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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

거미의 유머

by 한종호 2017. 10. 1.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4)


거미의 유머


익살스러운 농담이나 해학(諧謔)을 뜻하는 ‘유머’는 막혔던 숨을 탁 터뜨리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싶다. 마치 물속에 잠겨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던 이가 물 밖으로 나오며 참았던 숨을 토해내는, 그런 순간처럼 말이다.


답답하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려지는 것과도 같아서 내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단번에 이해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견딜 수 없었던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도무지 긍정할 수 없었던 것을 웃음으로 긍정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수피령은 만만한 고개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심장이 파열될 것 같은 걸음을 이어가야 했다.


한 유머 강사는 그의 책에서 ‘당신은 테러리스트인가, 유머리스트인가?’를 묻고 있는데, 그의 질문에 의하면 유머리스트의 반대말은 재미없는 사람이나 딱딱한 사람이 아니라 테러리스트가 맞겠다 싶다.


오바마가 대통령 취임식을 할 때 실수로 선서를 잘못하는 바람에 취임식이 끝난 뒤 백악관에서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서를 다시 했는데, 그 때 오바마는 선서를 다시 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너무 재미있어서 다시 한 번 하기로 했습니다.”


그만한 여유와 유머가 있어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끌어갔지 싶기도 하다.


열하루 동안 길을 걷다가 만난 거미의 유머가 있다. 화천을 떠나 철원으로 향할 때였다. 화천과 철원이 강원도에 있는 것이야 잘 알고 있었지만, 한 가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화천과 철원 사이에는 뭔가 다른 이름을 가진 어떤 지역이 자리를 잡고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을 했었다.


마침내 수피령 정상이 보인다. 정상이란 무릇 인내와 인내가 합해진 결과였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화천과 철원은 고개 하나로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화천 다목리에서 수피령 고개를 넘으니 바로 철원 땅이었다. 물론 수피령 고개는 걸어서 쉽게 넘을 고개가 결코 아니었지만 말이다. 심장이 파열될 것 같은 고통을 내내 참으며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앞뒤 어디에도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외진 길을 한참을 걸어가다가 도로 곁에 있는 밭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 외진 곳도 누군가 땅을 놀리지 않고 농사를 짓고 있다는 것이 반갑고 고마웠다.


그런데 보니 밭 가장자리엔 말뚝이 나란히 박혀 있었고 말뚝에는 전선이 묶여 있었다. 전기가 흐르니 주의하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는 것을 보면, 먹을 것을 찾아 밭으로 내려오는 산짐승들을 쫓기 위한 전깃줄이다 싶었다.


우리 땅에 살면서 우리글을 모르는 짐승들만 놀라 뒷걸음질을 치겠구나 싶을 때였다. 밭이 끝나는 자리에 마지막 말뚝이 섰고 전선들도 그곳에서 멈춰 섰는데, 마지막 말뚝과 그 옆에 서 있는 자작나무 사이에는 뭔가 알 수 없는 선들이 아침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유심히 바라보니 거미줄이었다. 마치 마지막 말뚝에서 멈춘 전선을 슬며시 잇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를 먹든 다 같이 나눠 먹지 전깃줄이 다 뭐래요, 어디선가 숨어 슬며시 건네는 거미의 유머에 피식 웃음이 났고, 수피령 험한 고개가 문득 너그럽게 여겨졌다.


크지 않은 나라, 그런데도 화천과 철원이 고개 하나로 어깨를 걸고 있는 것을 이번에 처음으로 알았다.


매주 <드문 손길>이라는 주보를 만든다. 우리 손 잡아주신 주님의 손이 흔한 손 아니었듯이,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내미는 손이 흔한 손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보 이름을 <드문 손길>이라 정했다.


주보 표지에는 짤막한 글 하나씩을 싣는다. 차 한 잔 마시듯 잠깐 생각을 가다듬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의 신앙을 일반 언어로 바꾸는 노력이기도 하다.


걷기를 마치고 돌아와 주보 표지에 ‘거미의 유머’라는 짧은 글을 실었다. 유머를 유머로 받았으면!


화천과 철원은 같은 강원도라 해도

설마 고개 하나로 이웃인 줄은 몰랐는데

수피령은 결코 만만한 어깨가 아니어서

함부로 걸어 넘을 고개가 아니었다

앞뒤 어디에도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가르마 같은 길을 걷다 만난 길가 밭 가장자리엔

박아 놓은 말뚝을 따라 전깃줄이 내달리고

전기가 흐르니 주의하라는 경고문

우리 땅에 살면서 우리글을 모르는 짐승들만

기겁하듯 뒷걸음질을 치겠구나 싶을 때

밭이 끝나는 자리 마지막 말뚝에 이르러

전선도 달리기를 멈췄는데

마지막 말뚝과 곁에 선 자작나무 사이

빛나는 선들이 아침햇살에 그네를 탄다

저게 뭘까 유심히 바라보니

멈춰선 전선을 잇듯 거미가 친 거미줄이었는데

얼마를 먹든 나눠먹지 웬 욕심이래요

어딘가 숨어 슬며시 건네는 거미의 유머에

수피령 가파른 고개가 문득 너그럽지 싶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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