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16)


할머니 민박


폭우가 쏟아지는 진부령을 걸어 오르다 만난 두 사람의 웃음이 선하다. 부부지 싶은 두 사람은 우비를 입은 채로 버스 정류장 안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들 옆에 서 있는 두 대의 자전거, 필시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서 길을 나섰다가 생각지 않았던 폭우를 만나 버스 정류장으로 피한 것이리라.


여전히 비를 맞으며 그 앞을 지나가자 두 사람은 빙긋 나를 보고 웃는다.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안다. 나도 두 사람을 향해 빙긋 웃었다. 두 사람도 내 웃음의 의미를 알았으리라. 때로는 말로 하지 않아도 웃음 하나로도 나눌 수 있는 고마운 마음들이 있다.


다녀보니 숨어 있는 아름다운 곳들이 많았다. 모르고 있는 아름다운 마음들은 얼마나 더 많을까..


마침내 진부령 정상에 올랐을 때 나는 영락없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두 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폭우 속을 걸었으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젖어 있었다.


잠을 어디서 자야 할지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로드맵에도 진부령에서는 숙박할 곳이 마땅치 않다고 적혀 있었다. 그래도 그곳에 감리교회가 있다니, 마지막 기댈 곳 하나는 있는 셈이다 싶었다.


진부령미술관 맞은편으로 식당 몇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마침 식당 밖에 나와 있던 한 아주머니가 어서 들어오라며 나를 맞는다. 내게 급한 것은 저녁을 먹는 것보다도 숙박할 곳을 정하는 것이었다.


인근에 잠을 잘 곳이 있는지를 묻자 아주머니는 펜션이 한 곳 있긴 한데 문을 열었는지를 모르겠다면서 전화로 확인을 했다. 잠시 서서 결과를 기다렸는데, 전화를 안 받는 것을 보니 영업을 안 하는 것 같단다. 비수기에는 문을 열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었다.


난감해하고 있는 내게 아주머니는 저만치 아래를 가리키며 할머니가 하는 민박집이 있는데, 그리로 가보라고 알려준다.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 걸음을 옮기려 하자 아주머니는 내게 저녁부터 먹고 가라고 한다. 세상에나, 온몸이 다 젖은 것을 보면서도 저녁부터 먹고 가라니. 아마도 아주머니는 내가 다시 당신네 식당을 찾아올지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먹겠다며 걸음을 옮겼는데, 나중에 저녁을 먹으러 식당 있는 곳으로 올라가자 아주머니는 나를 예약손님처럼 반겼다. 눈에 들어오는 메뉴를 가진 식당이 그 옆에 있는데도 나는 무슨 의무감 혹은 부채감 비슷한 것으로 아주머니네 식당으로 들어갔다. 묘한 기분이었다.


손님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식당에서 혼자 저녁을 먹고 나오는 내게 아주머니는 저녁을 맛있게 먹었는지가 아니라 내일 아침은 몇 시에 먹을 것인지를 물었는데, 아주머니는 그렇게 식당을 적극적으로 운영하는 분이지 싶었다. 어설프게 대답을 하면 내일 아침 아주머니가 민박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내일은 새벽 같이 길을 나설 것이라고 대답을 했다. 실제로도 새벽에 길을 나섰다.


길가에 접해 있는 할머니 민박집은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현관문이 닫혀 있었다. 누가 계시냐고 불렀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몇 번을 더 큰 소리로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이러다가 숙소를 못 구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 마침 전화번호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전화를 드리니 할머니가 받으신다. “오늘 민박 안 하나요?” 여쭸더니, “아니요, 내가 지금 안에 있는데요.” 하신다. 잠시 후 창문이 열리는데 할머니였다. 잠깐이긴 했지만 우리는 얼떨결에 핸드폰을 들고서 영상통화를 한 셈이었다.


진부령 정상의 할머니 만박집. 할머니가 켜준 보일러 덕분에 젖은 빨래들을 모두 말릴 수가 있었다.


밖으로 나온 할머니는 내 모습을 보더니 대뜸 “보일러를 켜드려야겠네.” 하며 집 뒤편으로 가신다. 더운 여름 날씨라 해도 비에 다 젖은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한눈에 알아보신 것이었다. 어디선가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방바닥에는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배낭을 열어보니 배낭 안의 옷들도 다 젖어 있었다. 챙겨간 세 권의 노트도 마찬가지였다. 배낭에 덮개를 씌웠지만 폭우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배낭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죄 꺼내 방바닥에 폈다.


내게는 꼭 필요한 숙소였다. 보일러를 켠 숙소 덕분에 빨래를 말릴 수가 있었다. 물론 신발은 다 마르지가 않아 어쩔 수 없었지만, 다른 빨래들을 말릴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더할 나위없는 다행이었다.


모든 숙소는 선불이었다. 하긴 잠을 자다 말고 어디론가 사라지면 숙박료를 받을 방법이 없을 터이니. 할머니께 숙박료를 물으니 2만원이라 했다. 생각 없이 2만원을 드렸는데, 다음날 길을 걷다 생각하니 2만원이면 보일러 기름 값도 안 되었겠다 싶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느라 할머니를 뵙질 못했다. 언제라도 진부령을 지날 일이 있으면 하루 묵었던 할머니 민박집을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지 싶다. 보일러를 틀어주신 할머니의 배려에 비하면 머리맡에 놓고 온 천 원짜리 두 장은 너무 형식적인 인사였다 싶기 때문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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