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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by 한종호 2017. 9. 24.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3)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깊은 산중으로 이어지는 길, 걸어도 걸어도 사람이 보이지를 않았다. 그런 외진 곳에 가게가 있을 리는 만무한 일이었고, 물 없이 길을 나선 나는 점점 심해지는 목마름을 어렵게 견뎌내야 했다. 원래 사람이 없는 곳인지, 날이 무더워 밖으로 나오지를 않은 것인지 한 사람을 만나기가 이렇게도 어려울 수가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정 안 되면 계곡물이라도 마셔야지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내 사람을,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길가 밭에서 한 중년의 남자가 일을 하고 있었다. 외진 곳에서, 목이 말라 고통스러울 때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반가울 줄이야.


“물 좀 마실 수가 있을까요?”


아마도 나는 “안녕하세요!”나 “수고하십니다.”라는 인사보다도 물 얘기를 먼저 한 것이 아닐까 모르겠다. 밭에서 돌을 골라내는 일을 하던 그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얼른 일손을 멈추고는 얼마든지 오라며 손으로 나를 불렀다.


그를 따라 들어간 곳은 허름한 농막이었다. 얼기설기 몇 개의 기둥이 서 있고 비닐과 천막으로 하늘과 벽을 가려 볕과 비를 겨우 가릴 수 있겠다 싶은 그곳에는 몇 개의 살림도구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산에서 떠온 물이라 뭐가 좀 떠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물은 좋은 물이예요.”


긴 목마름 끝에 마시는 물인데 어찌 달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는 염치도 없이 필시 산에서 어렵게 떠왔을 그 물을 서너 컵 연이어 받아 마셨다. 석 달 가뭄 끝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먼지를 적시듯이 고마운 마음으로 물을 마셨고, 물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목마름의 맨 밑바닥부터 채워오기를 시작했다. 시들어가던 식물이 물을 먹고 되살아나듯이 긴 목마름 끝에 물을 마시자 생기가 회복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느낌만이 아니어서,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낯선 길을 걷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 중의 하나는 생각하지 못한 만남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나와 연배가 비슷한 그 이가 왜 깊은 산중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를 들었고, 그는 내가 왜 먼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해서 들었다. 서로의 선택을 이해하며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가 이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마음이 아쉬웠다. 가야 할 길이 아직도 한참 남았으니 무한정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배낭을 메고 농막 밖으로 나올 때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엇 하는 분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목사라는 것을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알릴 일도 아니다 싶어 말하지 않은 터였다.


“저는 개신교 목사입니다.”


그러자 그가 말한다.


“어쩐지, 느낌이 남달랐어요.”


궁금하긴 했지만 남달랐다는 느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따로 묻지는 않았다. 목사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한 마디를 했다.


“실은 저도 이곳에 들어올 때 성경책 한 권을 가지고 들어왔어요. 틈틈이 읽고 있고요.”


걸음을 멈추고 더 많은 이야기를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이 순간적으로 지났지만, 그곳 주소와 그분 이름을 수첩에 적는 것으로 대신했다. 다시 한 번 뜻밖의 만남이 주어져 심중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시간이 은총처럼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낯선 길을 걷다보니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이 보였다. 저 많은 벌통을 두고 어디로 간 것인지 주인은 보이지를 않았다.


폭염주의보는 거의 날마다 날아왔다. 날이 뜨거우니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한결같은 내용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금 야외활동이 아니라 실내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나 스스로에게 아재개그를 건네며 불볕더위가 주는 고통과 염려를 물리고는 했다.


지친 이에게는 작은 고개 하나를 넘는 것도 벅찬 일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하며 파포(巴浦)와 봉오(峰吾)를 지나 그날의 목적지인 다목리를 향해 걸었다. 다목리는 작가 이외수 씨가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는 곳이다. 젊은 시절 그의 글을 눈여겨 읽기도 했으니 얼마든지 이외수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도 좋겠다 싶었지만, 그보다는 ‘다목리’가 왜 ‘多木里’가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다목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최종 목적지인 다목초등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사람을 찾았지만 역시 보이지를 않았다. 가다보면 사람을 만나든지, 아니면 표지판을 만나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길가 둔덕 위에 자리 잡은 동네 노인정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노인정 옆 정자에 한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으로 길을 물었다. 길을 가르쳐주던 그가 거기 서서 그러지 말고 올라와서 물이나 한 잔 하고 가라며 권했다. 쉬지 않고 내처 걸었더니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터라 시간의 여유도 있어 정자 위로 올라갔다.


허름하고 편안한 옷차림을 한 그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심마니였다. 혼자 깊은 산에 올라 약초를 캐는 심마니, 심마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 주로 그가 이야기를 했고 나는 들었지만 이야기는 재미도 있었고 유익하기도 했다. 전혀 모르는 세계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22년째 이어오고 있는 일이 있다. <교차로>라는 생활정보지 ‘아름다운 사회’란에 매주 한 편씩 칼럼을 쓴다. 전국 길가에 꽂혀 누구라도 꺼내보는 정보지, 세상과 신앙 사이에 다리를 놓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언젠가 한 번은 캐나다로 이민을 간, 우리 아이들 어릴 적 피아노 레슨을 한 선생님이 그곳에서 우연히 칼럼을 읽게 되었다면서 전화를 한 일도 있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써야 하는 일, 그 일을 22년째 이어오고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아찔하다. 무엇보다도 미련하니까 가능한 일이다 싶다.


걷기를 마치고 돌아와 칼럼을 쓰며 심마니 이야기를 썼다. 얼마든지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래의 ‘심마니의 자존심’은 교차로 칼럼으로 썼던 글이다.


심마니의 자존심


그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DMZ 인근마을을 따라 혼자 걷기 위해 나선 열하루의 길, 이레째 되는 날의 목적지는 화천 다목리였습니다. 작가 이외수 씨가 사는 곳으로 알려진 동네였지요.


날이 얼마나 뜨거운지 벌써 며칠 째 국민안전처에서 폭염주의 경보를 보내오고 있었습니다. 날이 너무 뜨거우니 야외활동을 삼가라는 경보 문자였습니다. 날이 뜨거운 것이야 길을 걸어보니 알겠는데, 그 정도가 야외활동을 삼가야 할 수준이라는 것을 경보문자는 확인시켜 주었는데 그렇다고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열하루 동안 걸어갈 길이 정해져 있기도 했거니와, 걷기 시작한 지 둘째 날 생각지 못한 경험을 한 것도 적잖은 이유가 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폭우와 우박이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야단이었던 진부령을 걸어서 넘는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 일을 경험하고 나니 어떤 악천후도 이겨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다목리로 가는 오후, 이글거리는 땡볕 때문인지 한참을 걸어도 밭에서 일하는 사람조차 보이질 않았습니다. 길을 물으려면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데 아무도 보이질 않으니 내심 당황스러웠는데, 그를 만난 것은 그렇게 길을 물을 사람을 찾던 순간이었습니다.


누군가 길가 옆 정자에 앉아 있어 길을 물었더니, 길만 묻지 말고 올라와서 물 한 잔이라도 하고 가라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기꺼이 정자 위로 올라갔고,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서로가 처음 만난 사이, 하지만 이야기는 시간을 잊고 이어졌습니다. 마침 다목리도 멀지 않았고, 예정보다는 여유 있게 온 것이어서 마음도 편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심마니라 소개를 했습니다. 혼자서 산을 다니며 산삼을 캐고 있다고 했습니다. 말만 들었지 전혀 알지 못했던 세계,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산에서 그 중 위험한 것이 멧돼지나 뱀보다도 벌이라는 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계곡에 들며 막대기로 나무를 쳐서 탁 탁 소리를 내면 멧돼지나 뱀은 자리를 피한답니다. 그러나 잘못 벌집을 건드려 쏘이면 그것은 치명적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삼 씨에 대한 이야기도 귀했습니다. 산에서 만나는 산삼은 오래 전 누군가가 씨를 뿌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새에 의해 삼이 자라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라는 것이지요. 그걸 잘 알기에 자신도 기회가 될 때마다 누군지 모르는 이를 위해 삼 씨를 심는다고 했습니다.


그 날 나눈 이야기 중 특별히 마음에 와 닿은 것은 그가 지키고 있는 자존심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좋은 삼을 구해서 팔면 전문가들도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 누군가를 속이면 큰돈을 벌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몇 뿌리가 되었든 자신이 캔 삼을 정직한 값에 팔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늘이 아껴 키운 멋진 삼을 만나기를 바란다는, 헤어지며 전한 인사 속에는 그의 삶을 격려하고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다 담겼답니다. -‘아름다운 사회’ (2017년 7월 12일)


낯선 길을 걷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 중의 하나는 뜻밖의 만남이 허락된다는 것임을 배운 날이었다. 농막에서 물을 마시며 나눈 이야기나 정자에 앉아 심마니와 나눈 이야기는 분명 내 마음속 빛나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었다.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내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다.


맞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사막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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