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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시노래 한 잔311

이쑤시개 세 개 네 살 때부터 다섯 살까지 엄마 손에 붙들려 어린이집 대신 다도원에 다닌 딸아이 엄마는 개량 한복 입고 고무신 신고 앵통 들고 차 수업 받으러 가는 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 밀집 모자 쓰고 호미랑 삽이랑 딸아이랑 차밭에서 살며 놀며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신기한 잡초도 신나게 뽑고 어린 찻잎도 신명나게 따느라 찻잎 삼매경에 빠져 살던 엄마 첫날 다실에 보물처럼 가득 쌓인 예쁜 다구들과 노리개들을 보면서 호기심 대장 개구쟁이 딸아이에게 딱 한 마디 했지요 "여기 있는 건 하나도 만지면 안된다" 2년 동안 단 한 번도 손대지 않은 기적이 딸아이한테서 일어난 건 신기하고도 고마운 일 그러던 어느날 평소에 다식꽂이로 한 번 쓰고 버리던 이쑤시개 노랑 분홍 파랑 리본이 달린 예쁜 이쑤시개 어느날 우리집에서 .. 2021. 2. 6.
말동무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나 이 아름다운 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돈과 건물과 권력과 명예와 인기와 성공을 위한 일이 우선이라면 얼마나 힘 빠지고 재미없는 걸음 걸음인가 돈이 있든지 없든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인기가 별로 없어도 성공이라 부를만한 것 딱히 없어도 말이 통하는 동무 하나만 별처럼 있다면 말이 통하는 말동무 하나를 만나고 싶어서 아무 책이나 읽으면 아무 동무나 만나게 될까 봐 겁나 밥은 굶어도 책은 아무 책이나 읽지 말자 어려서부터 굳은 마음 먹었지 말문이 막히고 숨통이 막히는 오늘 같은 날에도 말동무 삼아서 글을 읽는다 먹먹함 한 줌 고이면 가슴 웅덩이 물길 터주려 차 한 모금 홀짝 홀짝 삼킨다 2021. 2. 5.
눈물샘 가끔 누군가를 만나 소화되지 않는 말이 있지 목에서 걸리고 가슴에 맺히는 말 한 마디 저녁답 쪼그리고 앉아 군불로 태워버릴 부뚜막 아궁이도 내겐 없는데 한겨울밤 문틈으로 바람 따라 보내버릴 엉성한 문풍지도 내겐 없는데 사방이 꽉 막힌 방에서 말이 통하지 않으니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숨통이라도 트려고 빠져나갈 구멍을 찾다가 몸을 지으실 때 가장 연약한 틈 눈물샘으로 흐른다 가슴이 나를 대신해서 나를 위해서 말없이 울어준다 2021. 2. 3.
설해목(雪害木) - 겨울나무 (73) 신동숙의 글밭(318) 설해목(雪害木) - 겨울나무 (73) 솔가지 주워서불을 살리고 밥 지어 드시던오두막의 수도승 깊은 산 속 한밤 중에 홀로 깨어 소리없이 내리는 눈송이처럼 연약하고 아름다운 생명들 품고 품고 품다가꺾이신 설해목(雪害木) 나는 법정스님한테서십자가 예수를 본다 2021. 1. 30.
새소리 신동숙의 글밭(316) 새소리 아침에 새소리를 들었다몇 년만에 듣는 반가운 기척 창문을 시스템 창호로 바꾼 후새소리 알람시계는 끄고 살았는데 좀 전에 비가 오는가 싶어서부엌 쪽창을 조금 열어두었더니 겨우 그 한 뼘 틈새로집 안으로 들어온 새소리가 갈빗대 빗장 틈새로밤새 닫힌 가슴 쪽문을 연다 새벽 하늘을 깨우며새날을 알리는 첫소리 새아침을 울리는새소리는 늘 새 소리 새는 날마다 새로운 길새 하늘을 난다 2021. 1. 27.
봄자리 - 정월달 지신밟기 신동숙의 글밭(315) 봄자리 - 정월달 지신밟기 언 땅으로걸어갈 적에는 춥다고 움추린 손날개처럼 펼치고 꼭 잡은 손서로가 풀어놓고 빈 손은 빈 가지처럼 빈탕한데서 놀고 두 발은정직한 땅으로 뿌리를 내리는 일 언 땅으로 내딛는 걸음마다 하나 하나 씨알처럼 발을 심는 일 학이 춤을 추듯이돌잡이 첫걸음 떼듯이 두 손 모아 기도하듯이햇살이 언 땅을 품듯이 발걸음마다 감사를 심으며 발걸음마다 사랑을 심는 일 정월달 지신밟기 지나간언 땅 자리마다 새싹이 기지개를 켜며새로운 눈을 뜨는 봄자리 2021. 1. 25.
골방 신동숙의 글밭(314) 골방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나의 방으로 간다 마음껏 아파할 수 있는 나의 방으로 숨는다 일상 뒤에 숨겨온 슬픔과 아픔을 우는 아기 달래듯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관상의 기도 그 사랑방으로 돌아간다 한밤중에 방바닥으로 몸을 기대면한몸 기댈 방 한 칸 없는 이웃들이 먼저 떠올라 밤하늘 별이 되어 글썽이고 마음 한 자락 기댈 내면의 골방도 없이일상에 떠밀려 살아가는 이웃들이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가 하루 동안 쌓아올린 마음을 허무는 밤나의 골방은 그대로 하늘로 열린다 이제는 나의 것인지너의 것인지도 모를 슬픔과 아픔이지만 그렇게 별처럼 미안한 마음까지 더해지면슬픔과 아픔과 미안한 마음이 한데 뒤섞여 흐른다 숨으로 돌아오는 순간마다 고마운 마음이 샘솟아 가슴에는 한 줌 숨이 머문다 2021. 1. 22.
냉이 - 겨울나무 신동숙의 글밭(313) 냉이 - 겨울나무 겨울을 푸르게 견뎌낸 냉이가뿌리에 단맛을 머금었습니다 흙의 은혜를 저버리는 듯잔뿌리에 흙을 털어내는 손이 늙은 잎을 거두지 못하고시든 잎을 개려내는 손이 못내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땅에 납작 엎드려 절하는 냉이 같습니다 2021. 1. 18.
떡국 한 사발 신동숙의 글밭(312) 떡국 한 사발 소고기 조각 구름 걷어내고계란 지단 구름 걷어내고 흙으로 빚은 조선 막사발로 투명한 하늘과 바다를 조금만 떠서 두 손 모아 하나 되는 찰라해를 닮은 흰떡 한 움큼 넣고 팔팔 끓이면 떡국의 가난과 맑음은 얼벗 되어 다정히 손을 잡고서 놓치 않아 정월달 아침이면 해처럼 떠올라둥근 입속으로 저문다 새해는 깊고 어둔 가슴에서 떠올라웃음처럼 나이도 한 살 피어오른다 2021. 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