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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객 한희철의 얘기마을(117) 낯선 객 산이 불씨를 품었다.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이 골짝 저 능선 붉은 기운이 번져간다. 한꺼번에 펼쳐서는 안 될, 천천히 풀어 놓아야 할 그리움인 냥, 안으로 붉음을 다스린다. 자기 몸을 불살라 가장 눈부신 모습으로 자기를 키운 대지 품에 안기는, 기꺼이 순응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보아주는 이, 눈길 주는 이 없어도 뿌리 내린 곳 어디라도 꽃을 피워 올리는 들꽃이 아름답다. 연보랏빛 들국화와 노란 달맞이꽃, 길가 풀섶의 달개비꽃과 강가의 갈대잎, 저마다의 빛깔과 모양으로 피어나 찾아온 계절 대지를 수놓는다. 선선한 바람과는 달리 햇살이 따뜻하다. 한 올 한 올 손에 잡힐 뜻 나뉘어 내리는 햇살이 마음껏 가을을 익힌다. 텃밭에서 통이 커가는 배추하며 알 굵은 무, 산다락 .. 2020. 10. 17.
사탕 한희철의 얘기마을(116) 사탕 가까운 친구 주명이가 죽은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토요일 오후 우리는 저수지로 향했다. 고기, 우렁, 조개를 잡을 수 있고 수영도 할 수 있는 곳, 학교에선 가지 말라 금하였지만 철길 넘어 저수지는 어린 우리에겐 얼마나 신나는 곳이었던지. 갈 때마다 그러했듯 그날도 모두들 신나게 놀았다. 저녁 무렵, 집으로 오려고 철교 아래 모였는데 주명이가 보이질 않았다. 오리를 잡는다고 물로 들어갔다는데, 그 뒤론 모두들 모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입을 모아 주명이를 불렀다. 목이 쉬도록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도 나오지도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때가 저녁, 통근 기차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친구 한 명과 나는 숨이 멎도록 기차역으로 달려가 퇴근해 돌아오는 주명이 형에게 그 사.. 2020. 10. 16.
고독의 방 신동숙의 글밭(255) 고독의 방 가슴으로 쓸쓸한 바람이 불어옵니다못 견디게 시리도록 때론 아프도록 바로 이때가 고독의 방이 부르는영혼의 신호 사람을 찾지 않고 홀로 침잠하는 날숨마다 날 지우며시공간(時空間)을 잊은 無의 춤 처음엔 온통 어둠이었고 언제나 냉냉하던 골방입니다 홀로 우두커니 선 듯 앉은 듯 추위에 떨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저 멀리 반짝이는 한 점 별빛그 별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그 먼 별이 살풋 짓는 여린 미소에 가슴 속 얼음이 녹아 눈물로 흐르면 흘러가기를 목마른 곳으로 골방에 나보다 먼저 다녀간 이가 있었는지아궁이에 군불이라도 지폈는지 훈훈한 온기가 감돕니다 문득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아.. 이제는 고독의 방으로 드는 일이 견딜만합니다 고요히 머무는 평온한 침묵의 방.. 2020. 10. 16.
오토바이를 버리라고요? 한희철의 얘기마을(115) 오토바이를 버리라고요? 목사님, 먼저 저의 이런 못난 처신을 용서하십시오. 언젠가 목사님은 목사님이 펴내시는 주보를 통해 “그대의 오토바이를 당장 버리시오”라고 호령하신 적이 있습니다. “흙 가운데 살면서, 흙의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어쩌자고 그 괴물을 타고 흙길 가운데를 질풍처럼 달리느냐.”고 하셨습니다. 본시 사람이란 흙 밟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목사님이 주시고자 했던 말씀이셨죠. 이어 보내신 편지에서도 다시 한 번 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흙 같은 가슴들일랑 흙가슴으로 만나야 한다고요. 처음 목회 떠나왔을 땐 말씀대로 걸었습니다. 걸을 수밖에 없기도 했고요. 뱀처럼 늘어진 길을 땀으로 목욕하며 걷기도 했고요, 아픈 아기를 안고 그냥 비를 맞고 걸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2020. 10. 15.
풀어주세요 신동숙의 글밭(254) 풀어주세요 천장의 눈부신 조명 위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창문틀 너머로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시멘트 바닥 아래 흙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벽돌 우리에 갇혀 매여 있는 나를 풀어주세요 안락이라는 족쇄에 묶여 꼼짝 못하는천국이라는 재갈을 입에 물고 말 못하는 몸 속에 갇힌 나를 풀어주세요 2020. 10. 15.
사과를 깎아 먹는 일과 詩 신동숙의 글밭(255) 사과를 깎아 먹는 일과 詩 사과를 처음으로 스스로 깎아 먹었던 최초의 기억은 일곱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녁 무렵 작고 여린 두 손으로 무거운 사과를 거의 품에 안다시피 받쳐 들고서, 언덕처럼 세운 양무릎을 지지대 삼아, 오른손엔 과도를 들고 살살살 돌려가며 한참을 씨름하던 나의 모습이 생각난다. 한참을 사과와 과일칼과 씨름하며 그리고 엉성하게나마 다 해내기까지 앞에 앉아 숨죽이고 있던 엄마가 환하게 웃으시며 박수를 쳐주었던 기억이다. 그때부터 스스로 사과를 깎아먹는 역사는 시작되었고,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책임감의 문제도 그때로부터 시작이 된다. 이후에 감당해야 하는 일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날카롭고 겁나는 과도를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칼끝이 함께 둘러앉은 누군가에게.. 2020. 10. 14.
상처 한희철의 얘기마을(114) 상처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힘든 일이지 싶어 저녁 어스름, 강가로 나갔다.모질게 할퀸 상처처럼 형편없이 망가진 널따란 강가 밭, 기름진 검은 흙은 어디로 가고 속뼈처럼 자갈들이 드러났다. 조금 위쪽에 있는 밭엔 모래가 두껍게 덮였다.도무지 치유가 불가능해 보이는, 아물 길 보이지 않는 깊은 상처들.한참을 강가 밭에 섰다가 주르르 두 눈이 젖고 만다. 무심하고 막막한 세월.웬 인기척에 뒤돌아서니 저만치 동네 노인 한분이 뒷짐을 진 채 망가진 밭을 서성인다.슬그머니 자릴 피한다.눈물도 만남도 죄스러워서. - (1991년) 2020. 10. 14.
편지 한희철의 얘기마을(113) 편지 가끔씩 편지를 받습니다. 한낮, 하루 한 번 들리는 집배원 아저씨를 통해 신문을 비롯한 이런 저런 우편물들을 전해 받습니다. 그 중 반가운 게 편지입니다. 신문, 주보 등 각종 인쇄물 또한 적지 않은 읽을거리지만 편지만큼의 즐거움은 되지 못합니다. 찬찬히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가슴 속 쌓인 이야기를 전하는 정겨움을 어찌 다른 것에 비기겠습니까. ‘보고 싶은 ㅇㅇ에게’ 그렇게 시작되는 편지를 읽으면 산만했던 내가 하나로 모이고, 잊혔던 내가 되찾아져 맑게 눈이 뜨입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어느새 맘속으로 찾아와 더 없이 그리운 사람이 되어 나와 마주합니다. 가끔씩 편지를 씁니다. 군 생활할 때 정한 원칙 중 하나가 편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쓰진 못해도 최소한.. 2020. 10. 13.
목사님, 참선방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왔어요 신동숙의 글밭(254) 목사님, 참선방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왔어요 아침에 눈을 뜨니 가을 하늘이 참 좋아서, 이 아름다운 하늘을 오래도록 보고 싶은 한 마음이 산들바람처럼 불어옵니다. 그리고 보이는 하늘 만큼이나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펼쳐지는 내면의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은 한 마음이 잔잔한 물결처럼 일렁이는 가을 아침입니다. 구름처럼 자욱한 욕심을 걷어낸 텅빈 하늘, 무심한 듯한 공空의 얼굴은 어쩌면 사랑뿐인 하나님의 얼굴을 닮았는지도 모른다는 누군가의 얘기가 귀를 간지럽힙니다. 그냥 쪼그리고 앉아서 가만히 푸른 가을 하늘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면서 실실 웃음이 흘러나오는 이유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늘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은 하늘 만큼 땅 만큼입니다. 그처럼 맑갛게 갠 내면의 .. 2020.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