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19)


작은 표지판


진부령 정상에서 용대리를 향해 내려가는 길은 걷는 즐거움을 맘껏 누리게 했다. 아직 세상이 눈을 뜨지 않은 이른 아침, 산안개가 피어오르는 한적한 길, 그런 길을 혼자 걷는 즐거움을 어느 누가 흔하게 누릴까. 오가는 차도 드물뿐더러 길도 내리막길어서 나도 자연스레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 같았다.


제법 걸어 내려왔다 싶을 때 저만치 앞쪽으로 기가 막힌 광경이 펼쳐진다. 기암괴석이 질주하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용대리(龍垈里)라는 지명이 바로 저 바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용 용’(龍) 자에 ‘터 대’(垈) 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암괴석은 영락없이 용의 등 비늘을 빼닮았다.


     용의 등 비늘을 닮았지 싶은 바위가 산등성이를 내달리고 있었다.


마침 길가에 문을 연 식당이 있었다. 황태전문식당이었는데 30년 외길을 걸어온 원조집이라 쓰여 있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손님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는데 주인인 두 부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 모습이 두 가지 점에서 반갑고 고마웠다. 아침 일찍 문을 연 식당이 있다는 것, 그리고 혼자 찾은 나를 기꺼이 맞아주었다는 것이다. 혼자 들어가면 받아주지 않는 식당도 있었는데, 그런 일은 걷기 전에는 미처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낯선 경험이었다.


쌀 한 톨을 얻기 위해서는 농부의 손이 여든여덟 번 가야 한다는데, 황태는 식탁에 오르기까지 서른세 번 손이 간다고 한다. 최상품 황태는 ‘하늘과 손을 잡아야 나온다’ 할 만큼 자연의 도움 없이는 얻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바람, 눈, 햇볕, 기온, 네 가지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용대리는 황태 덕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본래 황태의 고향은 함경도 원산이라 한다. 6.25전쟁 때 남쪽으로 내려온 원산의 실향민들이 황태 덕장을 만들 곳을 찾았는데,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그들의 눈에 띈 곳이 인제 용대리였단다. 입지 조건과 기후 조건이 원산과 그 중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국내 최고의 적설량과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추위, ‘풍대리’라 불릴 정도로 거세게 부는 찬바람, 용대리는 명태를 황태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덕장의 입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용대리에서 나는 황태는 최상품으로 인정을 받는데, 전국 황태 생산량의 7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하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혼자서 먹는 밥이 무엇이 맛있겠는가만 그날 아침 황태해장국은 달랐다. 황태해장국이 이렇게 맛있는 거구나 감탄을 했다. 황태해장국을 처음 먹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맛에 반하기는 처음이었다. 뽀얗게 우러난 국물이 얼마나 시원하고 달고 고소하던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비웠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나니 걸음도 가벼워진 듯했다. 진부령과 미시령이 갈라지는 매바위 인공폭포 삼거리가 금방이었다. 차를 타고 그곳을 지나간 적이 여러 차례 있어 익숙한 곳, 하지만 걸어서 그 앞을 지나가니 그곳을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웠다.


 생각지 않은 길을 발견한 즐거움은 컸다. 한적한 길을 걷다가 만난 풍차.


다음 행선지는 백담사와 십이선녀탕이다. 차들이 고속으로 질주하는 도로를 따라 걸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뜩해지려 할 때, 생각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작은 표지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백담사라 적힌 표지판이 큰 도로에서 벗어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인근에 있는 가게를 찾아가 물었더니 맞단다, 그 길로 가도 백담사 방향으로 갈 수가 있다고 했다.


우연히 발견한 작은 표지판을 내내 감사할 정도로 새로 정한 그 길은 한적하고 편했다. 2차선으로 된 도로로, 주로 동네 사람들이 이용하는 길 같았다. 그 작은 표지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무 것도 모르고 내가 걸어가고 있을, 차들이 질주하고 있는 도로를 개울 건너편으로 바라볼 때마다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마음은 새로웠다.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도 제 자리에 서 있는 표지판은 귀하다. 아무리 구석진 자리에 서 있어도 방향을 제대로 가리키는 표지판은 소중하다. 그런 점에서 표지판의 소용은 크기나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 자리에 서서 제대로 된 방향을 가리키는데 있다. 자기 자리에 서 있기만 하다면 누군가에게는 두고두고 고마워 할 길잡이가 된다.


오래 전에 드렸던 ‘어느 날의 기도’ 하나를 다시 떠올린다.


어느 날의 기도


볕이 쬐면 볕을

비가 오면 비를

눈이 날리면 눈을 맞으며

자리를 지킵니다

실핏줄처럼 금이 가고

푸른 이끼 멍처럼 돋아도

몸에 새긴 글씨

지켜내게 하소서

폭풍 속 흔들려도

꺾이지 않게 하시고

외발로 선 시간

막막하지 않게 하소서

머무는 이 없어도 좋습니다

초라하면 어떻습니까

갈림길 끝

길을 찾는 누군가에게

가야 할 곳 제대로 가리키는

바른 표지판이게 하소서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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