ‘얼었던 호박이 서너 번 녹은 꼴’이라고 빗대시는 김천복 할머니는 올해 일흔 일곱입니다. 참 고우신 얼굴에 이젠 정말 주름이 가득합니다. 장에 다녀오는 길, 양말 두 켤레 사가지고 사택에 들리신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으며 그러십니다. “목사님, 딴데루 가면 안 돼. 내가 죽을 때 까정은, 목사님이 날 묻어줘야지.” 작고 주름진 할머니 손을 웃음으로 꼭 잡을 뿐 아무 대답을 못합니다. 나도 할머니의 바람을 꼭 이루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지를 아시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 (1992년) 2020. 11. 12.
우리를 필요로 하는 주님 한희철의 얘기마을(141) 우리를 필요로 하는 주님 매주 목요일마다 원주 자유시장 뒤편 ‘태자’라는 찻집에서 성서연구모임이 열립니다. ‘목요성서연구모임’입니다. 요즘은 마가복음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지난 주였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말씀을 읽고, 지금 나를 제자로 택한다면 뭘 보고 무엇 때문에 택하실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마땅한 대답도 쉽지 않았고, 또 그런 대답이 은근히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도 같아 망설이고 있는데 같이 참석했던 한 군인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아마 나를 운전수로 쓰실 것 같아요. 그 당시야 걸어 다녔지만 지금은 차가 필요하실 테니까요.” 그 군인은 운전병이었습니다. 우리는 다 같이 웃었습니다. 그 웃음이 난처했던 질문을 쉽게 해 주었고, 말씀 속에서.. 2020. 11. 11.
창(窓) 한희철의 얘기마을(140) 창(窓) 단강에서 사는 내게 단강은 하나의 창(窓) 단강을 통해 나는 하늘과 세상을 본다. 맑기를따뜻하기를, 이따금씩 먼지 낀 창을 닦으며 그렇게 빈다. 하늘을 닦는 것, 세상을 닦는 것, 맑고 따뜻해 깊은 하늘을 맑게 보기를, 넓은 세상을 따뜻하게 보기를, 오늘도 나는 나의 창을 닦으며 조용히 빈다. - (1994년) 2020. 11. 10.
빈방은 설레임으로 다가옵니다 신동숙의 글밭(272) 빈방은 설레임으로 다가옵니다 빈방은 설레임으로 다가옵니다. 빈방은 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볼 때의 푸른 설레임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은 텅 비었지만, 바라보는 마음은 비우면 비울 수록 충만해져 오는 이치입니다. 빈방은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즉 순수한 본성을 닮았습니다. 우리의 순수한 본성은 또한 맑은 가을 하늘을 닮아 있는 크고 밝은 하늘의 무진장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빈방을 본 것은 언양 석남사 한 비구님 스님의 방이었습니다. 요즘처럼 단풍이 아름다운 어느 가을날 스물 한 살의 나이에 친구가 구했다는 흑백 필름 사진기로 추억 여행 사진을 담으려 둘이서 버스를 타고서 친구의 이모 스님이 출가한 곳이라는 언양 석남사를 처음으로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학창시절 함께 한 행복한.. 2020. 11. 10.
강가에서 한희철의 얘기마을(139) 강가에서 점심상을 막 물렸을 때 어디서 꺼냈는지 소리가 사진 한 장을 들고 와서는 “아빠, 바다에 가자.” 하고 졸랐습니다. 무슨 얘긴가 싶어 사진을 봤더니 언젠가 강가에 나가 찍은 제 사진이었습니다. 이제 두 돌이 지난 소리는 아직 강과 바다를 구별 못합니다. 얼핏 내다본 창 밖 봄볕이 따사롭습니다. “좋아, 가자.” 신이 난 소리가 벌써 신발을 챙겨 신고 문을 나섭니다. 아내가 규민이를 안고 나섰습니다. 흐르는 냇물을 따라 강가로 갑니다. 냇물 소리에 어울린 참새, 까치의 지저귐이 유쾌하고, 새로 나타난 종다리, 할미새의 날갯짓이 경쾌합니다. 서울에서 있는 결혼식에 대부분의 마을 분들이 올라간 탓에 그 넓은 강가 밭이 모처럼 한적합니다. 파란 순이 돋아 나온 마늘밭이 당근 .. 2020. 11. 9.
침묵의 등불 신동숙의 글밭(271) 침묵의 등불 초 한 개로 빈 방을 채울 수는 없지만 초의 심지에 불을 놓으면 어둡던 빈 방이 금새 빛으로 가득찹니다 백 마디 말씀으로 하늘을 채울 수는 없지만 마음의 심지에성호를 그으며 내 안에 하늘이 금새 침묵으로 가득찹니다 촛불처럼나를 태워 침묵의 등불을 밝히는고독의 사랑방에서 2020. 11. 8.
우리 엄마 한희철의 얘기마을(138) 우리 엄마 종일이가 전화를 겁니다. 종일이는 이따금씩 교회의 공중전화를 찾아와 전화를 겁니다.아빠 돌아가시고선 시내로 나가 새 살림 차린 엄마, 엄마에게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엄마 좀 바꿔 줘.” 자기 엄마를 새엄마로 갖게 된 꼭 자기만한 계집애였을까, 누군가 전화를 받았을 때 종일이는 대뜸 ‘우리’ 엄마를 바꿔달라고 했습니다.가을의 찬비가 며칠째 내리는 쓸쓸한 저녁, 우연히 듣게 된 ‘우리 엄마’를 찾는 종일이의 전화에 확 두 눈이 뜨거워집니다. - (1992년) 2020. 11. 8.
엄마 젖 한희철의 얘기마을(137) 엄마 젖 “아무리 추운 날 낳았다 해두 송아질 방으로 들이면 안돼유. 그러문 죽어유. 동지슷달 추운 밤에 낳대두 그냥 놔둬야지 불쌍하다 해서 굼불 땐 방에 들이문 오히려 죽구 말아유.” 송아지를 낳은 지 며칠 후, 속회예배를 드리게 된 윗작실 이식근 성도님은 이렇게 날이 추워 송아지가 괜찮겠냐고 묻자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송아지는 낳아 어미가 털을 핥아 말려 주문 금방 뛰어댕겨유. 낳자마자 엄마 젖을 먹는데, 그걸 초유라고 하지유. 그 초유를 먹으문 아무리 추운 날이래두 추운 걸 모른대유, 초유 속에 추위를 이기게 해주는 그 무엇이 들어있대유.” 아무리 날이 추워도 갓 태어난 송아지가 어미 젖을 빨면 추위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이 신기하고도 귀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모두가 .. 2020. 1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