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15)


몇 가지 다짐


길을 떠나기 전에 몇 가지 다짐을 한 것이 있다. 걸으면서 지킬 몇 가지 원칙을 미리 정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첫째, 잠은 허름한 곳에서 잔다.

둘째, 밥은 최소한의 것을 먹는다.

셋째, 꽃 한 송이, 풀잎 하나 꺾지 않는다.

넷째,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


확실하게 지킨 것이 두 가지 있다. 그 중 지키기 쉬웠던 것은 네 번째 다짐이었다. 버려져 있는 쓰레기를 줍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다니면서 내가 버리지는 말아야지 했다. 배낭 밖에 있는 주머니에 까만 비닐봉지를 하나 가지고 다니면서 쓰레기가 생길 때마다 그 안에 담았다가 숙소에 들어가면 봉지를 비웠다. 당연한 일인데도 길을 걸으며 쓰레기를 버리지 않으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또 하나 잘 지킨 것이 세 번째 다짐이다. 사실은 그것을 지키기란 쉽지 않았다. 야생 더덕을 만나도 캐지 않겠다고 했던 다짐이었는데 마음이 슬쩍 슬쩍 흔들리던 순간들이 있었다.


강원도 외진 곳에는 먹을 것이 참 많았다. 무엇보다도 잘 익은 오디가 곳곳에 흔했다. 어릴 적만 해도 오디가 익을 철이 되면 동네 어린 우리들의 입은 누구 따로 예외 없이 먹물 묻은 듯 시커멓게 변하곤 했다. 오디가 까맣게 익을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차례가 돌아오질 않으니 아직 덜 익어 신맛을 내는 붉고 푸른 오디를 따먹곤 했다.


그런 시절을 두고 이제는 오디를 딸 사람이 없어 그냥 나무에 매달려 있거나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시골마다 아이들은 없고 노인들은 손이 미치지 못하고, 커다랗게 잘 익은 오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지만 바라보기만 할 뿐 그냥 지나갔다.


곳곳에 산딸기도 많았다. 빨갛게 잘 익은 산딸기가 보이면 침이 고였다. 특히 목이 마를 때 딸기가 눈에 띄면 걸음을 멈추고 싶었다. 폐가지 싶은 돌담에 잘 익은 앵두가 올망졸망 달려 있는 모습을 볼 때에도, 개량 보리수이지 싶은 붉은 열매가 눈에 띌 때에도 얼마든지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참았다. 몇 번인가 네 잎 클로버가 눈에 띄었지만 그 또한 뜯지 않았다. 그냥 두면 나중에 누군가가 행운처럼 만나지 않을까.


세 번째 원칙을 지킨 것이 준 도움이 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일정을 모두 소화할 수가 있었다. 로드맵에는 하루 평균 걸어야 할 거리가 30km 정도라 적혀 있었지만 그것은 차량 내비게이션 거리, 실제 걸어보니 35km 정도가 되었다. 오디를 따거나 산딸기에 마음을 빼앗기면 그날그날의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또 하나 도움 받은 것도 소화와 관련이 있다. 일정 내내 배낭에 넣은 휴지를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평소에 먹고 마시던 음식과 물이 다르기에 소화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라도 써야지 싶어 비상용 휴지를 챙겼는데,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매일 저녁마다 빨래를 했다. 탈수기를 쓸 수 있는 숙소는 그래도 좋은 숙소였다.


허름한 집에서 자겠다는 첫 번째 다짐은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숙소는 허름한 모텔이었다. 묵는 곳이 외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하룻밤 잠만 자고 다음날 일찍 떠나는 일정이었기에 굳이 좋은 곳을 택할 이유도 없었다. 샤워를 할 때 따뜻한 물이 나오고, 빨래를 한 뒤 탈수기를 쓸 수 있는 곳이면 매우 훌륭하고 만족스러운 숙소였다.


하루는 할머니가 하시는 민박집에서 잠을 자기도 했고, 하루는 마을회관에서 자기도 했다. 큰 회관에서 혼자 잠을 자는 것이 이상했지만,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눕기만 하면 이내 곯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하룻밤을 묵었던 옥계리 마을회관.다음날 아침 부녀회장님 댁에서 먹은 아침식사가 기억에 남는다. 가족 5명과 한 식탁에 앉았으니까.


이틀 밤은 생각지도 않게 편한 숙소에서 잤다. 화천에 이르렀을 때였다. 마침 큰 훈련을 마친 때라 휴가 나온 군인들이 많았고, 덕분에 숙소를 정하기가 어려웠다. 망설이다가 후배 목사에게 전화를 하여 숙소를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후배는 아예 교우가 하는 펜션을 잡아주었다. 일정 중 마지막 밤은 일부러 먼 길을 달려온 이 장로님의 배려로 편안하고 조용한 펜션에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밥을 최소한의 것으로 먹어야지 했던 두 번째 다짐도 첫 번째와 비슷했다. 혼자 다녀보니 불편한 것 중의 하나가 식사였다. 밥은 모두 식당에서 사 먹었는데(두 끼는 식당을 만나지 못해 비상용 간식으로 대신했지만), 혼자 들어가면 난감해 하는 식당들이 있었다. 안 받는다고 하여 도로 나온 식당도 있다. 받아준다고 해도 혼자서 시킬 수 있는 메뉴가 많지도 않았다. 백반과 김치찌개, 콩국수가 그 중 무난한 메뉴였다.


혼자 들어가면 난감해하는 식당들이 있었다. 메뉴 선택도 제한이 되었다.


열하루 동안 땡볕 아래를 걷는 일정, 든든하게 먹지 않으면 쓰러진다며 맛있는 음식을 사주신 분들이 있었다. 정 장로님 내외분, 이 장로님 내외분, 화천의 박 장로님 내외분,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단지 음식을 먹는 시간이 아니라 따뜻한 위로와 고마운 격려를 듬뿍 전해 받는 시간이었다.


다 지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몇 가지 원칙을 정하고 길을 떠난 것은 잘한 일이지 싶다.

인생의 길과 믿음의 길도 그러면 어떨까 싶다.

사소해 보여도 몇 가지 원칙을 정하고 그것을 지키며 걸어간다면!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1. 걷는 기도를 시작하며http://fzari.tistory.com/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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