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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법칙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1) 생명의 법칙 - 「농사잡기」, 1934년 9월 -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하루하루 바삐 뛰며 지내다보니 먹거리로 받은 고구마 한 무더기를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다. 구석에서 존재감 없이 있다가 버려지려고 열매로 영근 생명이 아닐 텐데, 어느 날 문득 대청소 중에 발견하고 살펴보니 꼴이 말이 아니다. 건조한 날씨에 빼빼 물기 마른 모습으로, 도려내어 먹기에는 고구마 싹들이 군데군데 너무나 많이 나와 있었다. 빠르게 내 머리를 스치고 간 생각, 그냥 버려? 자칫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향할 뻔한 고구마 열 덩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미안한 생각이 들어, 얼른 베란다 한 귀퉁이 큰 바구니에 담고 물을 부어 놓았다. 그러고는 또 하루씩 살아내느라 그 일조차 잊고 지내기를 열흘 쯤.. 2015. 5. 31.
‘그분의 정원’으로 통하는 문 한종호의 너른마당(22) ‘그분의 정원’으로 통하는 문 인간의 목숨은 언젠가 끝이 있습니다. 몸은 늙고 더는 기운이 없어 무너져 갑니다. 그 몸에 담아 둔 영혼은 그래서 몸에 더 이상은 머무를 수 없게 됩니다. 살아생전 몸이 태어나 자라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영혼도 함께 자라나고 변모하지만 몸에 끝이 오면 영혼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그 이후 그 영혼이 계속 성장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몸과 더불어 자란 만큼만 성장해서 그 영원한 운명을 살아가게 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의지하자면, 그 다음에는 지금의 몸이 아닌 다른 몸을 입고 살아갈 테니 역시 영혼도 새로운 차원의 성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시간은 .. 2015. 5. 29.
민들레 한희철의 두런두런(10) 민들레 - 동화 - “얘들아, 오늘은 엄마가 너희들에게 중요한 얘기를 들려줄게.” 엄마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낮고 차분합니다. “뭔데요, 엄마?” 엄마 가슴에 나란히 박혀 재잘거리던 씨앗들이 엄마 말에 모두들 조용해졌습니다. “머잖아 너희들은 엄마 곁을 떠나야 해. 제각각 말이야.” “엄마 곁을 떠나야 한다고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씨앗들이 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래. 너희들은 떠나야 해. 떠날 때가 되었어. 보아라. 너희 몸은 어느새 까맣게 익었고, 너희들의 몸엔 하얀 날개가 돋았잖니?” 엄마 곁을 떠나야 한다는 말에 모두들 놀란 얼굴이 되었습니다. “싫어요, 엄마. 우린 언제나 엄마랑 함께 살 거예요.” “우리들끼리도 헤어져야 한다니 너무 무서워요.” “엄마 곁을 떠나.. 2015. 5. 28.
십브라와 부아, 목숨 걸고 아이들을 지키다(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20) 십브라와 부아, 목숨 걸고 아이들을 지키다(1) 1. 어머니들의 어머니. 오늘은 아이를 낳은 어머니들보다 더 어머니다운 그런 여인들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2. 출애굽기는 이다. 한글 개역성경은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출애굽기 1:1)로 번역하는데, 히브리어 문장은 “이것들이 이름들이다”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열두 아들 이름을 열거하는데, 이 이름의 책 출애굽기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이름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은 무엇인가? 3. “바로”(11절)는 이름이 아니고 왕을 가리키는 직함이다. 그리고 “모세”라는 이름은 2장 10절에 가서야 나온다. 성경기자는 모세.. 2015. 5. 28.
아무도 흔들 수 없는, 궁극의 위로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21) 아무도 흔들 수 없는, 궁극의 위로 피조물의 위로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것에는 무언가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위로는 순수하고 잡스러운 것이 섞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벽하고 완전합니다. 지난 겨울에는, 교우 중에 한 분이 참척의 아픔을 겪었다. ‘참척’이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은 일을 말하는 것. 나는 교우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교우 딸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 영안실로 향했다. 교우의 딸은 막 대학원을 졸업한 장래가 촉망되는 공학도였다. 나는 그가 장기에 퍼진 암으로 죽기 전에 몇 차례 대면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직 앳된 얼굴에 영혼의 해맑음이 어려 있었다. 병원 지하의 썰렁한 영안실, 교우는 얼마나 울었는지 얼.. 2015. 5. 28.
종교학-신학-교학 어떻게 만날까?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2) 종교학-신학-교학 어떻게 만날까? 철지난 과제? “종교학-신학-교학 어떻게 만날까?”는 사실 낡은 물음이요 철지난 과제이기도 하다. 1870년 영국 왕립연구소에서 막스 뮐러(Friedrich Max Müller, 1823~1900)가 새로운 정신과학으로서 종교학(science of religion)을 선언할 때 이미 저 물음은 뜨거운 이슈였고, 그때가 이미 백 년도 더 된 옛날이다. 뮐러의 선언적 작업 이후 많은 초기 종교학자들이 독립학문으로서 종교학의 자립을 위해 모학문이랄 수 있는 신학, 교학과의 자리매김과 역할 분담을 위해 가열하게 경쟁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 결과 지금 종교학은 종교를 연구하는 경험학문으로 나름대로 학문적 입장을 정리했고, 신학이나 교학에.. 2015. 5. 28.
이삭이 겪은 트라우마 곽건용의 짭조름한 구약 이야기(15) 이삭이 겪은 트라우마 1. 10여 년 전에는 1950년대에 태어나 1970년대에 대학을 다닌 40대를 가리켜서 ‘낀 세대’(in-between generation)라고 불렀다. 한국사회 여러 분야에서 맹활약을 벌이던 386세대에 밀렸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기억한다. ‘낀 세대’가 기분 좋은 말일 수는 없다.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 사이에 끼어서 제 역할 못하는 세대란 느낌을 주니 말이다. 내가 바로 그 세대다. 이삭을 가리켜 ‘낀 족장’(in-between patriarch)라고 부르면 그도 기분 좋을 리 없겠다. 그에 대한 전승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양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훨씬 많은 아브라함과 야곱 전승에 묻혀 있으니 ‘낀 세대’란 이름이 틀렸다고 볼 수는.. 2015. 5. 28.
폐허의 잔해 위의 남은 사랑 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9) 폐허의 잔해 위의 남은 사랑 - 인간들은 잔인하고 인간들은 친절하다(라빈드라나드 타고르) - 설교자에도 비관적인 설교자가 있고 낙관적인 설교자가 있다고 한다. 나는 점점 비관적인 설교자가 돼 가는 나를 본다. 물론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비관적인 사람은 아니다. 나는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름 상당한 낙관적 행운을 누려 왔다. 감사하게도 극단적으로 혹독한 지경에 떨어진 적이 없었다. 어려움이야 늘 있었지만, 가령 내 아버지처럼 오늘이라는 날의 참담함 때문에 내일을 맞는다는 게 상상이 안 되는 절망 가득한 삶의 굴곡을 육체에 걸머지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나보다 젊은 나이에 세 명의 어린 자녀를 잃는 참척을 당하셨다. 사람들이 더러.. 2015. 5. 24.
비진리가 진리를 대하는 태도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0) 비진리가 진리를 대하는 태도 - 「공포의 심리」 1940년 8월 - 일제치하 어느 순간인들 어렵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겠는가. 허나, 1940년이 접어든 시점은 김교신 스스로도 ‘이 곤란한 시대’라고 명명할 만큼 반(反)생명적 식민주의의 힘이 폭력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던 당시였다. 약 12년을 몸담고 있었던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사직한 것이 1940년 봄(3월 22일)이었고, 같은 해 9월에 경기중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으나 ‘불온한 인물’로 주목받다가 6개월 만에 추방되었다. 1941년 10월에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부임할 때까지 또다시 수개월 교사생활을 쉬었고, 결국 ‘성서조선사건’으로 투옥된 것이 1942년 3월이니, 나라도 나라이거니와 ‘교직을 천직’으로 여.. 2015. 5.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