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502

할머니의 믿음 한희철의 얘기마을(15) 할머니의 믿음 아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물녘 올라가 뵌 허석분 할머니는 자리에 누워 있다가 괴로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양 손으로 허리를 짚으신다. 허리가 아파서 잠시 저녁을 끓여먹곤 설거지를 미루신 채 일찍 누운 것이었다. 할머니는 혼자 살고 계시다. 전에도 허리가 아파 병원을 몇 차례 다녀온 적이 있는데, 병명을 기억하고 계시진 못했지만, 디스크 증세라는 판정을 받은 것 같았다. 한동안 괜찮았는데 다시 도진 것 같다고 했다. 일을 안 하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리지만, 할머니는 당장 쌓인 일거리를 걱정했다. 주일 저녁예배. 재종을 치기 위해 조금 일찍 나갔는데, 허석분 할머니가 천천한 걸음으로 교회 마당에 들어서신다. “할머니, 허리 아프시면서요.” 그런 할머니 걸음으로라면 할.. 2020. 7. 2.
모두를 같은 품에 재워 한희철의 얘기마을(14) 모두를 같은 품에 재워 오늘도 해는 쉽게 서산을 넘었다.말은 멍석 펴지듯 노을도 없는 어둠산 그림자 앞서며 익숙하게 밀려왔다. 밤은 커다란 솜이불모두를 덮고 모두를 집으로 돌린다. 몇 번 개들이 짖고 나면 그냥 어둠 뿐,빛도 소리도 잠이 든다. 하나 둘 별들이 돋고대답하듯 번져가는 고만고만한 불빛들저마다의 창 저마다의 불빛 속엔저마다의 슬픔이 잠깐씩 빛나고그것도 잠깐 검은 바다 흐른다. 그렇다.밤은 모두를 같은 품에 재워날마다살아있는 것들을 다시 한 번 일으킨다. 검은 바다를 홀로 지난 것들을. (1992년) 2020. 7. 1.
왜가리 할아버지 한희철의 얘기마을(13) 왜가리 할아버지 느긋한 날갯짓으로 내려앉아 어정어정 논가를 거니는 한 마리 왜가리인 줄 알았어요.널따란 논 한복판 한 점 흰 빛깔.흔한 일이니까요.허리 기역자로 굽은 동네 할아버지 피 뽑는 거였어요.난닝구 하나 걸친 굽은 등이 새처럼 불쑥 오른 것이었지요.내려앉은 새처럼 일하시다 언젠지 모르게 새처럼 날아가고 말 변관수 할아버지. (1990년) 2020. 6. 30.
무심한 사람들 한희철의 얘기마을(12) 무심한 사람들 어스름을 밟으며 동네 아주머니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지나가던 자가용 한 대가 서더니만 창밖으로 고갤 내밀며 한 아주머니한테 묻더란다. “저런 아주머니들도 집에 가면 남편이 있나요?” “지들이 우리가 농사 안 지면 무얼 먹고 살려고?” 한낮 방앗간 그늘에 앉아 쉬던 아주머니들이 그 이야기를 하며 어이없어 한다. 무슨 마음으로 물었던 것일까, 아무리 지나가는 길이기로서니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가뜩이나 서러운 삶을 그런 식으로 받다니. 무식한 사람들, 무심한 사람들. 2020. 6. 29.
해바라기 한희철의 얘기마을(12) 해바라기 교회 마당 주변에 해바라기들이 서 있다. 키 자랑 하듯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큰다. 너무 바투 자라 제법 솎아냈지만, 크는 키와 함께 잎 또한 크게 자라 교회를 빙 둘러 해바라기가 손에 손을 잡았다. 이파리 하나 뚝 따서 얼굴 가리면 웬만한 비엔 우산 되겠다 싶다. 기다랗게 목 빼어든 노란 얼굴들이 해를 바랄 올 가을은 더 멋있을 게다. 지난해 여름 비 오던 날, 승혜 할머니가 심어주신 몇 포기 해바라기가 이렇게 불어난 것이다. 가을이 되어 까맣게 익은 해바라기 씨를 따로 따지 않고 그냥 두었다. 새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남은 것이 땅에 떨어진 것이었는데, 그 씨들이 겨울을 견디고 봄이 되어 싹을 낸 것이다. 작은 시작, 큰 결과. 언제나 씨 뿌리는 일은 그러하건만, 사.. 2020. 6. 28.
슬픔을 극복하는 길 한희철의 얘기마을(11) 슬픔을 극복하는 길 박종구 씨가 맞은 환갑은 쓸쓸했다. 늘 궁벽한 삶, 음식 넉넉히 차리고 부를 사람 모두 불러 즐거움을 나누는 여느 잔치와는 달리 조촐하게 환갑을 맞았다. 친척 집에서 준비한 자리엔 가까운 친척 몇 명이 모여 아침식사를 했을 뿐이다. 별 차이는 없었겠지만, 환갑 맞기 얼마 전 부인마저 먼저 보낸 환갑이었기에 쓸쓸함은 더했다. 식사를 마치고 건너편 응달말 언덕배기 박종구 씨 집으로 건너가 식구들과 둘러앉아 예배를 드렸다. 마침 그 날이 주일, 예배 시간 우리는 박수로써 환갑을 맞는 박종구 씨를 축하했다. 예배를 마쳤을 때, 여선교회장인 이음천 속장은 교회에서 떡을 준비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그 얼마나 좋은 생각이냐며, 우리는 서둘러 서로에게 연락을 했다... 2020. 6. 27.
땅내 한희철의 얘기마을(10) 땅내 ‘땅내를 맡았다’고 한다.논에 모를 심고 모의 색깔이 검푸른 빛으로 변해 뿌리를 내린 걸 두고 모가 땅내를 맡았다고 한다.땅 냄새를 맡았다는 말이 귀하다.내 삶은 얼마나 땅내를 맡은 것일까. (1989년) 2020. 6. 26.
뒤풀이 한희철의 얘기마을(9) 뒤풀이 은진이 아버지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전에 본 적이 없다. 한 동네서 6년을 같이 살아오면서도 말 한마디 속 시원히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는 터에 노래라니. 은진이 아버지의 노래는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게다가 흥이 더하자 덩실덩실 청하지도 않은 춤마저 추는 것이 아닌가. 이거 내가 꿈을 꾸나 싶었다. 박수와 웃음소리, 그리고 환호소리가 노래와 춤을 덮었다. 일주일 동안의 농촌봉사활동을 마치고 마지막 날 저녁 예배당 마당에서 열린 '마을주민잔치', 이른바 뒤풀이 시간이다. 자리를 깔고 천막을 치고 푸짐한 상을 차리고, 그야말로 신명나는 잔치가 열렸다. 모르는 대학생들이 일주일 동안이나 단강을 찾아 귀한 땀을 흘리다니, 농약을 치다 어지럼증을 느끼면서도, 풀독이 뻘겋게.. 2020. 6. 25.
마른땅, 그대들의 땀방울은 약비로 내리고 한희철의 얘기마을(8) 마른땅, 그대들의 땀방울은 약비로 내리고 살아가며 그중 어려운 건 외로움입니다. 얼마쯤은 낭만기로 들리는 그 말이 때론 얼음처럼 뼛속으로 파고들어 마음을 흐트러뜨리고 시간을 야위게 합니다. 농사일이 힘든 거야 당연한 일입니다. 변함없이 가는 세월 앞엔 한해 한해가 달라 기운이 쇠하고, 마음은 그렇질 않은데 몸이 따르질 못합니다. 맘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몸을 이끌고 예전처럼 농사일을 꾸리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갈수록 경운기 부리기도 겁이 나고, 쌀가마 두개쯤은 거뜬했던 지게질도 이젠 소꼴 얼마큼에 힘이 벅찹니다. 늙으면 손도 발도 따라 굼떠져 같은 일도 더딜 수밖엔 없습니다. 쑥쑥 단번에 뽑히던 잡초들도 이젠 우리들을 비웃어 여간한 힘엔 꿈쩍을 않습니다. 없는 새벽잠에 깨는 대로 .. 2020. 6.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