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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시노래 한 잔306

나도 하늘처럼 밤하늘 불을 끄실 때 내 방에 불을 켠다 새벽하늘 불을 켜실 때 내 방에 불을 끈다 어둔 밤이면 전깃불에 눈이 멀고 환한 낮이면 보이는 세상에 눈이 멀고 언제쯤이면 나도 하늘처럼 밤이면 탐욕의 불을 끄고서 어둠 한 점 지운 별처럼 두 눈이 반짝일까 새벽이면 마음에 등불을 켜고서 하늘 한 점 뚫은 해처럼 두 눈이 밝아질까 2021. 3. 25.
물 인심 물 한 잔 드릴까요? 하고 얼른 물으면 바빠요! 하며 냉큼 달아나신다 택배 기사님도 배달 기사님도 집배원 아저씨도 물 한 모금 삼킬 틈없는 나무 꼬챙이 같이 삐쩍 마른 뒷모습에 넉넉한 물 인심이 가슴 우물에 먹먹히 고인다 2021. 3. 1.
무의 새 무한한 날갯짓으로 몸무게를 지우며 무심한 마음으로 하늘을 안으며 새가 난다 하늘품에 든다 2021. 2. 25.
참빗, 참빛 가지런히 꽂힌 책들이 모여 빗살 촘촘한 참빗이 되어 머리카락처럼 헝클어진 생각의 결을 가지런히 빗겨준다 한 권의 책 한 개의 사상 한 개의 종교만 내세우는 건 한 개비의 꼬챙이로 머리 전체를 빗겠다며 날을 세우는 일 나와 너를 동시에 찌르는 일 나와 너를 살리는 이 땅에 모든 생명을 살리는 공기처럼 공평한 참빗의 빗살은 누구도 해치지 않는 촘촘한 햇살 촘촘한 빗줄기 촘촘한 바람의 숨결 하늘의 그물은 회회(恢恢) 성글어도 어린 양 한 마리도 빠뜨리지 않는 법 오늘을 빗는 빈 마음의 결마다 참빛으로 채우신다 2021. 2. 12.
이쑤시개 세 개 네 살 때부터 다섯 살까지 엄마 손에 붙들려 어린이집 대신 다도원에 다닌 딸아이 엄마는 개량 한복 입고 고무신 신고 앵통 들고 차 수업 받으러 가는 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 밀집 모자 쓰고 호미랑 삽이랑 딸아이랑 차밭에서 살며 놀며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신기한 잡초도 신나게 뽑고 어린 찻잎도 신명나게 따느라 찻잎 삼매경에 빠져 살던 엄마 첫날 다실에 보물처럼 가득 쌓인 예쁜 다구들과 노리개들을 보면서 호기심 대장 개구쟁이 딸아이에게 딱 한 마디 했지요 "여기 있는 건 하나도 만지면 안된다" 2년 동안 단 한 번도 손대지 않은 기적이 딸아이한테서 일어난 건 신기하고도 고마운 일 그러던 어느날 평소에 다식꽂이로 한 번 쓰고 버리던 이쑤시개 노랑 분홍 파랑 리본이 달린 예쁜 이쑤시개 어느날 우리집에서 .. 2021. 2. 6.
말동무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나 이 아름다운 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돈과 건물과 권력과 명예와 인기와 성공을 위한 일이 우선이라면 얼마나 힘 빠지고 재미없는 걸음 걸음인가 돈이 있든지 없든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인기가 별로 없어도 성공이라 부를만한 것 딱히 없어도 말이 통하는 동무 하나만 별처럼 있다면 말이 통하는 말동무 하나를 만나고 싶어서 아무 책이나 읽으면 아무 동무나 만나게 될까 봐 겁나 밥은 굶어도 책은 아무 책이나 읽지 말자 어려서부터 굳은 마음 먹었지 말문이 막히고 숨통이 막히는 오늘 같은 날에도 말동무 삼아서 글을 읽는다 먹먹함 한 줌 고이면 가슴 웅덩이 물길 터주려 차 한 모금 홀짝 홀짝 삼킨다 2021. 2. 5.
눈물샘 가끔 누군가를 만나 소화되지 않는 말이 있지 목에서 걸리고 가슴에 맺히는 말 한 마디 저녁답 쪼그리고 앉아 군불로 태워버릴 부뚜막 아궁이도 내겐 없는데 한겨울밤 문틈으로 바람 따라 보내버릴 엉성한 문풍지도 내겐 없는데 사방이 꽉 막힌 방에서 말이 통하지 않으니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숨통이라도 트려고 빠져나갈 구멍을 찾다가 몸을 지으실 때 가장 연약한 틈 눈물샘으로 흐른다 가슴이 나를 대신해서 나를 위해서 말없이 울어준다 2021. 2. 3.
설해목(雪害木) - 겨울나무 (73) 신동숙의 글밭(318) 설해목(雪害木) - 겨울나무 (73) 솔가지 주워서불을 살리고 밥 지어 드시던오두막의 수도승 깊은 산 속 한밤 중에 홀로 깨어 소리없이 내리는 눈송이처럼 연약하고 아름다운 생명들 품고 품고 품다가꺾이신 설해목(雪害木) 나는 법정스님한테서십자가 예수를 본다 2021. 1. 30.
새소리 신동숙의 글밭(316) 새소리 아침에 새소리를 들었다몇 년만에 듣는 반가운 기척 창문을 시스템 창호로 바꾼 후새소리 알람시계는 끄고 살았는데 좀 전에 비가 오는가 싶어서부엌 쪽창을 조금 열어두었더니 겨우 그 한 뼘 틈새로집 안으로 들어온 새소리가 갈빗대 빗장 틈새로밤새 닫힌 가슴 쪽문을 연다 새벽 하늘을 깨우며새날을 알리는 첫소리 새아침을 울리는새소리는 늘 새 소리 새는 날마다 새로운 길새 하늘을 난다 2021. 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