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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 한희철의 얘기마을(139) 강가에서 점심상을 막 물렸을 때 어디서 꺼냈는지 소리가 사진 한 장을 들고 와서는 “아빠, 바다에 가자.” 하고 졸랐습니다. 무슨 얘긴가 싶어 사진을 봤더니 언젠가 강가에 나가 찍은 제 사진이었습니다. 이제 두 돌이 지난 소리는 아직 강과 바다를 구별 못합니다. 얼핏 내다본 창 밖 봄볕이 따사롭습니다. “좋아, 가자.” 신이 난 소리가 벌써 신발을 챙겨 신고 문을 나섭니다. 아내가 규민이를 안고 나섰습니다. 흐르는 냇물을 따라 강가로 갑니다. 냇물 소리에 어울린 참새, 까치의 지저귐이 유쾌하고, 새로 나타난 종다리, 할미새의 날갯짓이 경쾌합니다. 서울에서 있는 결혼식에 대부분의 마을 분들이 올라간 탓에 그 넓은 강가 밭이 모처럼 한적합니다. 파란 순이 돋아 나온 마늘밭이 당근 .. 2020. 11. 9.
침묵의 등불 신동숙의 글밭(271) 침묵의 등불 초 한 개로 빈 방을 채울 수는 없지만 초의 심지에 불을 놓으면 어둡던 빈 방이 금새 빛으로 가득찹니다 백 마디 말씀으로 하늘을 채울 수는 없지만 마음의 심지에성호를 그으며 내 안에 하늘이 금새 침묵으로 가득찹니다 촛불처럼나를 태워 침묵의 등불을 밝히는고독의 사랑방에서 2020. 11. 8.
우리 엄마 한희철의 얘기마을(138) 우리 엄마 종일이가 전화를 겁니다. 종일이는 이따금씩 교회의 공중전화를 찾아와 전화를 겁니다.아빠 돌아가시고선 시내로 나가 새 살림 차린 엄마, 엄마에게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엄마 좀 바꿔 줘.” 자기 엄마를 새엄마로 갖게 된 꼭 자기만한 계집애였을까, 누군가 전화를 받았을 때 종일이는 대뜸 ‘우리’ 엄마를 바꿔달라고 했습니다.가을의 찬비가 며칠째 내리는 쓸쓸한 저녁, 우연히 듣게 된 ‘우리 엄마’를 찾는 종일이의 전화에 확 두 눈이 뜨거워집니다. - (1992년) 2020. 11. 8.
엄마 젖 한희철의 얘기마을(137) 엄마 젖 “아무리 추운 날 낳았다 해두 송아질 방으로 들이면 안돼유. 그러문 죽어유. 동지슷달 추운 밤에 낳대두 그냥 놔둬야지 불쌍하다 해서 굼불 땐 방에 들이문 오히려 죽구 말아유.” 송아지를 낳은 지 며칠 후, 속회예배를 드리게 된 윗작실 이식근 성도님은 이렇게 날이 추워 송아지가 괜찮겠냐고 묻자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송아지는 낳아 어미가 털을 핥아 말려 주문 금방 뛰어댕겨유. 낳자마자 엄마 젖을 먹는데, 그걸 초유라고 하지유. 그 초유를 먹으문 아무리 추운 날이래두 추운 걸 모른대유, 초유 속에 추위를 이기게 해주는 그 무엇이 들어있대유.” 아무리 날이 추워도 갓 태어난 송아지가 어미 젖을 빨면 추위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이 신기하고도 귀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모두가 .. 2020. 11. 7.
세속의 성자들 세속의 성자들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창28:11-12) 주님의 평화가 모든 이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별고없이 잘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지난 두 주 동안 교우들께서 보내주시는 메시지를 보며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감염병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 삶을 알차게 가꾸기 위해 애쓰신 교우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을 유지했기에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는 고백은 우리 가운데 신앙이 어떻게 작동하.. 2020. 11. 6.
평화의 밥상 신동숙의 글밭(270) 평화의 밥상 따끈한 무청 시래기 된장국 한 그릇, 김밥 반 줄, 유부 초밥 세 개, 깍두기 일곱쪽, 수도승들이 산책길에 주운 알밤 한 줌, 제주도 노란 귤 하나로 따뜻하고 맛있는 풍요로운 이 가을날 점심밥상의 축복을 받습니다. 아침부터 분주히 많은 양의 식사 준비를 하시던 누군가의 마음이 손길이, 먹는 이의 입으로 가슴으로 전해지는 거룩한 식사 시간은 그대로 고요한 감사의 기도 시간이 됩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앞마당엔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상이 보이고, 밥을 먹는 제 곁엔 사찰의 공양게송이 가까운, 이곳에선 하느님과 부처님이 사이좋은 이웃입니다. 하나의 평등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이미 깊은 땅속에서 하나에 뿌리를 둔 하나라는 사실을 문득 해처럼 떠올리다 보면 어.. 2020. 11. 6.
어떤 축구 선수 한희철의 얘기마을(136) 어떤 축구 선수 가끔씩 떠올리는 축구 선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중요한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영 자신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실수로 경기를 놓칠 것 같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민 고민 하던 그가 그만의 방법을 생각해 냈고, 운동장에 들어간 그는 열심히, 어느 때 보다도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이란, 공 없는 데로만 뛰어다니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이 자기 앞에 왔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실수를 미리 피하기 위해 그는 공 없는 곳으로만 열심히 뛰어다닌 것입니다. 그럴 수가 있냐며 웃지만, 사실 우리들의 삶이 그럴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실수가 두려워서 삶을 피해 다니는 안쓰러운 모습들. 실수를 두려워하여 삶을 외면하는 자는.. 2020. 11. 6.
밤은 모두를 재워 한희철의 얘기마을(135) 밤은 모두를 재워 오늘도 해는 쉽게 서산을 넘었다.말은 멍석 펼치듯 노을도 없는 어둠산 그림자 앞세우며 익숙하게 밀려왔다. 차라리 밤은 커다란 솜이불모두를 덮고 모두를 집으로 돌린다.몇 번 개들이 짖고 나면 그냥 어둠 뿐,빛도 소리도 잠이 든다. 하나 둘 별들이 하늘로 돋고대답하듯 번져가는 고만고만한 불빛들저마다의 창 저마다의 불빛 속엔저마다의 슬픔이 잠깐씩 빛나고그것도 잠깐 검은 바다 흐른다. 그렇다.밤은 모두를 재워모두를 같은 품에 재워날마다살아있는 것들을 다시 한 번 일으킨다.검은 바다를 홀로 지나 것들을. - (1992년) 2020. 11. 5.
조율하는 날 신동숙의 글밭(269) 조율하는 날 밥은 먹었니?가슴 따뜻해지는 말 차 한 잔 하자가슴 설레이는 말 어느 날 문득그러한 초대에 따뜻해지지도 설레이지도 않는 날 내 마음의 결을 고요히 조율하는 날 2020. 1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