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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502

어떤 하루 아침 일찍 끝정자로 내려가 안 속장님과 속장님의 언니를 태우고 작실로 올라갔습니다. 며칠째 앓아누워 있던 속장님의 언니가 작실 집으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속장님 또한 몸이 안 좋은 상태지만 더 아픈 언닐 혼자 보낼 수가 없어 속장님이 언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며칠 동안을 텅 비어있던 썰렁한 집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의 눈에서 핑그르르 눈물이 돕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들, 게다가 걸음도 편치 않은 병약한 몸들입니다. 내려오는 길, 김천복 할머니 댁에 들러 할머니를 모시고 부론으로 나왔습니다. 밀려있는 객토 대금을 갚으러 농협에 가는 길입니다. 허리 굽은 여든의 노인네가 콩과 깨, 고추 등을 장에 이고 가 푼푼이 팔아 모은 돈으로 농협 빚을 갚으러 갑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웃으며 나누지만 할머니 모시고 .. 2021. 2. 3.
일하는 아이들 주일 어린이 예배. 종을 쳤지만 아이들이 모이질 않았다. 늘 빠짐이 없던 은옥이와 은진이까지 안 나왔다. 녀석들이 모두 웬일일까, 허전하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저녁 무렵 아랫말로 내려가다 은옥이 은진이 은희를 만났다. 그들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온통 얼굴이 벌겋게 탔고 옷은 흙과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할머니가 몸져누워 계시자 어린 그들이 할머니 대신 당근 밭을 매고 오는 길이었다. 미안했다. 놀면서 안 오는 줄 알고 섭섭하게 생각했던 내가 영 부끄러웠다. 일하는 아이들을 두고 난 너무 쉽게만 생각했던 것이다. - (1993년) 2021. 2. 2.
가래질 한희철의 얘기마을(219) 가래질 신작로 건너편 산다락 논. 병철 씨가 일하는 곳에 다녀왔다. 소를 끌고 쟁기를 메워 가래질을 하는 일이었다. 층층이 붙어 있는 고만고만한 논들, 작고 외지다고 놀리지 않고 그 땅을 일구는 손길이 새삼 귀하다. “이렷, 이렷” 다부지게 소를 몰며 논둑을 간다. 석석 논둑이 쟁깃날에 갈라진다. 멀쩡한 둑을 반이나 잘라낸다. 저러다 둑이 무너지지 않나 싶을 정도다. 그러나 가래질을 해야 한 해 동안 논둑이 견딘다. 잘라낸 둑 부분을 물에 이긴 진흙으로 발라두어야 물이 새지 않고 둑이 터지지 않는 것이다. 물로 반죽한 물컹물컹한 진흙, 허술하고 약하지 싶은 진흙들이 오히려 물을 견뎌 둑을 둑 되게 하는 것이 신기하다. 단단하고 견고한 것보다는 한없이 약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물을.. 2021. 2. 1.
아이스러움! 한희철의 얘기마을(218) 아이스러움! 근 두 달간 놀이방 점심 반찬을 놀이방 엄마들이 준비를 했다. 아내 몫이었던 그 일이 아기 출산으로 엄마들이 돌아가며 맡게 되었다. 사실 아이들 반찬을 준비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먹는 것과 안 먹는 것이 구별되기도 하고, 매번 같은 걸 준비하기도 그렇고,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언젠가 한번은 점심 반찬으로 멸치볶음이 준비되었는데 그날 아이들은 멸치를 하나도 못 먹고 남겼다. 멸치를 막 먹으려는 순간 소리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멸치들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는 것 같아요.” 그 얘길 듣고 보니 반찬 그릇마다 멸치가 눈을 똥글똥글, 더 이상 아이들의 손이 멸치에게로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스러움! - (1993년) 2021. 1. 31.
농사꾼 생일 한희철의 얘기마을(217) 농사꾼 생일 “오늘 뭐 해요?” 비가 제법 내리는 아침 병철 씨를 만났다. 아무 일 없으면 낮에 차 한 잔 하러 들르라고 하자 병철 씨가 껄껄 웃으며 그러겠다고 했다. 그의 대답이 재미있다. “비 오는 날은 농사꾼 생일이잖아요.” 2021. 1. 30.
자기 몸집만큼만 한희철의 얘기마을(216) 자기 몸집만큼만 농활 나온 대학생들에게 병철 씨가 콩 심는 방법을 가르친다. “자, 이렇게 호미로 파가지고 콩을 심는데, 한번에 5-6알씩 넣으면 돼. 그러고는 자기 발로 두 개쯤 간격을 두고 또 파서 심으면 되고.” 한 학생이 물었다. “콩은 얼마나 묻으면 돼요?”“응, 그냥 살짝 묻으면 돼. 너무 깊게 묻으면 오히려 안 되지. 옛날 어른들이 그랬어. 씨앗 크기만큼만 묻으면 된다고. 깨는 깨만큼 묻으면 되고 옥수수는 옥수수만큼만 묻으면 된다고. 씨앗 크기만큼씩만 묻으면 싹이 다 난다는 거지.” 자기 크기만큼씩만 묻으면 싹이 난다는 씨앗, 모든 살아있는 것이 그리하여 자기 몸집만큼만 흙속에 묻히면 땅에서 사는 걸, 뿌리 내리고 열매 맺는 걸, 더도 덜도 말고 자기 몸집만큼만 흙.. 2021. 1. 29.
달과 별 한희철의 얘기마을(215) 달과 별 “해는 환해서 혼자 있어도 괜찮지만, 달은 캄캄한데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봐 별이랑 같이 있는 거야?” 어둠과 함께 별 총총 돋는 저녁, 어린 딸과 버스를 함께 탔습니다. 훤하게 내걸린 달,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리가 별들과 어울린 달 얘기를 합니다. 그런 말이 예뻐, 마음이 예뻐, 눈이 예뻐 마음껏 인정을 합니다. “그래 그럴 거야.” 밀려오는 졸음 이기지 못하고 이내 품에서 잠드는 어린 딸. 캄캄한데 달 혼자면 무서울까봐 별이 같이 있는 거라면, 품에 안겨 잠든 너야 말로 내겐 별이지, 험한 세상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어야지, 왠지 모를 간절함으로 잠든 딸의 등을 다독입니다. - (1993년) 2021. 1. 28.
주인공 한희철의 얘기마을(214) 주인공 우리가 흔히 범하는 잘못 중의 하나는 주인공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어떤 일로 몇 사람이 모였다 하자.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모이는 자리엔 누군가 주인공이 있기 마련이다. 생일을 맞았다든지, 이사를 했다든지, 아프다든지, 기쁜 일 혹은 슬픈 일이 있다든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가 그 자리의 주인공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잊고 엉뚱한 얘기들만 늘어놓는 경우가 있다. 엉뚱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엉뚱한 주제가 당연히 나눠야 할 대화를 가로채기도 한다. 그리고 돌아설 땐 허전하다. 그 허전함은 돌아서는 사람 뿐 아니라 그날의 주인공인 사람에게는 더욱 클 것이다.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세우는 일, 어색함 없이 누군가의 삶.. 2021. 1. 27.
소유는 적으나 존재는 넉넉하게 한희철의 얘기마을(213) 소유는 적으나 존재는 넉넉하게 쌓인 우편물을 정리하다 보니 길호가 쓴 메모지 한 장이 있다. 단강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 마침 빈 집을 다녀가게 된 수원종로교회 청년들 몇이 남긴 메모였다. 사택이랄 것도 없이 더없이 허름했던 흙벽돌 집. 작은 골방 앞에 써 붙여 둔 짧은 글 하나가 있었다. 그 당시 나를 지탱해 주던 글이었다. 그 글을 눈여겨 본 녀석은 다시 한 번 그 글을 적은 뒤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도 한 수 배우고 갑니다.” 잊었던 기억. 묻혀뒀던 글, - (1993년) 2021. 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