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17)


오래 걸으니


오래 걸으니 비로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걷기 전에는 몰랐고, 알았다 해도 희미한 것들이었다.

 

내 발이 비로소 내 땅에 닿고 있다는,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 발이 내 땅에 닿고 있다는 느낌은, 그동안 내 땅에 발 딛고 살면서도 내 발이 충분히 현실에 닿지 못했다는, 허공을 딛듯 현실과 거리감을 두고 살아왔다는, 본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어설프고 어색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낯설고 새로웠다. 오래 걸으니 어느 순간부터 땅이 내 발을 붙잡는 것 같았다


속도에 대한 느낌도 새로웠다. 걸어보니 이게 맞는 속도구나 싶었다. 풀이 자라는 속도, 꽃이 피어나는 속도, 바람이 지나가는 속도, 곡식이 자라는 속도, 나비와 잠자리가 나는 속도, 물고기가 헤엄치는 속도, 냇물과 강물이 흘러가는 속도, 농부가 논둑을 따라 걸어가는 속도…, 걸어보니 그게 맞는 속도라 여겨졌다.


잠자리 한마리가 길 위에 앉아있다. 어릴적 왕잠자리라 불렀던 잠자리를 오랜만에 보았다.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질주하는 것, 비행기를 타고 나라와 대륙을 건너는 것, 우리가 점점 익숙해져 가는 기계의 속도는 본래의 속도가 아니었다. 그러느라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은 참으로 많았고, 우리가 놓치는 것들은 우리 삶에 더없이 소중한 본질적인 것들이었다. 엉뚱한 것들을 쫓느라, 엉뚱한 것을 쫓는다는 것을 잊기 위해서 우리는 더욱 분주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분주하다는 것을 의미 있는 삶이라 생각하면서.


이른 아침 진부령을 떠나 용대리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폭우가 내린 다음날 이른 시간이라 그랬을까 아침 공기가 더없이 신선했다. 계곡을 따라 마음껏 피어나고 있는 산안개는 계곡 전체를 한 폭의 수묵화로 만들었고, 나는 마치 그림 속을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얼마든지 풍경 속으로 사라져도 좋을, 우주 속 먹물 한 방울 같은 존재였다.


산안개가 퍼져가며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산 중턱에 선 늠름한 소나무였다. 때로는 부는 바람을 따라 산안개가 걷히며 나타나기도 했다. 은은하면서도 위엄이 서린 붉은빛이 감도는 장대한 소나무가 누구도 눈길 주지 않을 것 같은 산 중턱에 의젓하게 서 있었다. 막 퍼져가는 산안개를 바라보다가, 그러다가 슬쩍 걷히는 산안개를 바라보다가 거기 말없이 서 있는 소나무들을 보았다. 굵은 소나무가 누구도 모르는 곳에서 슬며시 제 몸속에 긋고 있는 나이테, 그 속도를 생각했다.


밤꽃이 피고 장미가 피고. 그것이 집을 다 덮어도 동네 사람들이야 그곳이 가게임을 모를리 없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길을 걷고 있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전봇대 전선 위에 앉아 노래를 한다. 왜 그럴까, 작은 새일수록 노래가 더욱 해맑게 들린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새가 부르는 노래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휘파람을 분다. 주거니 받거니, 한동안 노래가 이어졌다. 살아 있는 매 순간을 노래하는 새, 그 또한 맞는 속도겠다 싶었다. 노래와 시를 잃은 삶은 뭔가 비정상적이다.


작은 새를 지나오니 이번에는 까마귀가 반긴다. 전봇대 꼭대기에 앉은 까마귀 한 마리가 나를 보더니 뭐라고 뭐라고 지껄이기 시작한다. 떠들어대는 투가 제법 사람의 말투를 닮았다. 말을 마치자 앞쪽에 있는 전봇대 위에서 다른 까마귀 한 마리가 대꾸를 한다. 방금 지껄인 까마귀와는 사뭇 다른, 낮은 목소리로 말을 받는다. 목소리의 높낮이를 보면 앞쪽의 까마귀가 상관 같은데, 내 짐작에는 이런 말을 나누지 싶다.


-여기 이상한 사람 하나가 지나가고 있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데 수상한 가방 하나를 메고 있다. 이처럼 이른 시간에 아무도 없는 길을 혼자 걸어가는 걸 보면 아무래도 뭔가 수상하다, 오버!


-알았다. 나도 보고 있으니 계속 감시하고 수시로 보고하라, 오버!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소임을 다하며 사는 삶, 그것 또한 지당한 속도일 것이다.


숭의전 입구 어수정에 들렀을 때이다. 어수정(御水井)은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있을 때 개성과 철원(당시 태봉)을 왕래하면서 마시던 물이라 한다. 샘이 얼마나 맑고 시원한지 한 바가지 가득 물을 떠선 꿀꺽꿀꺽 물병에 물을 채우듯 단숨에 다 마셨다. 시원함을 넘어 물이 달기까지 했다.


하지를 맞아 어수정에서 감자를   씻고 있는 동네 할머니. 때를 따르는 삶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마침 어수정에는 한 할머니가 나와 감자를 씻고 있었다. 어수정에서 솟은 샘물로 씻는 감자, 그 모습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햇감자를 캐셨나 봐요?”


할머니께 여쭸더니 할머니가 나직이 웃으며 대답을 하신다.


“예, 오늘이 하지여서 하지감자 쪄 먹으려고 좀 캤어요. 날이 가물어서 그런지 감자알이 생각보다는 작네요.”


할머니는 ‘하지’(夏至)를 ‘하지’로 보내고 있었다. 무심하게 보내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날이 일 년 중에서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하지를 하지답게 보내기 위해 그동안 자란 감자를 캔 것이었다. 시간만 된다면 할머니를 따라가 하지감자를 같이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자연 속에서 살며 자연의 흐름을 순연히 따르는 삶, 저보다 순박하고 그윽하고 아름다운 삶이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절기는 물론 언제 계절이 지나간 줄도 모르고 허둥지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시간의 흐름을 따르며 즐거워하며 사는 삶, 그것이 맞는 속도였던 것이다.


오래 걸으니 비로소 내 발이 내 땅에 닿았다.

오래 걸으니 비로소 제대로 된 속도가 보였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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