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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기약 국민학교를 다닐 적에 아이들의 감기약은 가장 쓴 인생의 쓴맛이었다 봄날에도 기침이 잦았던 나는 약을 먹지 않으려고 목련 꽃봉우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달아나지도 못하고 나뭇가지 끝에 앉은 듯 아빠 다리를 하고서 요지부동 앉아 있으면 아빠는 밥숟가락에 하얀 가루약과 물을 타서 큼지막한 새끼손가락으로 푹 무슨 약속이라도 하시려는 듯 휘휘 가루약이랑 물이 풀풀 날리니까 나중엔 젖가락 끝으로 휘휘 살살 약을 개어서 먼저 맛을 보셨다 아빠는 그 쓴 약을 설탕처럼 쪽쪽 드시며 쩝쩝 소리까지 내시면서 "아, 맛있다! 감탄사까지 타신다 세상이 다 아는 하얀 거짓말까지 하시는데 아빠 얼굴을 아무리 살펴 보아도 구름 한 점 없이 웃기만 하신다 나는 속으로 걱정이 되어서 감기도 안 걸린 아빠가 내 감기약을 드셔도 되는지 사실.. 2022. 4. 5.
천인공노(천공) 내 인생의 스승을 찾기 위해서 한 권의 책도 함부러 선택하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고 신학기에 국어 담당이신 담임 선생님이 학급문고를 만들려고 하니, 집에 있는 책들 중에서 각자 두 권씩만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당시 우리집에 있는 책이라곤 한 질의 백과사전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나보고 쓸데없는 책 읽지 말고 학교 공부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교과서만 보았고, 백지 같은 머릿속에 입력된 건 교과서와 매 수업 시간마다 과목 선생님들의 재미난 수업 내용이 대부분인 중학생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중3 때는 시험지를 풀면서, 선생님이 여기서 장난을 치셨네, 하면서 함정은 피해갈 수 있었고, 정답을 찾을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또래들이 돌려보던 '인어공주를 위하여'라는 그 흔한 만화책도 내 .. 2022. 4. 2.
“만 가지를 쳐내고 한 꽃을 얻는다” 삼 십여 년 전 어느 날 저녁, 불현듯 한희철 목사가 계신 단강을 찾아간 적이 있다. 연락도 없이 찾아간 길, 창문을 통해 본 집안은 컴컴했고 문은 잠겨 있었다. 그러나 같이 간 친구와 나는 낭패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시골집다운 허술한 자물쇠를 부수고 기어이 집 안으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 한 일이라고는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 한 권과 단강교회 이름이 새겨진 달력을 가지고 나오면서, ‘왔다 갑니다’ 메모 한 장 써놓은 것뿐이었다. 부수고 들어간 자물쇠를 고칠 도리가 없어서 살짝 문을 닫아두고 집으로 오는 길, 나는 알고 싶었다. 한희철의 ‘내가 선 이곳은’ 도대체 어떤 곳인지, 그에게서 솟아 나오는 샘물은 어떤 것이기에, 자기가 선 곳을 숲속 깊은 곳의 작은 옹달샘으로 만들.. 2022. 4. 2.
그렇다면, 용산역 노숙인들의 새 보금자리는, 대검찰청으로 강원도 산불 피해로 한창 동해안 이재민 돕기 성금 모금 중이라는데 망연자실해 있을 주민들의 눈가에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까맣게 타다가 타다가 잿더미가 된 빈 가슴들 먼저 보듬어줄 줄 알았는데 타다 남은 불씨까지 꺼뜨려준 빗물이 빈 땅에서 채 마르기도 전에 지푸라기 한 올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화재복구지원 정부 보조금 한 푼이라도 바라며 그런 손끝으로 한 점 찍었을 하얀 투표 용지 붉은 도장 하나 눈앞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선거 직전까지 후보자로서 국민들을 향해 외친 공약을 향한 믿음과 약속의 땅 국민들 가슴으로 채 뿌리 내리기도 전에 아직 대통령도 아닌 국민의 한 사람일 뿐인 당선인이 대통령 직무실을 국방부 건물로 이전하겠다고, 대책도 내세우지 않고서 헛소리를 합니다. 꺼져가던 강원도 동해안의 산불.. 2022. 3. 20.
봄(32) 무엇을 품을까 꿈꾸는 빈 황토밭 봄비가 적셔주고 봄바람이 슬어주고 감자, 고구마 고추, 상추, 깻잎 무엇을 심든지 이 붉은 땅에선 모두 모두 제 발로 설 테지요 2022. 3. 19.
이 봄을 몸이 안다 봄비가 오시리란 걸 몸이 먼저 안다 "얘들아, 내일 학교 갈 때 우산 준비하자" 그런 마음을 알아 듣고, 꾸욱 1번을 찍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하고 누가 물으면 그냥 몸이 알아요 저절로 몸이 앓아요 손가락 마디마디 뼛속 골골이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시간이 몸에 새겨놓은 자연이 몸에 물들인 이 모든 흔적이 나의 몸인 걸요 지금 내가 선 이 땅은 탐욕의 고속도로와 분노의 고속국도와 무지의 갈림길 저 멀찍이 그 한가운데 서 있는 나는 한 그루 매화나무 또다시 탐진치의 구둣발에 짓밟힌 이 치욕스런 봄날에도 이 세상에 매화꽃 한 잎의 평화를 눈물처럼 떨구는 나는 그러나 2022번째 찾아오시는 이 봄비는 그날에 더러워진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눈물이란 걸 또다시 비구름을 헤치며 나타나실 봄햇살은 그날.. 2022. 3. 14.
김기석 따라 시편 읽으며 히브리 시에 익숙해져 보기 김기석의 시편산책 이것은 김기석의 시편 설교 모음이다. 운 좋게도 이 책을 손에 넣게 되었다면 우선 초판 서문 “시편 세계에 잠기다”를 먼저 읽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시편이 어떤 책인지 슬쩍 궁금해지면서, 시편을 한두 편이라도 빨리 읽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본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개정판 서문 “삶의 다른 층위를 바라보는 일”을 마저 읽기를 바란다. 시편을 왜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읽어야 할지, 시편의 시인들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할지, 어렴풋이나마 어떤 기대나 흥미가 생길 것이다. 이쯤 되면, 독자는 비로소 차례에 적힌 대로, 약 70여 꼭지의 글을 읽으면 된다. 또 설교 들으라고?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이 책의 골갱이는 많은 독자가 싫어할 수도 있는 “설교”다. 그.. 2022. 3. 14.
몸이 저울축 열 살 아들과 엄마가 장을 보고 집으로 가는 길에 비닐 봉투 하나 종이 가방 하나 엄마 손에 든 짐을 아들이 모두 다 달라며 둘 다 한 손으로 다 들겠다며 다 들 수 있다며 두 짐을 든 주먹손 뒤로 빼며 빈 손으로 엄마 손을 잡습니다 몇 발짝 걷다가 좀 무거운지 잠시 주춤 짐을 바로 잡길래 "엄마가 하나만 들어줄까?" 아들이 걸음을 멈추더니 한 손엔 비닐 봉투 다른 손엔 종이 가방 두 손에 나누어 들고서 열 살 몸이 저울축이 되어 곰곰이 묵묵히 저울질을 합니다 그러고는 종이 가방을 내밉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웠는지 궁금해진 엄마도 멈추어 서서 양 손에 하나씩 들어보자며 엄마 몸도 똑같이 저울축이 됩니다 무게가 엇비슷해서 잘 분간이 되지 않지만 이번에는 검정 비닐 봉투 말고 하얀 종이 가방을 엄마에.. 2022. 3. 13.
“호랑이 입보다 사람 입이 더 무섭다” “호랑이 입보다 사람 입이 더 무섭다” 속담이나 우리말에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우리네 삶의 경험과 생각이 녹아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냄새가 무엇이냐 물으면 우리 옛 어른들은 ‘석 달 가뭄 끝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먼지를 적실 때 나는 냄새’라 했다. 생각해보면 그윽하다. 농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옛 어른들에게 석 달 동안 가뭄이 든다는 것은 절망의 벼랑 끝에 내몰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곡식이 될만한 풀포기는 모두 새빨갛게 타들어가고 논바닥은 거북이 등짝처럼 갈라졌을 터. 식구들을 먹여 살릴 길이 보이지 않으니 농부의 마음은 갈라진 논바닥보다 더 깊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하루하루 애(창자)가 타는 마음으로 쳐다보는 하늘,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천둥소리가 나야 농.. 2022.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