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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저울축 열 살 아들과 엄마가 장을 보고 집으로 가는 길에 비닐 봉투 하나 종이 가방 하나 엄마 손에 든 짐을 아들이 모두 다 달라며 둘 다 한 손으로 다 들겠다며 다 들 수 있다며 두 짐을 든 주먹손 뒤로 빼며 빈 손으로 엄마 손을 잡습니다 몇 발짝 걷다가 좀 무거운지 잠시 주춤 짐을 바로 잡길래 "엄마가 하나만 들어줄까?" 아들이 걸음을 멈추더니 한 손엔 비닐 봉투 다른 손엔 종이 가방 두 손에 나누어 들고서 열 살 몸이 저울축이 되어 곰곰이 묵묵히 저울질을 합니다 그러고는 종이 가방을 내밉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웠는지 궁금해진 엄마도 멈추어 서서 양 손에 하나씩 들어보자며 엄마 몸도 똑같이 저울축이 됩니다 무게가 엇비슷해서 잘 분간이 되지 않지만 이번에는 검정 비닐 봉투 말고 하얀 종이 가방을 엄마에.. 2022. 3. 13.
“호랑이 입보다 사람 입이 더 무섭다” “호랑이 입보다 사람 입이 더 무섭다” 속담이나 우리말에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우리네 삶의 경험과 생각이 녹아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냄새가 무엇이냐 물으면 우리 옛 어른들은 ‘석 달 가뭄 끝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먼지를 적실 때 나는 냄새’라 했다. 생각해보면 그윽하다. 농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옛 어른들에게 석 달 동안 가뭄이 든다는 것은 절망의 벼랑 끝에 내몰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곡식이 될만한 풀포기는 모두 새빨갛게 타들어가고 논바닥은 거북이 등짝처럼 갈라졌을 터. 식구들을 먹여 살릴 길이 보이지 않으니 농부의 마음은 갈라진 논바닥보다 더 깊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하루하루 애(창자)가 타는 마음으로 쳐다보는 하늘,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천둥소리가 나야 농.. 2022. 3. 2.
아,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두려움 없이, 두리번거림 없이/-눈부시지 않아도 좋은, 하루 한 생각을 읽고 ____________________ 난 어릴 때부터 철이 삼촌이 좋았다. 따뜻하고 재미있고 나를 예뻐하는 삼촌이 있다는 건 참 멋진 일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들과 북적이며 살았던 덕분에 타닥이며 돌아가는 전축판에서 해바라기, 조동진의 노래를 들으며 자랄 수 있었던 것도, 돌이켜 보면 감사한 일이다. 어느 날 삼촌의 손을 잡고 나타난 여인을 봤을 때의 충격, 그 이후 삼촌에게 하나 둘 아이가 태어나면서 점점 멀어져간 조카 사랑, 이 모든 걸 웃음으로 떠올리는 지금의 나는, 그때의 삼촌보다 훌쩍 더 많은 나이, 네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글을 읽는 것, 글을 쓰는 것, 그게 삶이 되면 좋겠다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 2022. 2. 26.
지푸라기 한 올 가슴에 품고 살던 마음이 무거워 어디든 내려놓고 싶을 때 순간을 더듬어 살던 삶이 무거워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 마음이 붙잡는 지푸라기 한 올은 물 한 잔 글 한 줄 쪼그리고 앉으면 늘 곁을 내어주는 아무 말 없어도 좋은 풀과 나무는 오랜 벗님 풀잎과 풀잎 끝에 맺힌 물방울 한 알 하늘에 달 하나 작은 별 하나 하나여서 나처럼 외롭게 빛나는 하얗게 꺼져가던 가슴에 마른 장작 한 개비 같은 한 줄기 입바람 같은 지푸라기 한 올 2022. 2. 23.
참 빈 하나 그런데 하늘은 저 위에만 있지 않고 내 손끝에도 있고 내 발밑에도 있고 내 뼛속에도 있고 내 가슴속에도 있어서 내가 처음 시를 쓰려고 두 눈을 감았을 때 맨 처음 본 하늘은 온통 어둠과 혼돈이었는데 그리운 얼굴 하나 문득 한 점 별빛이 되었고 그런 밤하늘과 나란히 나도 한 점이었지 그런데 지금은 늘 있는 그대로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온통 크고 밝은 참 빈 하나의 방 뿐이다 침묵이 침묵으로 말하는 방 고독이 고독으로 숨쉬는 방 참 찾아 예는 길에 너무나 바라본 하늘 사무치도록 참을 찾아서 참든 내 맘에 참 빈 하나를 모신다 *참 빈 하나(다석 류영모의 詩에서 인용) 2022. 2. 21.
바람아 바람아 내가 걸어오느라 패인 발자국을 네가 슬어다오 바람아 내가 쌓아올리느라 가린 모래성을 네가 슬어다오 그리하여 내가 지나온 자리에 하늘만이 푸르도록 하늘 닮은 새순이 돋아나도록 2022. 2. 20.
"손 좀 잡아줘" 했을 때 길을 걷는데 멈추어 서 있는 한 사람이 인사도 없이 설명도 없이 모르는 나에게 "손 좀 잡아줘"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나도 모른 새 손을 내밀고 있다 내 손바닥을 꼭 잡으며 끙 누르길래 나도 손에 힘을 주어 하늘처럼 떠받쳤다 우리의 손과 손을 이어준 것은 한 턱의 계단이었다 그제서야 할머니는 입을 여신다 "여어를 못 올라가가, 고마워!" 하시며 할머니는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시고 나도 순간 미소를 보인 후 걷던 길을 다시 걷다가 한낮의 거리에서 오고가는 사람들 그 중에서 다리가 아픈 할머니에게 선택받은 어딘가 모르게 편안한 한 사람이 되기까지 한순간 비춰졌을 나의 얼굴과 차림새와 나의 속마음과 나만 아는 신념과 혼자서 묵묵히 걸어온 나의 인생길을 되돌아보았다 방금 나에게 일어난 일이란 레드카펫을 .. 2022. 2. 18.
내 마음의 대지에는 아파트가 없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사람의 집이 재산이 된다는 그런 아파트가 내 마음의 대지에는 없다 머리 위에는 곧장 하늘이 있어서 지붕 위 별을 그리며 순하게 잠이 드는 집 발 밑에는 바로 땅이 있어서 제 발로 서서 땅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집 한 그루 나무처럼 사람의 집이 그대로 삶이 되는 저 혼자서도 묵묵히 시가 되는 사람의 집이 그리워 허름하고 볼품 없는 집이라도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한 그루 나무처럼 서 있는 그런 사람의 집이 좋아서 2022. 2. 16.
풀씨의 소망 언제쯤 놓여날 수 있을까 이 풍요의 굴레로부터 누가 처음 뿌려 놓은 헛된 씨앗일까 이제는 까마득해진 한 점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의 씨앗이 흩뿌려진 이 탐진치의 세상 가슴팍을 파헤치며 쉼없이 굴러가는 이 풍요와 기복의 두 바퀴로부터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이 기복의 족쇄로부터 풍요는 가난이 주는 간소함의 만족을 모른다 기복은 침묵이 주는 안식의 기도를 모른다 나의 소원은 크고 먼 내일에 있지 않아 나의 소원은 작고 소박한 오늘에 있지 내려앉는 곳이 고층 아파트가 아니기를 떨어진 바닥이 아스팔트 도로가 아니기를 다만 내려앉아 발 닿은 땅이 사이 좋은 흙과 돌밭이기를 오늘 내가 앉은 이 땅에서 한 톨의 씨앗으로 돌아가 평화의 숨으로 마음밭에 뿌리를 내리며 제 발로 서서 바람 없는 날에도 저절로 흔.. 2022.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