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2664 눈물겨움 이따금씩, 뜻도 없이 눈물겨울 때가 있다. 서울 종로서적 앞, 일찍 내려진 셔터에 몸을 기대고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오가는 사람들, 정말 많은 사람들, 멍하니 그들 바라보다가 불쑥 시야가 흐렸었다. 언젠가의 졸업식. 축하할 사람 만나지도 못한 채 한쪽 구석 햇볕 쬐며 잔디밭에 앉아 사람들 구경하다가 그때도 이유 없이 눈물이 솟았다. 저녁 어스름 코트 깃 세우고 서둘러 귀가하다가 문득 바라본 2층 양옥집. 불 켜진 방 한 개 없었고 빨래만 2층에서 펄럭이고. 그때도 그랬다. 한참을 서 있었다. 얼마 전 수원을 다녀오며 차창 밖, 미친 듯 휘날리는 춘설을 보면서도 ‘살아야지, 살아야지’ 확 치민 뜨거움에 또 눈이 젖었었다. 무심히 창문만 닦았다. 동부연회 마지막 날. 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목사.. 2021. 5. 24. 터치폰과 지평 어느 날 보니 검지손가락이 아렸다 왜 그런지 몇 날 며칠 몸속을 샅샅히 돌며 역학조사를 해보니 통증의 원인은 터치폰 늘상 검지손가락만 쓴 것이다 안 되겠다 싶어 무딘 가운뎃손가락과 약지를 조심스레 써 보았다 이처럼 새로운 손가락을 쓰는 일은 몸이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넓혀 가는 일 그래도 새끼손가락은 먼 곳 아직은 미지의 땅 그러는 동안 가장 튼튼한 엄지손가락은 뭘 하고 있는지 문득 보았더니 언제나 빈 공간에서 홀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땅에는 머리 둘 곳 없어 깊고 푸른 하늘로 둔 꽃처럼 2021. 5. 24. 을(乙)의 지형학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5) 을(乙)의 지형학 -「조선지리소고」 1934. 3 - 김교신의 전공은 ‘지리 박물’이었다. 1927년 4월 함흥의 영생여자고등학교를 첫 부임지로 하여 이후 양정고등학교, 경기중학교, 그리고 마지막 송도고등학교까지 약 15년 간 강단에 섰다. 양정에서의 12년이 가장 긴 시간이었고, 늘 ‘사상이 의심된다’거나 ‘불온하다’는 눈초리를 받다 결국 1942년 으로 투옥되면서 교사 생활을 완전히 접게 되었다. 그에게서 ‘지리 박물’을 배운 학생들은 회고하기를 그저 딱딱한 지형에 대한 수업이 아니었다고 했다. 특히나 한국 지리를 배울 때면 각 지역에 얽힌 조상들의 얼을 함께 가르쳤으며, 일제가 한글 수업을 금지했음에도 당당하게 조선말로 조선혼을 심어주셨다고 전한다. ‘무레사.. 2021. 5. 23. 낙태와 나태 “우리가 낙태 되지 않게 지켜 주옵소서.” 안갑순 속장님은 당신 기도 차례가 되면 한 주를 어렵게 보냅니다. 희미해진 기억력, 순간순간 끊어지는 생각들, 갈수록 기도의 책임이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똑똑 드물게 떨어지는 물을 받아 병 하나 채우듯 새벽녘 깨어 그나마 정신이 맑을 때 한 두 줄 기도문을 적고, 그 한 주 분의 기도를 모아 제단에 섭니다. 속장님의 기도 속에 자주 들어가는 내용이 ‘우리를 낙태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낙태는 나태의 잘못된 표기일 것입니다. 쓰기도 그렇게 쓰고, 읽기도 그렇게 읽지만 속장님이 드리는 기도의 뜻은 ‘나태’일 것입니다. 그런 단어의 혼돈쯤이야 너그러우신 하나님께서 바로 잡아 들으시겠지요. 나태를 낙태로 써서 읽는 속장님의 기도를 들을 때마다 사실 가슴이 찡.. 2021. 5. 23. 돌아보니 새벽 세 시, 환갑을 맞은 변학수 씨의 축하예배가 새벽 3시로 정해졌습니다. 일단 잔치가 시작되면 손님들이 끊이질 않는지라 예배드릴 시간이 마땅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지집사님이 아예 시간을 새벽으로 잡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부터 드리고 시작하겠다는 믿음에서였습니다. 너무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그 새벽에 우리는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환갑을 맞기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축하의 말을 하던 집안 어른이 나무장사 얘길 했습니다. 변학수 씨가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왔던 방책은 나무장사였습니다. 허리가 휘도록 나뭇단을 내다 팔아 그나마 어려운 생계를 이어왔던 것입니다. 일제에, 6.25에, 보릿고개에 모질고 험한 세월 살아왔지만 .. 2021. 5. 22. 물의 올바름 풀잎에는 큰 이슬이 풀씨에는 작은 이슬이 비와 바람에 쪼개지고 쪼개져도 무심한 발길에 터지고 터져도 언제 어디서나 마지막 한 점이 되는 순간까지 삿됨도 모남도 없이 제 자신을 추스를 줄 아는 둥근 지구를 닮은 물의 올바름 풀잎에는 큰 이슬이 풀씨에는 작은 이슬이 2021. 5. 22. 새벽 응급실 주보를 만들고 늦은 밤 잠이 들었는데 얼마나 잤을까, 전화벨 소리가 울려 놀라 깼다. 부인의 상태가 심상치 않으니 급히 병원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한 교우의 전화였다. 확 잠 달아난 눈으로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이럴 땐 차가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비가 쏟아져 내리고 안개가 자욱한 한 새벽. 한치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손으로 숲속 나무를 헤치듯 어둠과 안개 속을 달려야 했다. 응급실은 그 시간에도 번잡했다. 온갖 환자들의 고통스런 모습과 피곤 가득한 얼굴이면서도 긴박하게 돌아가는 의료진, 수속 밟으랴 간호하랴 분주한 환자의 가족들,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넓은 응급실 병실과 복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위급한 상황이 아니었다. 약간의 응급처치가 있은 후 어느.. 2021. 5. 21. 막막함을 몰아내 주소서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 8:26)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절기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주일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요 14: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는 주님의 영에 힘입어 그리스도께서 앞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갈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한 시대이기에 우리는 더욱 영들을 분별하는 지혜를.. 2021. 5. 20. 어우러지는 춤 시편 6편 8, 9절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공동번역》) 我泣主已聞 我求主已聽(아읍주이문 아구주이정) 有禱必見納 有感豈無應(유도필견납 유감기무웅) 이내 울음소리 이미 들으셨고 이내 간구 애저녁에 받으셨으니 님께 바친 기도 어찌 아니 받으시고 응답하지 않으시랴(《시편사색》, 오경웅) 인생이 드리는 눈물의 호소와 하느님의 들으심 사이의 간격은 얼마나 될까요? 간구하는 처연함과 긍휼한 귀기울이심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요? 인생이 시간의 바늘 위에 섰는지라 간구와 응답 그 사이에 간격이 있는 것처럼 말할 수 밖에 없지만, 시간을 넘어 계신 하느님의 응답은 그 간격을 넉넉히 허무시지 않을까요? 이내 울음소리 이미 들으셨고 이내 간구 애저녁에 받으셨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이.. 2021. 5. 20. 이전 1 ··· 54 55 56 57 58 59 60 ··· 29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