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2664 장마 인사 한희철 얘기마을(153) 장마 인사 지난밤엔 천둥과 번개가 야단이었습니다. 야단도 그런 야단이 없었습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천둥과 번개가 하늘을 갈랐습니다. 파르르 번개가 떨면 창가까지 자라 오른 해바라기 이파리는 물론 논가 전기줄까지도 선명했고, 그 뒤를 이어서 하늘이 무너져라 천둥이 천지를 울려댔습니다. 신난 빗줄기도 맘껏 굵어져 천둥과 번개가 갈라놓은 하늘 틈을 따라 쏟아 붓듯 어지러웠습니다. “다들 휴거 됐는데 우리만 남은 거 아니야?”는 아내의 농담이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을 만큼 두렵기까지 한 밤이었습니다. 때마침 정전, 흔들리는 촛불 아래 밀린 편지를 쓰다 쫓기듯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침 일찍 작실로 올랐습니다. 늦은 밤의 기도가 없진 않았지만 무섭게 내린 비, 언덕배기 광철 씨네며 혼자.. 2020. 11. 24. 키워주신 땅에게 신동숙의 글밭(284) 키워주신 땅에게 키워주신 땅에게 얼만큼 고맙냐구요? 마지막 잎새까지 떨구어, 다 주고도 모자랄 만큼 고맙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잎새까지 다 내어주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춥고 시린 마음보다는 저 잎들의 초연함 앞에 이제는 가슴 뭉클한 뜨거움이 올라옵니다. 땅으로 돌아가는 가을잎들이 왜 하필이면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빛깔의 옷들로 갈아입었는지, 그 이유를 곰곰이 헤아리다 보면, 여전히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추운 늦가을 밤에도 가슴이 따스하게 환해져옵니다. 때를 따라서 돌아가는 가을잎의 발걸음을 괜스레 재촉하고 있는 가을비와 가을 바람이 마냥 야속하기보다는, 이제는 길벗이 되었다가 재잘거리며 속을 나누는 도반인지도 모릅니다. 가을 바람이 아무리 차가워도, 황금빛 햇.. 2020. 11. 24. 고추 자루 한희철 얘기마을(152) 고추 자루 망치 자루처럼, 마른 몸매의 지 집사님이 한 자루 고추를 이고 간다. 부론장에 고추를 팔러가는 길이다. 며칠 전엔 여주장까지 가 고추를 팔고 왔다.스물일곱 근, 아귀가 터지도록 고추 자루 묶어 맸지만 한번 팔고 와 몇 집 잔치 부조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곶감고치에서 곶감 빼먹듯 한 자루 한 자루 줄어드는 고추들.버스 운전사 눈치를 보며 지 집사님이 고추 자루를 싣는다. - (1992년) 2020. 11. 23. 가을 달빛을 닮은 눈길로 신동숙의 글밭(283) 가을 달빛을 닮은 눈길로 며칠 동안 간간히 가을비가 내리더니,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어둑한 밤하늘을 환하게 밝혀주던 가로수의 노란 은행잎이 이제는 땅 위에 수북합니다. 그 노란 은행잎 융단을 밟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일으키는 작은 파동이 가을바람의 빗자루질 같습니다. 지난 시월의 어느날 해인사 원당암 달마선원 참선방에서 철야 참선을 마친 후 일찍 나서던 길에, 잠시 보았던 스님들의 분주한 빗자루질 풍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날 느즈막히 길을 나설 때면, 말끔하게 쓸어놓은 공원 산책길과 훤한 절 마당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어쩌다가 떨어진 단풍잎 하나를 발견하고는, 가을 소식인가 싶어 반가운 마음에 줍기도 하고, 곁에 선 나무 아래로 돌려.. 2020. 11. 23. 넉넉한 사랑 한희철 얘기마을(151) 넉넉한 사랑 근 한 달 동안 훈련을 하느라 고생한 군인들을 위해 떡이라도 조금 해서 전하면 좋겠다는 말을 모두가 좋게 받았습니다. 맘씨 좋은 형님 같은 인상의 대대장도 교인이고 하니 부대선교를 위해서도 좋을 듯싶었습니다. 교회 형편이 형편인지라 방앗간에서 서너 말 쌀을 사서 떡을 만들어야지 싶었는데, 잠깐 기다려보라 한 교우들이 어느새 서로들 쌀을 모았습니다. 한 말 두 말 늘어난 쌀이 제법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마을 몇 분도 쌀을 보태 어느새 모은 쌀이 한 가마에 이르렀습니다. 기꺼운 참여, 군에 간 아들 둔 부모도 있고, 군인들 바라보는 마음이 다 내 자식 같아 쌀을 모으는 마음들이 기꺼웠습니다. 서둘러 방아를 돌리고 뜨끈한 절편을 만들어 전했습니다. 한 가마나 되는 떡.. 2020. 11. 22. 충만한 하늘 신동숙의 글밭(282) 충만한 하늘 빈 하늘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기에아침마다 이렇게 환하게 밝아오는지 태양이 비추는 우주 공간은언제나 어둠인 채로 아침이 오지 않습니다. 들숨으로 들으킨 하늘이뼈와 피와 살이 되는 신비로움 몸이 하늘에 공명하여울리면 노래가 되고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를 따라서몸짓은 춤이 되기도 합니다. 비로소 잎들을 다 털어낸 빈 가지를 하늘이 고이 품에 안고서 이 겨울을 지나며 겨울 바람이 웅웅 자장가를 불러주는 겨울밤은촛불 하나만 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긴긴밤 황금빛 햇살을 걸쳐 입은 빈 가지마다새 움을 틔우는 이 충만한 하늘의 사랑을 2020. 11. 22. 우리가 함께 지어가는 삶의 이야기 우리가 함께 지어가는 삶의 이야기 “주님의 길은 바다에도 있고, 주님의 길은 큰 바다에도 있지만, 아무도 주님의 발자취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시편 77:19)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시기를 빕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나면서 방역단계가 1.5단계로 올라갔습니다. 교회는 좌석 수의 30%의 교인만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좌석 수보다 많은 교인이 참석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앞섭니다. 익숙해지지 않는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시할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적응하며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에게는 인내가 필요하다”(계14:12)는 말씀을 날마다 곱씹고 있습니다. 화낼 일도 아니고, 한숨을 내쉴 일도 아닙니.. 2020. 11. 21. 거참, 보기 좋구나 한희철 얘기마을(150) 거참, 보기 좋구나 아침부터 어둠이 다 내린 저녁까지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자기 차례가 돌아왔다. 한 사람 끝나면 또 다음 사람, 잠시 쉴 틈이 없었다. 파마를 하는 분도 있었고 머리를 다듬는 분도 있었다. 노인으로부터 아이에 이르기까지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에 웃음꽃이 피어나기도 했다. 난로 위에서 끓는 산수유차가 들썩들썩 신이 났다. 원주 선미용실의 서명원 청년, 미용실은 한 달에 두 번 쉰다고 했다. 그 쉬는 날 중의 하루를 택해 아침 일찍 단강을 찾아 함께 예배를 드리고, 마을 분들을 위해 머리손질 봉사를 하는 것이다.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는 일, 결코 깨끗하다 할 수 없는 다른 이의 머리를 만져야 하는 일, 늘 하던 일을 모처럼 쉬.. 2020. 11. 21.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신동숙의 글밭(281)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세상엔 매듭 짓지 못하고, 풀리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작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제게 주어진 이 하루도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게 할 뿐입니다. 유약(柔弱)한 가슴에 어떠한 원망이나 분노의 씨앗도 뿌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쩌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노가 내 살과 뼈를 녹이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단속하려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닐 것입니다. 분노를 품고서도, 몸을 움직이며 그럭저럭 일상을 살아갈 때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습니다. 멈추어 바라본 순간에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분노를 제 가슴에 품고서 새벽 기도를 드리던 고요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엄습하던 온.. 2020. 11. 21. 이전 1 ··· 88 89 90 91 92 93 94 ··· 29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