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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

팔랑리 풍미식당

by 한종호 2017. 8. 30.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7)


팔랑리 풍미식당


너덜너덜해질 만큼 로드맵을 손에 들고 다닌 것은 그것이 내가 지닌 유일한 나침반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열하루 동안 걸을 길을 지도도 없이, 다른 기기의 도움도 없이 단지 지명이 적혀 있는 인쇄물만을 들고 다니는 나를 걱정 반 딱함 반으로 바라보던 김정권 형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로드맵을 따라 양구 동면에 있는 팔랑리를 지나게 되었다. ‘팔랑리’라는 지명은 낯설다. 무슨 내력이 있을 것 같아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팔랑(八郞)은 한자로 여덟 팔(八)에 사내 랑(郞)이라 씁니다. 이곳에서 젖이 4개 달린 여자가 4쌍둥이씩 두 번을 출산을 해서 8형제가 태어나서, 모두 낭관(郎官) 벼슬을 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팔랑리로 불러집니다.>


<조선 중기쯤 함경도에 살던 전주 이 씨인 이학장(李學長)이라고 하는 도사(都事: 관리의 감찰과 규찰을 맡아보던 조선조의 종5품 관직)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남으로 내려오면서 방방곡곡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가 태백산맥의 골짜기를 더듬어 오다가 양구 동북방 도솔산 남쪽에 있는 지금의 동면 팔랑리(八郞里)에 이르렀다. 이곳 산수가 가히 자기의 뼈를 묻을 만 한 곳이라고 생각한 그는 몇몇 친족들과 함께 여기에 터를 닦고 살게 되었다.


이학장은 여기에 터를 잡고 집도 세웠으나 늘 허전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이학장이 허전해 하는 것을 본 이웃 사람들은 “큰 집을 짓고 그것을 혼자 지키니 그럴 만도 하지. 집을 지었으면 아내를 맞아 들여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이학장에게 처녀를 맞아 짝을 지을 것을 권했다. 이학장은 결국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이웃 마을에서 아리따운 낭자를 천거 받아 그 낭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아내를 맞이한 첫날, 이학장은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아리따운 아내의 가슴에는 마치 짐승과 같이 네 개의 젖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 이학장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이것도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며 배필이라고 생각하고 젖이 넷 달린 신부를 그대로 맞아 살기로 결심했다. 이학장의 신혼생활은 그럭저럭 지나갔다.


1년이 채 못 되어 이학장의 아내는 아이를 가져 출산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네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몇 해 있다가 또 출산을 했는데, 또 네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아들 여덟 명을 낳은 것이다. 그제야 이학장은 자신의 아내가 젖이 네 개 달린 수수께끼를 풀게 되었다.


두 부부는 8명의 아들을 정성을 다해 잘 길렀다. 어느덧 8형제는 장성해서 성인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기골이 장대했으며 무술이 뛰어났다. 어느 해 봄 8형제는 나라에서 행하는 과거시험을 보고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래서 나란히 낭관(郎官) 벼슬(조선조의 6품관 벼슬)을 했다고 한다.


그 뒤로 이 마을은 여덟 사내아이를 낳아 낭관 벼슬을 시킨 곳이라고 해서 팔랑리(八郞里)라고 불렀으며, 지금까지도 그렇게 불러지고 있다.>


그만한 사연이 있는 동네 팔랑리에는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민요도 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은 팔랑리는 곰취로 유명한 곳인데, 그래서 그럴까 나물 뜯는 노래인 <얼러지타령>이 전해져 내려온다.


돌산령, 달산령 선질꾼이 떴다 재작장이의 공지갈보야 술 걸러 놓아라.

대암산 용늪에 쌓인 눈이 녹거든 임자 당신과 소녀 단둘이 얼러지 캐러 갑시다.

대암산 용늪에 얼러지가 나거든 우리나 삼동세 얼러지 캐러 가세.

돌산령, 명당 구비에 쌓인 눈이 녹거든 당신하고 나하고 얼러지 캐러 갑시다.

대암산 멀구다래가 열거든 우리나 삼동세 멀구 따라 가세.

산천에야 그물은 머루 다래 인간에 그물은 당신이로구나.

돌산령 샛바람이 휘몰아치니 심곡사 종소리 요란도 하구나.

못 살겠구나 못 살겠구나 나는 못 살겠구나 돈 그리고 임이 그리워 나는 못살겠구나.

천질만질을 뚝 떨어져서 살았거든 정든 임이야 떨어져선 나는 못살겠구나.

바랑골 뒷산에 머루 다래 열거든 당신하고 나하고 머루 따러 갑시다.

산수갑산에 다랑칡은야 얼그러설그러졌는데 당신하고 나하고 언제나 얼그러설그러지느냐.

어스름 달밤에 백우산을 받고서 요리가자 조리가자 날 호리는구나.

무정한 기차야 말 실어다 놓구서랑 고향 실어줄 줄은 왜 날 몰라주나.

요놈아 총각아 손목을 놓아라 물같은 손목이 얄크러진다.


팔랑리는 지나가는 곳인데, 로드맵에는 팔랑리를 그냥 지나가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풍미식당’(구 한중관)을 꼭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풍미식당을 찾아가라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장면이야 어디서든 먹을 수 있지만, 풍미식당에 가면 그곳에만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다.


“내가 뽑은 자장면 길이가 휴전선 철조망 길이의 열배쯤 될 것이라던 주인장은 뒷방신세. 며느리가 최전방에 사제 냄새를 올려 보내는 일을 하고 있음.”


풍미식당에서는 망설일 것도 없이 자장면을 시켰다. 제일 맛있는 자장면은 배고플 때 먹는 자장면일지도 모른다. 길을 걷다가 먹는 자장면이었으니 그날의 자장면은 최고의 맛이었다. 후룩 후룩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자장 한 그릇을 금세 비웠다.


사실 풍미식당을 찾으면서 정말로 궁금했던 것은 자장 맛이 아니었다. 자신이 뽑아낸 자장면 면발의 길이를 휴전선 철조망에 빗댄 뒷방신세 영감님을 뵙고 싶었다. 그분의 얼굴에 배인 세월의 흔적을 마주하며 그동안 수고하셨다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또한 시아버지의 솜씨와 마음을 잇고 있는, 그래서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게 여겨지는 며느리에게도 인사를 하고 싶었다.


자장면을 먹고 나오면서 계산대에 있는 할머니께 풍미식당을 찾아온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잘 계신지 근황을 여쭸다. 그러자 할머니는 선뜻 대답을 못하시고는 이내 두 눈이 먼저 젖어들었다.


“어쩌지요, 남편은 지난해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손님이 여간 고맙지가 않은데 할아버지는 안 계시니, 그런 고마움을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대신하려는 듯 할머니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돌아가시던 날도 산에 가서 나무도 해오고, 자장면도 70여 그릇을 손수 만들어 팔았는데, 그렇게 정정했는데 그날 밤에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뽑은 자장면 길이가 휴전선 철조망의 열 배쯤 될 것이라 했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당신이 일손을 놓을 때쯤엔 철조망도 거두어지기를 바라지 않으셨을까.


할아버지 이야기를 이어가던 할머니가 생각이 났는지 주방에 있는 며느리를 불렀다. 할머니는 내게 들었던 이야기를 며느리에게 했고, 이야기를 들은 며느리는 목이 메는지 이내 숙연한 표정이었다.


시아버지를 그렇게 기억하고 풍미식당을 소개해준 사람이 고마웠기 때문일 것이다, 며느리는 풍미식당을 소개한 분의 이름을 물었고, 메모지에 그 이름을 적었다.


휴전선 철조망 길이의 열배나 되는 자장면을 뽑아내던 할아버지는 훌쩍 이 땅을 떠나고 지금이야 며느리가 그 일을 잇고 있다지만, 과연 풍미식당 자장면 사제 냄새는 언제까지나 최전방 고지로 퍼져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부러는 아니더라도 팔랑리나 그 인근을 지날 일이 있다면 풍미식당을 찾아가 자장면을 맛보시기를 권한다. 자장면이야 어디서든 먹을 수 있다지만 오직 그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할아버지 이야기가 있고,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며느리가 있는 곳이니 얼마든지 들를 만하다 싶다.


한 가지, 풍미식당을 찾을 땐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식당은 아침 11시에 문을 연다. 일찍 간다고 대충 받아주지 않는다. 음식 준비를 제대로 한 뒤에야 손님을 맞으려는, 그 또한 할아버지가 남긴 미더운 고집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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