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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502

고맙습니다 작고 후미진 마을 작은 예배당을 섬기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다들 떠난 곳에 외롭게 남아 씨 뿌리는 사람들 가난하고 지치고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과 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이 땅의 아픔 감싸기엔 내 사랑과 믿음 턱없이 모자랍니다. 힘들다가 외롭기도 합니다. 그래도 나를 이곳에서 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그중 당신과 가까운 곳, 여기 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 (1992년) 2021. 2. 21.
퍼런 날 이웃집 변관수 할아버지는 두고 두고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허리는 다 꼬부라진 노인이 당신의 농사일을 꾸려나가는 걸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어느 샌지 난 숨이 막혀옵니다. 노인 혼자 힘으로는 엄두가 안 나 보이는 일을 할아버지는 묵묵히 합니다. 논일, 밭일, 할아버지의 작고 야윈 몸으로는 감히 상대가 안 될 일감입니다. 씨 뿌리고, 김매고, 돌 치워내고, 비료 주고, 논둑 밭둑 풀을 깎고,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하면 모레 하고, 세월이 내게 숨을 허락하는 한 내 일 내가 해야지, 지칠 것도 질릴 것도 없이 할아버진 언제나 자기걸음입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뙤약볕 쏟아지면 그 볕 다 맞고, 어느 것도 논과 밭에서 할아버지를 떼 놓을 것이 없습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켜켜 가슴에 쌓였을 답답함과.. 2021. 2. 20.
쓰러지는 법 '요즘 나는 눕기보단 쓰러지는 법을 배웠다'고 한 이는 시인 황동규였을 게다. 그는 어떤 경험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짧은 말 한마디로 표현되는 어려운 경험. - (1992년) 2021. 2. 19.
단호한 물러섬 제 새끼들을 돌볼 때 정말 헌신적으로 인상 깊게 돌보던 어미닭의 태도가 어느 날부터인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조금만 낌새가 이상해도 다급한 목소리로 병아리들을 제 날개 아래 모으고, 먹을 게 있으면 새끼부터 먹게 하던 어미닭이었는데, 웬일인지 병아리들이 가까이 올라치면 매정하게 쪼아 물리치곤 한다. 어쩌면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이야길 들은 집사님이 “뗄 때가 돼서 그래요.” 한다. 병아리가 깨어나 얼마큼 크게 되면 어미닭이 새끼들을 떼려 그리한다는 것이다. 어미닭의 단호한 물러섬.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분명한 한 표정이었다. - (1992년) 2021. 2. 18.
어떤 선생님 -1989년 9월 7일. 목요일. 실내화를 안 가지고 학교에 갔다. 빈 실내화 주머니를 가지고 간 것이다. 맨발로 교실에 있었다. 규덕이 보고 실내화를 가지고 오라고 전화를 했는데도 규덕이는 실내화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다. 학교에서 계속 맨발로 지냈다. 집에 와서 물어보니 학교에 가지고 왔는데 잊어버리고 나한테 안 준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꼭 챙겨야지. -그렇게도 정신이 없었니? 6.25땐 아기를 업고 간다는 게 베개를 업고 피난을 간 사람도 있었다더라. 초등학교 5학년인 조카 규애가 연필로 쓴 일기 밑에는 빨간색 글씨의 짧은 글들이 있었다. 물으니 담임선생님께서 써 주시는 것이란다. 반 아이들 일기도 마찬가지란다. 흔희 ‘검’자 도장을 찍어 주는 게 예사인줄 알았는데 그 선생님은 달랐다. 규애의 허.. 2021. 2. 17.
때 지난 빛 ‘별빛을 우러러 보았을 때 그 별은 이미 죽어있을 지도 모른답니다!’ 한겨레신문 한 귀퉁이, 늘 그만한 크기로 같은 책을 고집스레 소개하는 , 짧게 짧게 실리는 글들이 늘 시선을 끌었는데 며칠 전에 만난 글은 위와 같았다. 기쁨이나 슬픔, 그 어떤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여도 우리가 다른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때론 그것이 때 지난 것일 수도 있다는, 어쩜 늘 그런 것이 아니냐는 아픈 지적. - (1992년) 2021. 2. 16.
꽃봉오리 “얘들아, 이리와 봐! 기쁜 일이 생겼다!” 마당에서 놀던 소리가 커다란 소리로 놀이방 친구들을 부릅니다. 무슨 일일까, 마루에서 귀를 기울였더니 “이것 봐, 꽃이 피려고 봉오리가 하나 생겼어.” - (1993년) 2021. 2. 15.
사진집 마음이 메마를 때면 꺼내드는 책이 있습니다. 왠지 허전하고 허전한 마음에 물기 마를 때 그냥 편하게 꺼내드는 책이 있습니다. -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가난한 이들을 주로 카메라에 담았던 최민식 - 최민식 사진집 입니다. 슬픔의 표정이, 냉엄한 생의 표정이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단색의 표정들이 마른 가슴에 실비를 뿌려주곤 합니다. 슬픔의 한 표정을 본 다는 건 얼마나 위로가 되는 일인지요. 이따금씩 사진집을 꺼내듭니다. - (1992년) 2021. 2. 14.
새가족 창규 한 달 동안의 겨울방학을 마치며 햇살 놀이방엔 식구가 한 사람 늘었습니다. 조귀농에 사는 창규가 새로 온 것입니다. 또래가 없어 늘 혼자 지내는 어린 아들의 모습을 딱하게 여기던 창규 아빠가 햇살놀이방 이야기를 들었다며 교회를 찾았습니다. 흔쾌히 수락을 했고, 그날부터 창규는 아빠의 트럭을 타고 아침마다 놀이방에 오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들어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면 어떡하나, 창규 성격이 사납다던데 아이들과 싸우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이 되었지만 모두가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걱정했던 창규의 사나움은 낯선 친구들과도 서슴없이 어울리는 활달함으로 표현됐고, 놀이방 아이들도 새로 온 친구를 이내 친한 친구로 맞아 주었습니다. 그런 면에선 아이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 적지가 않습니다. 밖에서 혼자 노는데 익숙했.. 2021. 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