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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57

존재, 사라짐, 아름다움의 순환 속에서 존재, 사라짐, 아름다움의 순환 속에서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7:14)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이번 주에는 며칠 앞서 편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주일 직전보다는 주중에 소식을 나누는 것이 더 좋겠다는 제안 때문입니다. 별고 없이 잘 지내시는지요? 함께 시간의 흐름을 타고 지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격절의 시간이 길어지니 그리움이 깊어갑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가을빛이 왠지 너누룩해 보입니다. 오늘이 한로寒露네요. 찬 이슬이 내리는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래서인지 바람이 서늘합니다. 농가월령가는 이맘때의 풍경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제비는 돌아가고 떼기러기 언제 왔노. .. 2020. 10. 10.
헛걸음이지 않도록 누군가 신동숙의 글밭(251) 헛걸음이지 않도록 누군가 가을날 산길을 걷는 걸음이헛걸음이지 않도록 누군가 떨어진 잎 사이로도토리 알밤이 반질반질 땅바닥을 보며 걷는 걸음이헛걸음이지 않도록누군가 집안에 뒹구는 종이 조각들 차곡차곡 하늘을 보며 걷는 걸음이헛걸음이지 않도록누군가 까맣게 태우는 밤별들을 흩어 놓으신 2020. 10. 10.
소리의 열쇠 한희철의 얘기마을(110) 소리의 열쇠 “한희철 목사님”“강은미 사모님”“한소리”“한규민” 저녁 무렵, 마당에서 혼자 놀던 소리가 날이 어두워지자 집으로 들어옵니다. 문이 닫혀 있습니다. 그러자 소리는 닫힌 문을 두드리며 차례대로 식구 이름을 댑니다. 짐짓 듣고도 모른 체 합니다. 소리는 더 큰 목소리로 또박 또박 식구 이름을 다시 한 번 외쳐댑니다. 웃으며 나가 문을 열어줍니다. 소리가 히힝 웃으며 들어옵니다. 손에 얼굴에 흙이 가득합니다. 며칠 전 문을 열어 달라 두드리는 소리에게 아내는 식구 이름을 물었습니다. “누구니?”“소리”“소리가 누군데?”“한소리요.”“아빠가 누구지?”“한희철 목사님”“엄마는?”“강은미 사모님”“동생은?”“한규민” 그제서야 “응 소리가 맞구나” 하며 문을 열어 주었던 것입니.. 2020. 10. 10.
환승 신동숙의 글밭(250) 환승 친정 엄마가 아침 햇살처럼 들어오시더니 가방도 안 내려놓으시고서서 물 한 잔 드시고 "이제 가야지" 하신다무슨 일이시냐며 불러 세우니 "버스 환승했다" 하시며떠날 채비라 할 것도 없이 부지런히 걸어도 10분이 넘는 거리를저녁 햇살처럼 걸어가신다 2020. 10. 9.
새집 한희철의 얘기마을(109) 새집 새집을 하나 맡았다. 저녁 무렵 교회 뒤뜰을 거닐다 우연히 새집을 찾게 된 것이다. 들로 산으로 나다니기 좋아했던 어릴 적, 우리가 잘했던 것 중 하나는 새집을 찾는 일이었는데, 새집을 찾으면 찾았다고 하지 않고 ‘맡았다’고 했다. 그때 우리는 쫑긋거리며 나는 새의 날갯짓만 보고도 새집의 위치를 짐작해 낼 만큼 그런 일에 자신이 있었다. 교회 뒤뜰을 거닐 때 새 한 마리가 얼마간 거리로 날아 앉곤 했는데, 부리엔 벌레가 물려 있었다. 제 새끼에게 먹일 먹이가 틀림없었다. 난 사택 계단 쪽으로 지긋이 물러나와 새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는 미심쩍은 나를 의식해서인지 여간해선 둥지로 들지 않았다. 그러기를 30여분, 나는 어릴 적 감을 되살려 마침내 새집을 찾아내고야 .. 2020. 10. 9.
틀린 숙제 한희철의 얘기마을(108) 틀린 숙제 은진이가 숙제를 합니다. 맞는 답을 찾아 선으로 연결하는 문제입니다. 1+4, 2+1, 4+3 등 문제가 한쪽 편에 있고 3,5,7 등 답이 한쪽 편에 있습니다. 은진이는 답을 찾아 나란히 선을 잊지 못합니다. 답이 틀린 게 아닙니다. 찍찍 어지러운 선으로 은진이는 아예 그림을 그렸습니다. 불안기 가득한 커다란 두 눈 껌뻑이며 아직 말이 서툰 1학년 은진이. 은진이의 숙제를 보며 마음이 아픈 건 우리 삶 또한 수많은 관계와 관계, 만남과 만남, 과정과 과정으로 연결된 것일 텐데, 은진이의 경우 그 모든 것들을 차분히 잇지 못하고 어지러이 뒤엉키고 말 것 같은 걱정 때문입니다. 휑하니 무관심 속에 버려진, 누구하고도 나란히 선으로 연결되지 못한 은진이.은진이가 틀린 숙.. 2020. 10. 8.
떠도는 물방울 하나 신동숙의 글밭(249) 떠도는 물방울 하나 망망대해(茫茫大海) 망망대천(茫茫大天)떠도는 물방울 하나 깜깜한 밤이래도 걱정 없어요돌고 돌아서 제자리길 잃을 염려 없어요 연약하여 부서진대도 상관 없어요부서지면 더 작은 물방울더 가벼울 터이니 언제든 고개 들면해와 달과 별이 그 자리에서한결같이 지켜보고 있으니 2020. 10. 8.
글숲 신동숙의 글밭(248) 글숲 글숲에서 길을 찾기도 하지만종종 길을 잃기도 하지요 키 큰 나무와 무성한 수풀 속에서길이 보이지 않으면 가만히 눈을 감지요달과 별이 어디 있나 하고요 고요히 눈을 떴을 때 나뭇잎 사이로 해가 빛나면맘껏 해를 마주보기도 하고 햇살에 춤추는 먼지 한 톨에 기뻐하지요 2020. 10. 7.
효험 있는 청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07) 효험 있는 청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릅니다. 동구 밖과 집, 지집사님은 연신 동구 밖과 집을 왔다 갔다 합니다. 종종걸음으로 동구 밖으로 나와 신작로를 바라보다가 누가 부르기라도 한 듯 다시 집으로 달려가곤 합니다. 그런 집사님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합니다. 부천에 나가 살고 있는 둘째 아들이 교제하는 여자와 인사드리러 온다고 전화를 한 것입니다. 집과 동구 밖을 오가는 것으로 봐선 집사님은 집 아궁이에 찌개를 올려놓은 게 분명합니다. 오랜만에 오는 아들도 아들이지만 새 며늘아기 될 아가씨에게 오는 대로 따뜻한 상을 차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녁 해가 기울고 산 그림자를 따라 땅거미가 깔릴 때에야 기다리던 아들과 예비며느리가 왔습니다. 첫 번째로 부모님을 찾아뵙는 떨림과 부끄러움.. 2020. 10.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