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2663

어떤 소명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5) 어떤 소명 과녁이 아닌데도, 우리 가슴엔 수많은 화살들이 박혀 있다. 누군가의 말, 원치 않았던 사람, 피할 수 없었던 일, 때로는 피를 철철 흘리기도 했고, 겨우 아물던 상처가 덧나기도 했다. 상처투성이의 모습은 과녁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돌아보면 화살이 어디 내 가슴에만 박힌 것일까? 함부로 쏘아댄 화살이 내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미숙함으로 성급함으로 쏜 내 화살에 맞은 가슴이 왜 없을까? 나로 인해 잠을 못 이루며 괴로워하는 이가 왜 없을까? 서로의 화살을 뽑아줄 일이다. 떨리는 손으로 깊이 박힌 화살을 뽑아내고, 눈물 젖은 손으로 약을 바를 일이다. 돌에 퍼렇게 이끼가 낀 신학교 교문만이 아니다. 녹이 슨 봉쇄 수도원의 철문만이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사람과.. 2019. 10. 11.
손톱을 깎으며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4) 손톱을 깎으며 믿음이나 인격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만, 시간이 지나며 저절로 자라는 것들은 의외의 것들이다. 머리카락과 수염, 손톱이 그렇다. 잠시 잊고 있다 보면 어느새 자란다. 대부분의 경우 손톱은 책상에 앉아서 깎게 된다. 손톱이 자란 것을 우연히 보고는 서랍에 있는 손톱깎이를 찾아 손톱을 깎는다. 손톱에 무슨 생명이 있을까 싶은데, 그렇지가 않다. 잘린 손톱은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튀어 오른다. 다시는 들키고 싶지 않다는 듯 날아간 손톱은 어딘가로 숨는다. 원고를 쓰는 동안 자판을 눈여겨 봐 둔 것인지 키보드 자판 사이로 숨기도 한다. 그러면 자판을 거꾸로 들고 흔들어대어 손톱을 떨어뜨려야 한다. 몇 번 비슷한 경험을 하고선 다른 선택을 한다. 손톱을 깎을 때가 되.. 2019. 10. 9.
일요일에만 살아계신 하나님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3) 일요일에만 살아계신 하나님 예수님께 나아와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은 한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습니다.”(마가복음 12:33)라고 새긴다.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34절)고 하며 그의 대답을 인정하신다. 새벽기도회 시간, 그 말씀을 나누다가 하일의 시 한 구절을 소개했다. 우리의 신앙이 말씀의 실천 없이 번제물과 기타 제물을 드리는 종교적 행위에 머물러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오래 전에 읽었지만 낫지 않는 상처처럼 마음에 남아 있는 구절이었다. 시인은 이렇게.. 2019. 10. 9.
믿는 구석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2) 믿는 구석 다가온다는 태풍 앞에서도 거미가 저리 태평은 것은, 태풍의 위력을 몰라서가 아닐 것이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촘촘하게 거미줄을 치면서도 실상은 비워놓은 구석이 더 많다. 그것이 비를 견디고 바람을 견디는 길임을 거미는 알고 있는 것이다. 다가온다는 태풍 앞에서도 거미가 저리 태평인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2019. 10. 8.
그레발을 두자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2) 그레발을 두자 ‘그레발’은 집 지을 재목을 다듬는 일과 관련이 있다. 보, 도리, 서까래, 기둥 등 집을 지을 때 쓰는 재목을 다듬기 위해서는 ‘마름질’을 한다. 마름질이란 재목을 치수에 맞추어 베거나 자르는 것을 말한다. - 그림/국민일보 재목을 길이에 맞춰 자르기 위해서는 재목에 표시를 하는데, 그렇게 표시를 하는 도구를 ‘그레’라 한다. 그레발이라는 말은 그레와 관련이 있다. 재목을 자를 때 원래의 치수보다 조금 더 길게 늘려 자른 부분을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레발을 두는 것은 혹시라도 오차가 생겼을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처음부터 길이를 딱 맞춰 잘라 놓았다가는 나중에 바로잡을 길이 없어질 수가 있다. 재목의 길이가 길면 잘라 쓰면 되지만 행여 짧을 경우엔 .. 2019. 10. 6.
아름다운 일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1) 아름다운 일 누군가와 우정을 나누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누군가가 나누는 우정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저만치 앞서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오래된 우정인 양, 오래갈 우정인 양 흑백으로 찍는다. 나중에 보니 사진이 좋다. 한 장에는 두 팔을 벌린 모습이 담겼고, 다른 한 장에는 슬그머니 옆을 보며 빙그레 웃는 웃음이 담겼다. 함께 하는 즐거움이 오롯이 전해진다. 아름다운 우정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2019. 10. 4.
아프고 부끄럽고 고마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0) 아프고 부끄럽고 고마운 누군가의 설교를 듣는 일은 내게 드문 일이다. 바쁜 탓이기도 하고, 혹시라도 누군가를 흉내 내거나 비교하려는 마음을 스스로 차단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심사가 못된 탓이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우연히 듣게 된 설교가 있다. 새문안교회 이상학목사의 설교였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4)–사랑과 정의 사이에서’(마태복음 5:20)라는 제목이었다. 자신이 속한 교단 안에서 일어난 M교회의 담임목사 세습 문제를 다루는 설교였다. “성경적 설교를 기대하시는 분들은 용서해 달라”며 시작했지만, 내게는 더없이 성경적으로 들렸다. 목소리를 높이는 법 없었지만 위선과 탐욕과 무지의 견고한 벽을 깨뜨리는 설교이기도 했다. 설교자는 이번에 벌어진 일이 193.. 2019. 10. 4.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9)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린 손자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하나님을 본 적이 있으세요?” 그러자 할아버지도 진지하게 손자에게 대답을 했다. “얘야, 나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단다.” 성 베네딕토는 말했다. “수도원의 부엌세간과 헛간의 연장을 다루는 것은 제단의 제구를 다루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도로테오의 말은 지극히 단순하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가게 되며, 다른 사람에게 가까워질수록 하나님과 가까워진다.” 로렌스의 말은 가슴에 쿵 하고 떨어지는 바윗덩어리 같다. “낙원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하나.. 2019. 10. 4.
대뜸 기억한 이름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8) 대뜸 기억한 이름 지난주일 2부 예배를 앞둔 시간이었다. 예배실 앞에서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안내를 보던 권사님이 찾아와선 예전에 단강에 계시던 분이 오셨다고 일러주었다. 누굴까, 누가 이곳을 찾았을까, 아무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런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에 나타난 두 사람, 누군지를 대번 알 수 있었다. 최일용 집사님과 아들 안갑수였다. 단강을 떠난 지가 20여 년 되었으니 참으로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그만한 세월이 지나갔지만 대뜸 두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고, 이름도 금방 떠올랐다. 집사님은 말투도, 웃으면 두 눈이 감기는 모습도 여전했다. 허리가 약간 굽은 것과 집사였던 직분이 권사가 된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저만치서.. 2019. 1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