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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아랫말인 단강리에 살고 계신 분 중에 한호석 씨라는 분이 계시다. 부론에 나가면 자주 만나게 되는데 만나면 시간이 얼마건 꼭 차를 사신다. 한문은 물론 동양사상이나 고전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셔서 배울 게 많은 분이다. 얼마 전엔 흥호리에서 버스를 같이 타게 되었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분은 ‘실천‘이란 말의 뜻을 풀이해 주었다. ‘實踐‘이란 말의 본래 뜻은 ’하늘 어머니‘(宀+母)가 주신 보물(見)을 두 개의 창날(戈戔) 위를 맨발(足)로 지나가듯 조심스레 지키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쉽게 자주 말해왔던 실천이란 말 속에 참으로 귀한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창날 위를 맨발로 걷듯 조심스레 하늘 뜻을 행하는 것.‘ 말로 신앙을 팔아 버리기 잘하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귀한 교훈일까... 2021. 5. 26.
박모종 좋아요 참 좋아요 너무 좋아요 우리집 마당 돌담 밑에는 엄니가 딸을 위하여 어렵사리 구해오신 올해만 세 번째로 여차저차 이렇게 심어 놓으신 어린 박모종이 살고 있어요 정말 좋아요 비가 오는 날도 좋아요 해가 쨍한 날도 좋아요 아무리 외롭고 쓸쓸한 저녁답이라도 하얗고 순한 박꽃은 새벽답까지 어둠과 나란히 밤길을 걸어가는 다정한 길벗이 되어주지요 초여름부터 둥근 박이 보름달을 닮아 익어가는 늦가을까지 하루도 어김없이 박꽃은 하얗고 순한 얼벗이 되어주지요 고마워요 참 고마워요 너무 고마워요 2021. 5. 26.
한 음의 빗소리 구름이 운을 띄우면 하늘이 땅으로 빗줄기를 길게 드리우고 무심히 지나던 바람이 느리게 현을 켠다 낮아진 빗소리는 풀잎들의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로 작아진 빗소리는 거룩한 이마에 닿는 세례의 손길로 땅에 엎드려 울음 우는 모든 생명들을 어르고 달래는 공평한 선율로 낮게 흐르는 한 음의 빗소리에 기대어 가슴으로 깊고 긴 침묵이 흐른다 2021. 5. 25.
산과 강 어느 날 산이 강에게 말했다. “네가 부럽구나, 늘 살아 움직이는 게.” 그러자 강이 산에게 대답했다. “나는 네가 부러워. 한 자리 변함없는 게.” 1988년 2021. 5. 25.
눈물겨움 이따금씩, 뜻도 없이 눈물겨울 때가 있다. 서울 종로서적 앞, 일찍 내려진 셔터에 몸을 기대고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오가는 사람들, 정말 많은 사람들, 멍하니 그들 바라보다가 불쑥 시야가 흐렸었다. 언젠가의 졸업식. 축하할 사람 만나지도 못한 채 한쪽 구석 햇볕 쬐며 잔디밭에 앉아 사람들 구경하다가 그때도 이유 없이 눈물이 솟았다. 저녁 어스름 코트 깃 세우고 서둘러 귀가하다가 문득 바라본 2층 양옥집. 불 켜진 방 한 개 없었고 빨래만 2층에서 펄럭이고. 그때도 그랬다. 한참을 서 있었다. 얼마 전 수원을 다녀오며 차창 밖, 미친 듯 휘날리는 춘설을 보면서도 ‘살아야지, 살아야지’ 확 치민 뜨거움에 또 눈이 젖었었다. 무심히 창문만 닦았다. 동부연회 마지막 날. 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목사.. 2021. 5. 24.
터치폰과 지평 어느 날 보니 검지손가락이 아렸다 왜 그런지 몇 날 며칠 몸속을 샅샅히 돌며 역학조사를 해보니 통증의 원인은 터치폰 늘상 검지손가락만 쓴 것이다 안 되겠다 싶어 무딘 가운뎃손가락과 약지를 조심스레 써 보았다 이처럼 새로운 손가락을 쓰는 일은 몸이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넓혀 가는 일 그래도 새끼손가락은 먼 곳 아직은 미지의 땅 그러는 동안 가장 튼튼한 엄지손가락은 뭘 하고 있는지 문득 보았더니 언제나 빈 공간에서 홀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땅에는 머리 둘 곳 없어 깊고 푸른 하늘로 둔 꽃처럼 2021. 5. 24.
을(乙)의 지형학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5) 을(乙)의 지형학 -「조선지리소고」 1934. 3 - 김교신의 전공은 ‘지리 박물’이었다. 1927년 4월 함흥의 영생여자고등학교를 첫 부임지로 하여 이후 양정고등학교, 경기중학교, 그리고 마지막 송도고등학교까지 약 15년 간 강단에 섰다. 양정에서의 12년이 가장 긴 시간이었고, 늘 ‘사상이 의심된다’거나 ‘불온하다’는 눈초리를 받다 결국 1942년 으로 투옥되면서 교사 생활을 완전히 접게 되었다. 그에게서 ‘지리 박물’을 배운 학생들은 회고하기를 그저 딱딱한 지형에 대한 수업이 아니었다고 했다. 특히나 한국 지리를 배울 때면 각 지역에 얽힌 조상들의 얼을 함께 가르쳤으며, 일제가 한글 수업을 금지했음에도 당당하게 조선말로 조선혼을 심어주셨다고 전한다. ‘무레사.. 2021. 5. 23.
낙태와 나태 “우리가 낙태 되지 않게 지켜 주옵소서.” 안갑순 속장님은 당신 기도 차례가 되면 한 주를 어렵게 보냅니다. 희미해진 기억력, 순간순간 끊어지는 생각들, 갈수록 기도의 책임이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똑똑 드물게 떨어지는 물을 받아 병 하나 채우듯 새벽녘 깨어 그나마 정신이 맑을 때 한 두 줄 기도문을 적고, 그 한 주 분의 기도를 모아 제단에 섭니다. 속장님의 기도 속에 자주 들어가는 내용이 ‘우리를 낙태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낙태는 나태의 잘못된 표기일 것입니다. 쓰기도 그렇게 쓰고, 읽기도 그렇게 읽지만 속장님이 드리는 기도의 뜻은 ‘나태’일 것입니다. 그런 단어의 혼돈쯤이야 너그러우신 하나님께서 바로 잡아 들으시겠지요. 나태를 낙태로 써서 읽는 속장님의 기도를 들을 때마다 사실 가슴이 찡.. 2021. 5. 23.
돌아보니 새벽 세 시, 환갑을 맞은 변학수 씨의 축하예배가 새벽 3시로 정해졌습니다. 일단 잔치가 시작되면 손님들이 끊이질 않는지라 예배드릴 시간이 마땅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지집사님이 아예 시간을 새벽으로 잡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부터 드리고 시작하겠다는 믿음에서였습니다. 너무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그 새벽에 우리는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환갑을 맞기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축하의 말을 하던 집안 어른이 나무장사 얘길 했습니다. 변학수 씨가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왔던 방책은 나무장사였습니다. 허리가 휘도록 나뭇단을 내다 팔아 그나마 어려운 생계를 이어왔던 것입니다. 일제에, 6.25에, 보릿고개에 모질고 험한 세월 살아왔지만 .. 2021.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