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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누이의 새벽기도 새벽기도회, 대개가 서너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 그날도 그랬다. 적은 인원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뒷문이 열렸다. 보니 승학이가 들어온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아이다. 그러더니 그 뒤를 이어 승혜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들어온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승학이 동생이다. 엄마 잠바를 걸치고 온 것이 쑥스러웠나 보다. 두 어린 오누이의 새벽예배 참석. 난롯가에 나란히 앉아 무릎을 꿇는 그들을 보고 난 잠시 말을 잊고 말았다. 저 아이들, 무슨 기도를 무어라 할까. 순간, 입가 가득 번지는 주님의 웃음이 보일 듯 했다. 어린이들 별나게 좋아하셨던 그분이셨기에. 1988년 2021. 5. 28.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기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 (시 84:5-7)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5월 말인데도 며칠 선득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사무실에 장시간 앉아 있다가 몸이 차가워졌다 느끼면 화단에 나가 볕바라기를 합니다. 꽃들의 향연에 슬며시 끼어들어 벌들처럼 코를 벌름거리기도 합니다. 꽃은 싫은 내색조차 없이 자기 향기를 나눠줍니다. 나눠주고 나면 텅 비어 버릴까 걱정스럽지만, 향기 창고가 비는 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따금씩 날아와 이 꽃 저 꽃 문을 .. 2021. 5. 28.
흐린 날의 日記 우스운 일이다 피하듯 하늘을 외면했다 무심코 나선 거리 매운바람 핑곌 삼아 고갤 떨궜다 구석구석 파고들어 살갗 하나하나를 파랗게 일으켜 세우는 무서운 추위 그 사일 헤집는 매운바람 잔뜩 움츠러들어 멋대로 헝클어져 그게 바람 탓이려니 했다 가슴속 어두움도 잿빛 하늘 탓이려니 했다 우리 거짓의 두께는 얼마만한 것인지 우린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 건지 걷고 걸어도 벗어날 수 없는 거리 쉬운 祝祭 네가 보고 싶어 이처럼 흔들릴수록 네가 보고 싶어 뭐라 이름 하지 않아도 분명한 이름 구체적인 흔들림과 장식 없는 쓰러짐 그 선명한 軌跡 목 아래 낀 때를 네게 보이며 난 네 吐瀉物이 보고 싶은 거야 바람 탓이 아니다 추위 탓이 아니다 잔뜩 움츠러들어 멋대로 헝클어져 어둠속 서로를 알아볼 수 없는 우리들은 1988년 2021. 5. 27.
눈 앞에 있는 그 사람을 보세요 “방앗간 참새 왔어~!” 길 건너 덕리에 사는 권 씨 할아버지의 약국 문 여는 소리다. 스스로 참새가 되신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어느새 방앗간의 주인이 된다. 82세의 권할아버지는 산 밑의 오래된 옛집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6남매를 낳고 키운 오래된 집은 늙은 부부의 거친 피부처럼 누런 빛깔을 띠고 여기저기 주름과 틈이 생겼으며 검은 그름이 나이테처럼 쌓여있다. “아부지 오셨어요! 때마침 커피타임인데 아부지도 한잔 허실라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그려, 한잔 줘 바. 개미다방 미스리보다 나을라나?”로 되받아 치신다. 몇 해 전부터 치매를 앓고 계신 할머니가 요즘은 밭도 아닌 밭 비탈에 앉아 하루 종일 풀을 뜯는데 말려도 안 듣는다는 하소연부터 뒤뜰에 심겨진 감나무에 감이 얼마나 열렸는지 등 그저 .. 2021. 5. 27.
펼치다 펼치다 책의 양 날개를 두 손의 도움으로 책장들이 하얗게 날갯짓을 하노라면 살아서 펄떡이는 책의 심장으로 고요히 기도의 두 손을 모은다 느리게 때론 날아서 글숲을 노닐다가 눈길이 머무는 길목에서 멈칫 맴돌다가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본다 내 안으로 펼쳐지는 무한의 허공을 가슴으로 불어오는 자유의 바람이 감당이 안 되거든 날개를 접으며 도로 내려놓는다 날개를 접은 책 책상 위에 누워 있는 책이지만 아무리 내려놓을 만한 땅 한 켠 없더래도 나무로 살을 빚은 종이책 위에는 무심코 핸드폰을 얹지 않으려 다짐한다 내게 남은 마지막 한 점의 숨까지 책과 자연에 대하여 지키는 한 점의 의리로 하지만 내게 있어 책은 다 책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이란 돈 냄새가 나지 않는 책 탐진치의 냄새가 나지 않는 책을 .. 2021. 5. 27.
실천 아랫말인 단강리에 살고 계신 분 중에 한호석 씨라는 분이 계시다. 부론에 나가면 자주 만나게 되는데 만나면 시간이 얼마건 꼭 차를 사신다. 한문은 물론 동양사상이나 고전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셔서 배울 게 많은 분이다. 얼마 전엔 흥호리에서 버스를 같이 타게 되었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분은 ‘실천‘이란 말의 뜻을 풀이해 주었다. ‘實踐‘이란 말의 본래 뜻은 ’하늘 어머니‘(宀+母)가 주신 보물(見)을 두 개의 창날(戈戔) 위를 맨발(足)로 지나가듯 조심스레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쉽게 자주 말해왔던 실천이란 말 속에 참으로 귀한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창날 위를 맨발로 걷듯 조심스레 하늘 뜻을 행하는 것.‘ 말로 신앙을 팔아 버리기 잘하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귀한 교훈일까... 2021. 5. 26.
박모종 좋아요 참 좋아요 너무 좋아요 우리집 마당 돌담 밑에는 엄니가 딸을 위하여 어렵사리 구해오신 올해만 세 번째로 여차저차 이렇게 심어 놓으신 어린 박모종이 살고 있어요 정말 좋아요 비가 오는 날도 좋아요 해가 쨍한 날도 좋아요 아무리 외롭고 쓸쓸한 저녁답이라도 하얗고 순한 박꽃은 새벽답까지 어둠과 나란히 밤길을 걸어가는 다정한 길벗이 되어주지요 초여름부터 둥근 박이 보름달을 닮아 익어가는 늦가을까지 하루도 어김없이 박꽃은 하얗고 순한 얼벗이 되어주지요 고마워요 참 고마워요 너무 고마워요 2021. 5. 26.
한 음의 빗소리 구름이 운을 띄우면 하늘이 땅으로 빗줄기를 길게 드리우고 무심히 지나던 바람이 느리게 현을 켠다 낮아진 빗소리는 풀잎들의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로 작아진 빗소리는 거룩한 이마에 닿는 세례의 손길로 땅에 엎드려 울음 우는 모든 생명들을 어르고 달래는 공평한 선율로 낮게 흐르는 한 음의 빗소리에 기대어 가슴으로 깊고 긴 침묵이 흐른다 2021. 5. 25.
산과 강 어느 날 산이 강에게 말했다. “네가 부럽구나, 늘 살아 움직이는 게.” 그러자 강이 산에게 대답했다. “나는 네가 부러워. 한 자리 변함없는 게.” 1988년 2021.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