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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눈물 한희철 얘기마을(156) 할아버지의 눈물 정작 모를 심던 날 할아버지는 잔 수 모르는 낮술을 드시곤 안방에 누워버렸습니다. 훌쩍훌쩍 눈물을 감추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달랠 수도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모를 심기 훨씬 전부터 할아버지는 공공연히 자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모심는 날을 일요일로 잡았고, 흔해진 기계모를 마다하고 손모를 택했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는 일곱 자식들이 며느리며, 사위며, 손주들을 데리고 한날 모를 내러 내려오기로 했던 것입니다. 두 노인네만 사는 것이 늘 적적하고 심심했는데 모내기를 이유로 온 가족이 모이게 됐으니 그 기쁨이 웬만하고 그 기다림이 여간 했겠습니까. 기계 빌려 쑥쑥 모 잘 내는 이웃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논둑을 고치고 모심기 알맞게 물을 가둬놓고선 느.. 2020. 11. 27.
할아버지의 사랑고백 한희철 얘기마을(155) 할아버지의 사랑고백 약주만 들면 교회에 들르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허리가 반으로 접힌 꼬부랑 할아버지입니다. “내가 슬퍼.” 마음 아픈 일들을 장시간 이야기하기도 하고, 당신 살아온 이야기 하며, 마을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나를 향한 호칭도 전도사님에서부터 목사님, 약주가 과한 날은 조카, 때론 자네가 되기도 합니다. “난 자네가 좋아. 아들 같어.” 평소엔 일마치고 돌아올 무렵 주머니 가득 달래를 캐가지곤 “이런 거 어디 나는지 모를 것 같아 캐 왔다.”시며 건네주곤 하는데, 약주를 하시면 약주 기운에 “난 자네가 좋다.”고 그 어려운 사랑고백 술기운에 기대 하듯 거듭거듭 그 이야기를 합니다. 날 좋아한다는 고백이 누구로부턴들 반갑지 않겠습니까만 한 할.. 2020. 11. 26.
남모르는 걱정 한희철 얘기마을(154) 남모르는 걱정 종하가 산토끼를 또 한 마리 잡았습니다. 올 겨울 벌써 일곱 마리째입니다. 토끼를 잡아들이는 종하를 종하 할머니는 걱정스레 봅니다. 먼저 간 아들 생각이 나기 때문입니다.종하 아버지도 산짐승 잡는 덴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종하 아버지가 마흔도 못 채우고 일찍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아버질 닮아 토끼 잘 잡는다고 동네 사람들은 종하를 신기한 듯 말하지만 할머니, 종하 할머니는 남모르는 걱정을 혼자 합니다. - (1992년) 2020. 11. 25.
엄마의 집, 종량제 봉투 신동숙의 글밭(285) 엄마의 집, 종량제 봉투 앞으로 2주 동안 엄마의 집은 빈 집입니다.냄비에 남은 찌게를 버릴까 하다가 냉장고로 보냅니다. 수저 한 벌, 밥그릇 하나, 작은 반찬 접시아침 밥그릇이 담긴 설거지통을 비웁니다. 엄마가 여러 날 동안 우겨 담으셨을 종량제 봉투에화장실 쓰레기통 휴지까지 마저 눌러 담습니다. 그러고 보니 몇 해를 지내오면서도엄마의 아파트 종량제 봉투 버리는 데를 모릅니다. 문을 나서며 처음 마주친 아주머니께 여쭈니"앞쪽에 버려도 되고, 뒷쪽에 버려도 되는데,이왕이면 가까운 뒷쪽에 가세요." 하십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뒤로 하며 뒷쪽으로 가니태우는 쓰레기통, 안 태우는 쓰레기통이 나란히 두 개 태우는 쓰레기통 손잡이를 위로 당기니 열리지 않아서 아파트는 쓰레기통도 비밀번호를 .. 2020. 11. 25.
장마 인사 한희철 얘기마을(153) 장마 인사 지난밤엔 천둥과 번개가 야단이었습니다. 야단도 그런 야단이 없었습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천둥과 번개가 하늘을 갈랐습니다. 파르르 번개가 떨면 창가까지 자라 오른 해바라기 이파리는 물론 논가 전기줄까지도 선명했고, 그 뒤를 이어서 하늘이 무너져라 천둥이 천지를 울려댔습니다. 신난 빗줄기도 맘껏 굵어져 천둥과 번개가 갈라놓은 하늘 틈을 따라 쏟아 붓듯 어지러웠습니다. “다들 휴거 됐는데 우리만 남은 거 아니야?”는 아내의 농담이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을 만큼 두렵기까지 한 밤이었습니다. 때마침 정전, 흔들리는 촛불 아래 밀린 편지를 쓰다 쫓기듯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침 일찍 작실로 올랐습니다. 늦은 밤의 기도가 없진 않았지만 무섭게 내린 비, 언덕배기 광철 씨네며 혼자.. 2020. 11. 24.
키워주신 땅에게 신동숙의 글밭(284) 키워주신 땅에게 키워주신 땅에게 얼만큼 고맙냐구요? 마지막 잎새까지 떨구어, 다 주고도 모자랄 만큼 고맙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잎새까지 다 내어주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춥고 시린 마음보다는 저 잎들의 초연함 앞에 이제는 가슴 뭉클한 뜨거움이 올라옵니다. 땅으로 돌아가는 가을잎들이 왜 하필이면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빛깔의 옷들로 갈아입었는지, 그 이유를 곰곰이 헤아리다 보면, 여전히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추운 늦가을 밤에도 가슴이 따스하게 환해져옵니다. 때를 따라서 돌아가는 가을잎의 발걸음을 괜스레 재촉하고 있는 가을비와 가을 바람이 마냥 야속하기보다는, 이제는 길벗이 되었다가 재잘거리며 속을 나누는 도반인지도 모릅니다. 가을 바람이 아무리 차가워도, 황금빛 햇.. 2020. 11. 24.
고추 자루 한희철 얘기마을(152) 고추 자루 망치 자루처럼, 마른 몸매의 지 집사님이 한 자루 고추를 이고 간다. 부론장에 고추를 팔러가는 길이다. 며칠 전엔 여주장까지 가 고추를 팔고 왔다.스물일곱 근, 아귀가 터지도록 고추 자루 묶어 맸지만 한번 팔고 와 몇 집 잔치 부조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곶감고치에서 곶감 빼먹듯 한 자루 한 자루 줄어드는 고추들.버스 운전사 눈치를 보며 지 집사님이 고추 자루를 싣는다. - (1992년) 2020. 11. 23.
가을 달빛을 닮은 눈길로 신동숙의 글밭(283) 가을 달빛을 닮은 눈길로 며칠 동안 간간히 가을비가 내리더니,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어둑한 밤하늘을 환하게 밝혀주던 가로수의 노란 은행잎이 이제는 땅 위에 수북합니다. 그 노란 은행잎 융단을 밟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일으키는 작은 파동이 가을바람의 빗자루질 같습니다. 지난 시월의 어느날 해인사 원당암 달마선원 참선방에서 철야 참선을 마친 후 일찍 나서던 길에, 잠시 보았던 스님들의 분주한 빗자루질 풍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날 느즈막히 길을 나설 때면, 말끔하게 쓸어놓은 공원 산책길과 훤한 절 마당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어쩌다가 떨어진 단풍잎 하나를 발견하고는, 가을 소식인가 싶어 반가운 마음에 줍기도 하고, 곁에 선 나무 아래로 돌려.. 2020. 11. 23.
넉넉한 사랑 한희철 얘기마을(151) 넉넉한 사랑 근 한 달 동안 훈련을 하느라 고생한 군인들을 위해 떡이라도 조금 해서 전하면 좋겠다는 말을 모두가 좋게 받았습니다. 맘씨 좋은 형님 같은 인상의 대대장도 교인이고 하니 부대선교를 위해서도 좋을 듯싶었습니다. 교회 형편이 형편인지라 방앗간에서 서너 말 쌀을 사서 떡을 만들어야지 싶었는데, 잠깐 기다려보라 한 교우들이 어느새 서로들 쌀을 모았습니다. 한 말 두 말 늘어난 쌀이 제법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마을 몇 분도 쌀을 보태 어느새 모은 쌀이 한 가마에 이르렀습니다. 기꺼운 참여, 군에 간 아들 둔 부모도 있고, 군인들 바라보는 마음이 다 내 자식 같아 쌀을 모으는 마음들이 기꺼웠습니다. 서둘러 방아를 돌리고 뜨끈한 절편을 만들어 전했습니다. 한 가마나 되는 떡.. 2020.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