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2663 범퍼의 용도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7) 범퍼의 용도 교우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올 때였다. 운전을 할 전도사가 주차한 차를 후진하다가 뒤에 있는 차와 부딪치고 말았다. 유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와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 부딪친 차를 보니 별 티가 나지 않았다. 워낙 부딪친 흔적이 많은 차였다. 교회 승합차에는 어떤 흔적도 보이질 않으니 경미한 충돌이라 여겨졌다. 그래도 사고는 사고, 게다가 우리는 교회 차가 아닌가. 주인을 찾았고 한참을 기다려 만났다. 이야기를 듣고 차를 이리저리 살핀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그냥 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인데, 슬그머니 사라지니 당황스러웠다. 일단 보험사에 연락을 했다. 사진을 찍은 뒤 사고를 당한 차 주인에게 보험으로 처리한다는 말을 하고 가라고 했다. 다시 .. 2019. 10. 2. 거오재 노오재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6) 거오재 노오재 냉천동에 있는 감신대에 입학하여 만난 친구 중에는 한남동에 사는 친구가 있었다. 서울에 머물 일이 있으면 친구 집을 찾곤 했다. 한남동을 찾으면 즐겨 찼던 곳이 있었는데 ‘胎’라는 찻집이었다. 순천향병원 맞은편에 있는, 가로수 플라타너스 나무가 2층 창문 바로 앞에 그늘을 드리우는 찻집이었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도 했고, 손님이 없을 때는 연극을 하는 주인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당시만 해도 찻집에는 성냥을 선물로 준비해 두곤 했다. 찻집 이름이 새겨진 작은 성냥이었다. 그런데 ‘胎’에 있는 성냥은 특이했다. 한쪽 면에 한문으로 된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居惡在 路惡在’라는 구절이었다. 신학생의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뜻을 묻는 .. 2019. 10. 1. 보이지 않는 길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5) 보이지 않는 길 한동안 새들로 인한 고민이 컸었다. 날아가던 새가 목양실 창문에 부딪치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한쪽 면이 모두 통유리로 되어 있으니 새들에게는 치명적인 구조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책상에 앉아있다 보면 “퉁!” 하며 유리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그러면 어떤 새는 용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날아갔지만 모든 새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창문 아래 바닥에 죽은 새가 보일 때가 있었다. 새가 부딪치는 것을 막아보려고 블라인드를 낮게 내리고, 가능하면 창문을 열어두었고, 공터에 키가 빨리 크는 나무를 심을 궁리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새가 부딪치는 일이 없어졌다. 가만 생각해보니 새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왜 그럴까? 이.. 2019. 9. 30. 수고를 안다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4) 수고를 안다면 매일 아침마다 전해지는 고마운 문자가 있다. 이민재 목사님이 보내오는 성서일과 본문이다. 마치 일용할 양식을 전해 받는 느낌이다. 성서일과 본문을 받으면 먼저 읽은 뒤 정릉교회 교직원들과 시무장로님들께 보낸다. 같은 말씀을 나누는 것이 의미 있는 동행에 좋은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받은 문자를 보내는 일은 기계에 영 서툰 내게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받은 문자를 길게 누른 뒤 전달 기능을 사용하면 된다.(어떤 기능을 두 번까지 해보는 것은 그래도 가능하다.) 이번에 두 분 선배 목사님 내외분과 같이 여행을 하며 아침마다 보게 된 모습이 있다. 이민재 목사님은 아침마다 노트북 앞에 앉아 뭔가 작업을 했다. 원고를 쓰시나 싶어 여쭈니, 성서일과 본문.. 2019. 9. 29. 경지의 한 자락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경지의 한 자락 小窓多明 작은 창가에 빛이 밝으니 使我久坐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하네 제주도 에 걸린 추사의 글 중 마음을 찌르듯 다가온 글자는 ‘窓’이었다. ‘窓’이란 글자 대신 창문틀을 그려놓았으니, 그 자유분방함이 마치 달빛에 취한 사람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모든 글자가 그랬지만 또 하나 눈길이 머문 글자가 있었는데, ‘앉을 좌’(坐)였다. ‘坐’는 ‘흙’(土)에 ‘두 사람’(人+人)을 합한 글자로,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형상을 담고 있다. 그런데 추사는 ‘坐’를 쓰며 ‘土’ 위에 네모 두 개를 올려둔 것으로 썼다. 네모가 생각보다 큰데, ‘입 구’(口)로도 보이고 창문을 그렸나 싶기도 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를 펼쳐 ‘坐’라는 글자를 찾아보았다. 하나의 글자가.. 2019. 9. 28. 창(窓)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3) 창(窓) 때늦은 휴가를 다녀왔다. 교회 안의 여름행사를 모두 마치고, 다른 교직원들이 모두 휴가를 다녀온 뒤에 떠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휴가철이 끝나서인지 가는 곳마다 한적한 것도 좋은 일이었다. 두 분 선배 목사님 내외분과 함께 제주도를 다녀왔는데, 하필이면 뒤늦게 찾아온 태풍으로 인해 떠나는 것 자체가 아슬아슬했다. 줄줄이 취소되었던 항공편이 우리가 예약한 비행기부터 가능했으니까. 제주도는 갈 때마다 새롭게 느껴진다. 오래 머물 일이 없다보니 그럴 것이다. 섬이면서도 늘 새로운 세상으로 다가온다. 이번 여행도 그랬다. 따로 급할 것도 없고 굳이 지켜야 할 일정도 없이 마음가는대로 움직였는데, 그런 마음을 안다는 듯이 섬은 가슴을 열 듯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자.. 2019. 9. 27. 눈이 밝으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00) 눈이 밝으면 이따금씩 책을 선물할 때가 있다. 책을 선물하다보면 받는 이로부터 부탁을 받는 일이 있는데, 서명을 해 달라는 부탁이다. 그러면 그냥 이름만 적는 것이 뭣해 짧게 한 마디를 적곤 하는데, 대부분은 불쑥 떠오르는 말을 적게 된다. 를 선물로 전하고 싶으니 앞에 서명을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책을 열었다. 그리고는 막 떠오르는 생각 하나를 적는다. 눈이 밝으면 세상이 밝고 귀가 환하면 세상이 환하고! 2019. 9. 25. 사랑하는 법을 안다는 것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99) 사랑하는 법을 안다는 것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사랑하는 법을 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사랑 아닌 일을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누군가를 숨 막히게 할 때도 적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살게끔 하는 것이다'라는 ‘애지욕기생’(愛之欲基生)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9. 9. 25. 거덜나버린 마른 스펀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96) 거덜나버린 마른 스펀지 왜 우리는 달라지지 않는 것일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왜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일까, 안 믿는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일까, 오래된 질문이다. 도무지 풀리지 않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에 대하여 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역설적이게도 ‘신앙적인’ 사람들이 변화에 대해 가장 완강하게 저항한다. 그들은 자신이 이미 변화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메마른 땅에 떨어진 씨와도 같다.” 변화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해야 할 신앙인들이 오히려 변화에 대해 가장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다는 지적이 뜻밖이다. 그 이유가 자신이 이미 변화했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참으로 아프다. “언제까지 여러분은 자기.. 2019. 9. 21. 이전 1 ··· 166 167 168 169 170 171 172 ··· 29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