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두런두런'1158 자화상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8) 자화상 인우재를 다녀오는 길에 그림 한 점을 가져왔다. 오랫동안 인우재에 걸어두었던 그림인데, 비어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액자 안에 습기가 찼다. 아무래도 표구를 다시 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먼지를 닦으며 그림을 마주하니 옛 일이 떠오른다. 오래 전 일이다. 김정권 형이 목회를 하던 신림교회를 찾은 일이 있다. 새해를 맞으며 드리는 임원헌신예배에 말씀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예배를 마쳤을 때, 정권 형이 화가 이야기를 했다. 인근에 젊은 화가가 사는데, 한 번 만나러 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기꺼이 동행을 했고, 그렇게 김만근이라는 화가를 만나게 되었다. 수북이 쌓인 눈길을 뚫고 당도한 그의 집은 치악산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보아도 허름하고 허술한 농.. 2020. 2. 13. 생명을 지키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7) 생명을 지키면 두 주 전부터 예배실 앞에 있는 탁자 위에는 작은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노란색 꽃을 피운 화분이었는데, 저만치 떨어져 볼 때 그 꽃이 생화인지 조화인지 모를 만큼 꽃을 가득 피워 올린 상태였다. 일부러 다가가서 보니 분재였다. 구불구불 비틀어진 몸이 저가 견뎌낸 세월이 얼마쯤일까 궁금증을 자아냈다. 꽃을 보니 영춘화였다. 정릉교회 담장을 따라 여인의 긴 머리카락처럼 늘어져 있는 영춘화가 화분에 활짝 피어 있었다. 예배드리러 오는 교우들에게 어서 오라며 환한 웃음을 건네는 것 같이 빙긋 웃음이 났다. 꽃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마침 지나가던 홍 권사님이 내게로 다가왔다. 조경 일을 하면서 정릉교회 조경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권사님이다. 분재는 권사님이 가.. 2020. 2. 11. 한우충동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6) 한우충동 책을 읽다가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는 말을 만났다. 낯설어서 찾아보니 ‘棟’이 ‘용마루 동’이었다. ‘소가 땀을 흘리고 대들보까지 가득 찬다.’는 뜻으로, 책을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집에 쌓으면 대들보까지 닿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만큼 지니고 있는 책이 많은 것을 비유하는 말이었다. (글을 쓰며 피식 웃음이 났던 것은 ‘한우충동’이 ‘한우를 먹고 싶은 충동’은 아니었군, 생뚱맞은 생각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어디 한우충동을 부러워할 일이겠는가? 한두 권이라도, 한두 줄이라도 내 것으로 삼아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할 터, 아무리 집안 가득 책을 쌓아두어도 그것이 내 삶과 상관이 없다면 책은 무용지물, 다만 나를 꾸며줄 액세서리일 뿐이다. 성경책.. 2020. 2. 10. 함께 사는 한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5) 함께 사는 한 생생했다. 꿈을 꾸는 내내 꿈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친구와 함께 있었다. 그가 살고 있는 미국이었다. 무슨 급한 일이었는지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채 나는 미국에 있었고, 덕분에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을 일이 많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친구는 자연스럽고도 넉넉하게 모든 것들을 도와주었다.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든든했고 고마웠고 즐거웠다. 그러다가 깼다. 무엇 그리 급한지 훌쩍 곁을 떠난 친구, 하지만 꿈으로 찾아와선 여전한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이었다. 죽음이란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라 했던 모리 교수의 말을 떠올린다. 함께 사는 한,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죽은 것이 아니다. 2020. 2. 9. 스미다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4) 스미다 식물을 가꾸는 이들에게는 자연스럽기도 하고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새롭게 보였다. 목양실 안에 있는 몇 몇 화분 중에는 난도 있는데, 어느 날 보니 난 화분이 물을 담은 양동이 안에 들어가 있었다. 사무실의 장집사님이 한 일이다 싶은데, 난 화분에 물을 주는 대신 화분을 물에 담금으로 물이 스미도록 한 것이지 싶었다. 난 화분에 물을 부어주는 것과 물이 스미도록 하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나는 모른다. 하지만 단번에 쏟아 붓는 것보다는 조금씩 스미도록 하는 것이 난에 필요해서 그리 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 난 뿐일까? 믿음도, 은혜도, 함께 나누는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단번에 넘쳐나도록 쏟아 붓는 것보다는 시간을 잊고 알게 모르게 스미는 .. 2020. 2. 8. 깊은 두레박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3) 깊은 두레박 특별한 일이 없다면 하루의 일과는 일정하게 시작이 되고 진행이 된다. 4시 45분 기상, 5시 30분 새벽예배, 한 시간 쯤 후에 책상에 앉는다. 새벽잠을 물리고 책상에 앉는 시간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아침식사까지 삼가면 조용한 시간이 꽤 길게 이어진다. 2020년 들어서며 아침마다 갖는 시간이 있다. 김기석 목사님이 쓴 묵상집을 읽는다. 일용할 양식을 대하듯, 그날그날의 묵상을 따라간다. ‘365일 날숨과 들숨’이라는 부제가 적절하게 여겨진다. 참으로 두레박의 줄이 길다. 두레박의 줄이 이리도 기니 깊은 물을 길어 올린다. 맑고 시원한 물이다. 어두운 샘에서 물을 길어 환한 데 쏟아 붓는 두레박(루미), 탁하고 미지근한 물과는 다르다. 함께 길을 걷듯 천천히.. 2020. 2. 6. 가로등을 밝히는 것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2) 가로등을 밝히는 것은 정릉교회 마당으로 들어서는 초입에는 콘크리트 기둥이 서 있다. 국민대와 길음역 사이의 대로변에서 빠져나와 청수장으로 올라가는 길, 또 한 번 가지가 갈라지듯 자칫하면 놓치기 쉬운 롯데리아를 끼고 우회전을 한 뒤 좁은 길을 따라 올라오다 만나게 되는 예배당으로 들어서는 초입, 전봇대 바로 옆 벽돌을 쌓아 만든 허름한 기둥이 서 있다. 하필이면 교회로 들어서며 제일 먼저 만나는 되는 것이 허름한 기둥일까 생각을 하다가, 기둥 위에 등을 세우기로 했다. 기둥을 헐거나 기둥을 단장하는 대신 택한 선택이었다. 비나 눈이 와도 괜찮은 등을 찾아 기둥 위에 세웠더니 보기가 그럴듯하다. 허름한 기둥 위에 등을 얹자 기둥은 그럴듯한 가로등 받침대가 되었다. 어둠이 내.. 2020. 2. 5. 노란 손수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1) 노란 손수건 헌신이 자발적이어야 하듯 분노도 자발적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조장 위에 분노가 서면 안 된다. 그것은 분노의 정당함을 떠나 남의 조정을 받는 것일 뿐이다. 우한에서 비롯됐다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은 바이러스의 전파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번져가고 있다. 감염자가 다녀간 곳과 감염자와 접촉한 사람이 있는 곳은 한 순간에 절해고도(絶海孤島)가 된다. 누구도 다가가서는 안 되는 곳, 서둘러 문을 닫고 피해야 하는 곳으로 변한다. 현대판 나병과 다를 것이 없지 싶다. 목에 방울을 달고 다님으로 성한 이들을 피하게 해야 했던. 우한에 살던 교민들로서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세상으로 통하는 모든 길이 막히고, 병의 진원지에 꼼짝없이 갇히게 되고 말았느.. 2020. 2. 3. 나도 모르게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0) 나도 모르게 군인들이 끌고 간다. 모시고 가는 것과는 다르다. 재미 삼아 내리치는 채찍에도 뚝 뚝 살점은 떨어져 나간다. 피투성이 몰골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흥미로운 눈요기일 뿐이다. 자주색 옷으로 갈아입히고 면류관을 씌운다. 희롱이다. 희롱은 당하는 자가 가장 먼저, 분명하게 느낀다. 갈대로 머리를 치며 침을 뱉는다. 속옷을 나눈다. 찢기엔 아까웠던 호지 않은 옷, 제비뽑기를 위해 속옷을 벗기는 순간은 발가벗겨지는 순간이다. 나를 가릴 것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양손과 발목에 박히는 못은 연한 살을 단숨에 꿰뚫고 들어와 뼈를 으스러뜨린다. 순간 나는 떨어지지 말아야 할 물건이 된다. 죄인들의 두목이라는 듯 두 강도 사이에 매단다. 악한 이들의 의도는 얼마나 교활하.. 2020. 2. 2. 이전 1 ··· 67 68 69 70 71 72 73 ··· 12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