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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502

요란한 것과 조용한 것 “이따가 밥 잡수러 오세유!” 아침 일찍 교회 마당을 쓸다가 일 나가던 이필로 속장님을 만났더니 오늘 당근 가는 일을 한다며 점심을 함께 먹자고 청합니다. 봄이 온 단강에서 제일 먼저 시작되는 농사일은 당근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단강의 특산물이기도 한 당근 씨를 강가 기름지고 너른 밭에 뿌림으로 한해 농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일을 마치고 강가 밭으로 나갔습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남한강이 가깝게 내다보이는 강가 밭, 많은 마을 사람들이 나와 씨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일일이 발로 밟아 씨 뿌릴 골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 불과 이삼년 전 일인데, 이제는 트랙터가 골을 만들며 밭을 갈아 일이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앞사람이 씨를 뿌리고 나가면 뒷사람이 손으로 흙을 덮어나가야 했는데, .. 2021. 2. 12.
정균 형, 그 우직함이라니 영진을 다녀오게 되었다. 강원도 영진에서 목회하고 있는 정균 형이 한번 예배를 같이 드리자고 불렀다. 임원헌신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꼭 찾고 싶었던 곳, 보고 싶었던 형을 그렇게 찾게 되었다.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해송들 사이로 가까이 들려오는 곳, 영진교회는 바다와 잘 어울려 아담하게 세워져 있었다. 저녁예배를 드리고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도, 다음날 아침 이웃마을 사천에서 목회하고 있는 진하 형을 만나 같이 이야기 나눌 때도 난 내내 정균 형의 우직함과 묵묵함에 압도를 당하고 말았다. 언젠가 기석 형은 정균 형을 두고 ‘소 같은 사람’이라 했는데, 그 말은 정균 형을 두고선 가장 어울리는 말이었다. 아직도 내 마음에 흔들림과 주저함으로 남아있는 막연함을 형은 흔쾌히 털어낸 채였고, 홀가분하면서도 .. 2021. 2. 11.
어떤 새 한 마리 새가 있었습니다. 그는 밤이 되면 하늘로 날아오르곤 했습니다. 다른 새들이 잠이 들면 슬며시 혼자 깨어 일어나 별들 일렁이는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그 일은 쉬는 법이 없었습니다. 날이 밝기 전 그는 어김없이 둥지로 돌아왔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다른 새들과 함께 일어나 함께 지냈습니다. 아무도 그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다른 새 한 마리가 그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한밤중 깨었다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내 눈에서 사라지는 까마득한 높이였습니다. 다음날 새벽, 그가 둥지로 돌아온 새에게 물었습니다. 돌아온 새의 깃털엔 아직 하얀 서리가 그냥 남아있었습니다. -어딜 갔다 오는 거니? -하늘 -모두들 하늘을 날잖니?.. 2021. 2. 10.
다람쥐의 겨울나기 아랫마을 안 속장님 네를 들어서다 보니 문 한쪽 편으로 빈 철망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전에 다람쥐를 키우던 철망인데 다람쥐는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고, 철망 안엔 난로연통에 쓰이는 ‘ㄱ’자 모양의 주름진 연통과 보온 덮개로 쓰는 재생천 쪼가리들만 널려 있었습니다. 먹을 걸 넣어주던 조그만 통 안에는 잘 까진 호박씨들이 한 움큼 잘 담겨 있었습니다. 안 속장님께 다람쥐에 대해 물었더니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모이를 주려고 문을 여는 순간 밖으로 뛰쳐나와 도망을 쳤고 한 마리만 남았는데, 남은 한 마리가 날이 추워지자 연통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춥지 말라고 바닥에 깔아준 재생천을 조금씩 쏠아서 연통 속에 꾸역꾸역 쑤셔 넣더니 그 안에 틀어박혀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남은 한 마리마저 보이질 않아.. 2021. 2. 8.
끝내 돌아서지 못하는 것은 수없이 돌아섭니다. 부름 받은 땅 이 땅에 발 붙여 살면서도 마음은 수없이 돌아섭니다. 떠날 갈 이 모두 떠난 텅 빈 땅 껍질 같은 땅에 주름진 삶이 상흔처럼 남았습니다. 숯 같은 가슴에서 떨어지는 눈물 받을 길 없고 퍼렇게 멍든 얘기 피할 길 없을 때 수없이 돌아섭니다. 말뚝처럼 불쌍한 몸뚱일 남기고서 마음은 수없이 돌아섭니다. 하면서도 끝내 돌아서지 못하는 것은 당신 때문입니다. 갈 테면 가라는 질책도 원망도 아닌 그저 나직한 음성 당신 때문입니다. 텅 빈 땅에 홀로 남는 당신의 긴 그림자 때문입니다. 아니 당신의 맑은 얼굴 때문입니다. 이 땅 끝내 돌아서지 못하는 것은. - (1993년 2021. 2. 8.
각서 어느 날 통신공사 측에서 보낸 공문이 왔다. 공중전화 관리자에게 보낸 공문이었다. 시간을 내어 회사로 나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공중전화 사용료가 한 달에 5만원은 넘어야 되는데 그렇질 못하니 관리자를 만나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단강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전화에 대한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전화가 없는 집이 많았다. 전화를 쓰려면 천상 남의 전화를 빌려 써야 하는데 시간에 상관없이 과하게 무는 요금도 요금이려니와, 전화 빌려 쓰는 마음의 부담이 여간이 아니었다. 전화가 있는 집은 있는 집대로 부담이었다. 수입이 가을철에 몰려있는 농촌으로선 매달 물어야 되는 전화요금이 적잖게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공중전화 설치를 신청했고, 봉사한다 생각하며 관리자를 자청했다. 사용액수가 매달 5만원에 넘.. 2021. 2. 7.
꿈을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마음속 좋은 생각을 품고, 품은 생각을 지키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다른 이의 눈치 살핌 없이 그저 묵묵히 자신의 꿈을 일궈내는 일은 그 꿈이 무엇이건 아름다운 일입니다. 꿈을 버리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임에도 스스로 버리는 꿈은 어려운 일입니다. 오직 한 가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나머지 바람들을 사소한 것으로 돌리는 것, 어려운 만큼 고귀한 일입니다. 버리고 품는 꿈, 꿈이 필요한 때입니다. - (1992년) 2021. 2. 6.
산수유 단강의 한해는 산수유로 시작해 산수유로 끝이 납니다. 이른 봄, 단강의 봄을 제일 먼저 알리는 꽃이 산수유입니다. 잎보다도 먼저 노란 꽃으로 피어나 봄이 왔음을 알립니다. 한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가을철, 모든 이파리 떨어지고 나면 빨간 꽃처럼 남는 것이 또한 산수유입니다. 빨갛게 익어 가지마다 가득 매달린 산수유 열매는 열매라기 보다는 또 한 번의 꽃입니다. 콩 타작 마치고. 마늘 놓고 나면 한해 농사도 끝나고, 그러면 사람들은 산수유 열매를 털어 집안으로 들입니다. 멍석에 널어 말린 산수유는 긴긴 겨울, 마을사람들의 소일거리가 됩니다. 씨를 빼낸 산수유를 잘 말려두면 장사꾼이 들어와 근수를 달아 산수유를 사 갑니다. 해마다 값이 다르긴 하지만 한약재로 쓰이는 산수유는 그런 대로의 값이 있어 단강에선 .. 2021. 2. 5.
보물 미영이, 은희, 경림이는 단강교회의 보물들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보물들입니다. 고등학교 학생, 그래도 그들은 교회 학교 선생님입니다. 몇 안 남은 동생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칩니다. 토요일 밤에 따로 모여 주보를 접고, 적잖은 주보를 늦도록 접고, 다음날 아이들 가르칠 걸 준비합니다. 한나절이 다 걸리는 주보발송도 그들의 몫입니다. 궂다면 한없이 궂은 그 일을 그들은 웃음으로, 얘기꽃으로 대신합니다. 행사 때마다의 제단 장식도 그들의 몫이고, 때때로의 청소도 그들 몫입니다. 공부에, 농사일에 쉽지 않은 시간들, 그래도 그들은 기쁨으로 모든 일을 받습니다. 지난해부터 이진웅 선생님이 들어와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의대 졸업반, 만만한 시간이 아니면서도 언제 한 번 거르는 법 없습니다. 너무 .. 2021. 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