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시노래 한 잔311 지화자 좋은 날 신동숙의 글밭(311) 지화자 좋은 날 160년 전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 월든 숲의 오두막에서 동양의 주역을 읽던 날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산골 오두막 머리맡에 둔 몇 권의 책 중에서성 프란체스코를 읽던 날의 법정 스님 지리산 자락의 유가댁 자제인 열 다섯살 성철 스님이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쌀 한 가마를 바꾸던 날 6·25 동족상잔 그 비극의 흙더미 아래에서밤이면 책을 읽던 진실의 스승 리영희 선생님 감옥의 쪽창살로 드는 달빛을 등불 삼아책을 읽고 종이조각에 편지를 쓰던 날의 신영복 선생님 주일 예배 설교단에서 반야심경의 공사상을 인용하는 날의 목사님 초하루 법문이 있는 대웅전에서요한복음 3장 8절을 인용하는 큰스님 천주교 식당 벽에 붙은 공양게송 한 줄 읊으며 창문밖 성모마리아상 한 번 보고밥 한 숟.. 2021. 1. 15. 반쯤 비우면 신동숙의 글밭(310) 반쯤 비우면 마음이 무거운 날마음 그릇을 들여다 보면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쌓인땅의 일들이 수북하다 땅으로 꽉 찬 마음 그릇을허공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여 반쯤 비우면저절로 빈 공간에 하늘이 찬다 가끔은 마음이 날듯 가벼운 날마음 그릇을 들여다 보면 하늘이 가득 펼쳐진다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과 배달의 하늘이 이도저도 아닌 날가만히 하늘을 보고 있으면 오도가도 못하는 날그저 생각만 해도 반쯤 땅인 몸속으로반쯤 하늘이 찬다 2021. 1. 11. 오토바이 보조바퀴 신동숙의 글밭(309) 오토바이 보조바퀴 큰일이다꽁꽁 싸매고길거리에 나서면 꽃보다 먼저 사람보다 먼저오토바이 발통이 보인다 앞뒤 두 발통으로 달리는 오토바이가잘 돌아가던 하루에 브레이크를 건다 썰매가 거추장스럽다면자전거 보조바퀴라도 달아주고 싶은데폼이 안 산다며 멀리 달아나려나 뉘집 할아버지인지뉘집 아버지인지뉘집 아들인지 앞 발통엔 몸을 싣고뒷 발통엔 짐을 싣고하늘만 믿고 달린다 싸운 사람처럼앞에 가고 뒤에 가고멀찌감치 떨어져 위태롭게 달린다 하지만 하늘은 옆으로 나란히 지으신다 스승이자 벗이 되어나란히 걸으라시며 두 다리를 주시고 혼자 걷다 넘어져도땅을 딛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생명을 살리는 어진 손길로보조바퀴처럼 옆으로 나란히 겨울바람에 말갛게 씻긴 내 두 눈엔오토바이 발통만 보인다작은 일이 아니다 2021. 1. 10. 엎드린 산 신동숙의 글밭(308) 엎드린 산 산이 늠름하게 서 있는 줄만 알았는데엎드려서 온 땅을 끌어안고 있었구나 먼 산등성이등줄기를 따라서 내려앉은 흰눈이 하얗다 맨 먼저 아침해를 맞이하면서도맨 나중에 봄이 되는 산꼭대기 별빛이 닿는하늘 아래 맨 처음 땅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흰눈이 내려앉는 듯 우러르며 내려놓는 숨결마다 엎드려오체투지하는 산처럼 그 품에 들고 싶다 2021. 1. 9. 둥근 본능, 흙구슬 빚기 신동숙의 글밭(307) 둥근 본능, 흙구슬 빚기 밥숟가락 놓고 달려가던 모래 놀이터좁다란 골목길을 돌면 활짝 나오던 둥근 놀이터 나에게 모래가 황금빛 아침햇살이라면모래에게 나의 얼굴도 아침햇살 손끝이 아무리 시려워도나중엔 손이 시려운 줄도 모르고 거북이 등딱지처럼 튼 피가 맺히던 손등그런 두 손등을 마주 부비며 문지르던 모래만 보면 가슴에서 살아나는 둥근 본능흙구슬 빚기 놀이터 구석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서 온 정성을 기울여 비나이다 비나이다굴리고 굴리고 굴리던 흙구슬 부스러지지 않도록누군가 모르고 밟고 지나는 일 없도록 어느모로 보나 둥글도록두 손바닥 사이에서 태어나던 흙구슬 하지만 이내 으스러지기 일쑤언제나 아쉬움만 남기던 꿈의 둥근 세상 그러던 어느날누군가 빚어놓은 투명하게 둥근 이슬이 처음으로 눈에.. 2021. 1. 8. 숨은 하느님 신동숙의 글밭(304) 숨은 하느님 날숨으로 날 비우는 빈탕마다 들숨으로 들어오시는 숨은 하느님 태화강변을 산책하며뭉텅뭉텅 날 덜어내는 정화(淨化)의 순간마다 가지산을 오르며 활활활 날 태우는 회심(灰心)의 순간마다 그 어디든숨쉬는 순간마다숨은 하느님을 찾다가 호젓한 오솔길에아무도 보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나는겨울나무 곁에 나란히 서서엎드려 하늘을 우러르는 가슴으로 가지끝 마른잎을 떨구듯입을 가리운 마스크를 벗으면깊숙이 들어오는 숨은 2021. 1. 5. 아름다운 마음이라 부른다 신동숙의 글밭(303) 아름다운 마음이라 부른다 꽃을 꽃이라 부르지 않고아름다운 마음이라 부른다 별을 별이라 부르지 않고아름다운 마음이라 부른다 사람을 사람이라 부르지 않고아름다운 마음이라 부른다 이 아름다운 마음을우리는 세상이라 부른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우리는 마음이라 부른다 2021. 1. 3. 밤이 되면, 나의 두 눈을 눈물로 씻기시며 신동숙의 글밭(302) 밤이 되면, 나의 두 눈을 눈물로 씻기시며 아침이 되면태양의 빛살로 내 심장을 겨누시며 밤새 어두웠을내 두 눈의 초점을 조율하신다 한 점 한 점 바라보는 곳마다 내 심장의 빛살로 이 땅의 심장을 비추신다 빙판길에 오토바이를 버티는 발살얼음이 낀 폐지를 줍는 손 몸이 아픈 이웃들의 소리마음이 아픈 이웃들의 침묵 하루해를 따라서그 빛을 따라서 그저 모르고 살아간다 밤이 되면나의 두 눈을 눈물로 씻기시며 빛을 거두어 가시니내 몸은 밤이 된다 ... 유주일연오심지등혜 惟主一燃吾心之燈兮이계오목지몽 而啓吾目之矇 야훼께서 내 마음의 등을 밝혀주시니내 어둔 눈을 밝히 보게 하시네 ( 18:28) 2021. 1. 2. 하루가 익으면 밥이 되지 신동숙의 글밭(300) 하루가 익으면 밥이 되지 저녁 노을에 두 눈을 감으며쌀알 같은 하루를 씻는다 하루가 익으면밥이 되지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가슴으로 바람이 지나간다 쌓인 게 많을 수록나누어 먹을 밥이 한 가마솥 너무 오래 끓이다 태워서가슴에 구멍이 나면 하늘을 보고 가슴에서 일어나는 건눌러붙은 밑바닥까지버릴 게 하나도 없어 시래기처럼 해그늘에 널어서웃음기 같은 실바람에 말리는 저녁답 피어오르는 하얀 밥김은오늘 이 하루가 바치는 기도 하루가 익으면 밥이 되지 2020. 12. 30. 이전 1 ··· 17 18 19 20 21 22 23 ··· 3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