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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60

제 각각 세상 한희철의 얘기마을(122) 제 각각 세상 물난리 지나간 뒷모습은 참으로 참담했다. 강가를 따라 그림처럼 펼쳐진 기름지고 널따란 밭들은 이미 밭이 아니었다. 김장 무, 배추, 당근 등 파랗게 자라 올랐던 곡식들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수북한 모래가 그 위를 덮고 있었다. 흙이 다 떠내려가 움푹 파인 자리에 흰 뼈처럼 돌들만 드러난 곳도 적지 않았다. 미끈하게 자라 올랐던 미루나무들도 어이없이 쓰러져선 깃발처럼 폐비닐만 날리고 있었다. 쉽게는 치유되지 않을 깊은 상처였다. 부론에 다녀오다 보니 강가를 따라 난 도로변에 웬 차들이 기다랗게 줄을 서 있었다. 수해복구의 손길이 이곳까지 미쳤구나,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 반가운 마음으로 차창 쪽으로 바싹 당겨 앉아 내다보니 웬걸, 강가 그 많은 사람들은 한결.. 2020. 10. 22.
고향 친구들 한희철의 얘기마을(121) 고향 친구들 재성이가 며칠 놀이방에 못 왔습니다. 엄마아빠를 따라 외할머니댁에 다니러 갔기 때문입니다. 외할머니 댁은 해남, 아주 먼 곳에 있습니다. “재성이 언제 와요?” 재성이가 외할머니 댁에 간 후 놀이방 친구들은 날마다 물었습니다. 그래야 며칠, 곧 있으면 다녀올 텐데도 아이들은 툭하면 재성이 언제 오냐고 물었습니다. 재성이 왔나 보러 가자고 놀이방이 끝나면 아이들은 재성이네 집으로 쪼르르 가 보곤 했습니다. 어둠이 다 내린 저녁, 재성이네 집에 불이 켜졌는지를 확인해 보기도 했습니다. 며칠 만에 재성이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재성이는 집에 오자마자 놀이방으로 왔습니다. 재성이가 교회마당으로 들어설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함성을 질렀습니다. “재성이가 왔다!” 박수까지.. 2020. 10. 20.
가장 좋은 설교 한희철의 얘기마을(120) 가장 좋은 설교 농촌목회를 하면서 느끼게 되는 어려움 중 그중 큰 것이 설교입니다. 설교란 모든 목회자가 한결같이 느끼는 어려움이겠지만, 농촌에서는 더욱 더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까짓 서너 명 모일 때가 많은데 뭔 어려움이냐 할지 모릅니다. 사실 도시 교회에 비한다면 농촌교회는 지극히 단순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요구가 있는 것도 아니요 논리적이고 신학적인 내용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적은 교인이 피곤한 몸으로 참석하여 그나마 피곤을 이기지 못하면 꾸벅꾸벅 졸기 일쑤, 적당히 때워(?) 넘겨도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유혹처럼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 점이 어렵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며 기다려온 사람들이 빛나는 눈빛으로 설교자를 응시하고, 구절구절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으로.. 2020. 10. 20.
무너지는 고향 한희철의 얘기마을(119) 무너지는 고향 단강 아이들과 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자기 꿈 이야기를 돌아가며 했습니다. 과학자가 되겠다는 아이도 있었고,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화가, 가수, 군인, 간호사 등 아이들은 차례대로 자기 꿈 얘기를 했습니다. 되고 싶은 게 많아서인지, 미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해서인지 대답을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중 미희와 은숙이 얘기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던 4학년 미희와 의사가 꿈이라고 대답했던 6학년 은숙이는 이어진 질문,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꿈이었던 미희는 밭에서 담배나 고추를 따고 있을 것이라고 했고, 의.. 2020. 10. 19.
새벽 제단 한희철의 얘기마을(118) 새벽 제단 매일 새벽마다 어김이 없는 두 분이 있습니다. 문 권사님과 지 권사님입니다. 문 권사님은 매일 새벽마다 제단을 닦고, 지 권사님은 매일 새벽마다 종을 칩니다. 그 일은 어김이 없어 멀리 자식 집에 다니러 갔다가도 아무리 늦어도 굳이 돌아오는 것은 그 일 때문입니다. 늙은 과부에 가난하기까지 하니 무엇으로 봉사하겠느냐고 안타까워 할 때, 두 분께 주어진 일이 제단 닦는 일과 새벽종 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두 분은 그 일을 하나님께 받은 사명인양 지성으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두 분은 모두 일흔이 넘은 노인들입니다. 그런데다가 두 분은 모두 몸이 불편합니다. 제단을 닦는 문권사님은 관절염이 심하여 걷는 일도 힘들고 무릎을 꿇지도 못합니다. 그래도 제단 닦는 일은.. 2020. 10. 18.
낯선 객 한희철의 얘기마을(117) 낯선 객 산이 불씨를 품었다.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이 골짝 저 능선 붉은 기운이 번져간다. 한꺼번에 펼쳐서는 안 될, 천천히 풀어 놓아야 할 그리움인 냥, 안으로 붉음을 다스린다. 자기 몸을 불살라 가장 눈부신 모습으로 자기를 키운 대지 품에 안기는, 기꺼이 순응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보아주는 이, 눈길 주는 이 없어도 뿌리 내린 곳 어디라도 꽃을 피워 올리는 들꽃이 아름답다. 연보랏빛 들국화와 노란 달맞이꽃, 길가 풀섶의 달개비꽃과 강가의 갈대잎, 저마다의 빛깔과 모양으로 피어나 찾아온 계절 대지를 수놓는다. 선선한 바람과는 달리 햇살이 따뜻하다. 한 올 한 올 손에 잡힐 뜻 나뉘어 내리는 햇살이 마음껏 가을을 익힌다. 텃밭에서 통이 커가는 배추하며 알 굵은 무, 산다락 .. 2020. 10. 17.
사탕 한희철의 얘기마을(116) 사탕 가까운 친구 주명이가 죽은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토요일 오후 우리는 저수지로 향했다. 고기, 우렁, 조개를 잡을 수 있고 수영도 할 수 있는 곳, 학교에선 가지 말라 금하였지만 철길 넘어 저수지는 어린 우리에겐 얼마나 신나는 곳이었던지. 갈 때마다 그러했듯 그날도 모두들 신나게 놀았다. 저녁 무렵, 집으로 오려고 철교 아래 모였는데 주명이가 보이질 않았다. 오리를 잡는다고 물로 들어갔다는데, 그 뒤론 모두들 모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입을 모아 주명이를 불렀다. 목이 쉬도록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도 나오지도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때가 저녁, 통근 기차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친구 한 명과 나는 숨이 멎도록 기차역으로 달려가 퇴근해 돌아오는 주명이 형에게 그 사.. 2020. 10. 16.
오토바이를 버리라고요? 한희철의 얘기마을(115) 오토바이를 버리라고요? 목사님, 먼저 저의 이런 못난 처신을 용서하십시오. 언젠가 목사님은 목사님이 펴내시는 주보를 통해 “그대의 오토바이를 당장 버리시오”라고 호령하신 적이 있습니다. “흙 가운데 살면서, 흙의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어쩌자고 그 괴물을 타고 흙길 가운데를 질풍처럼 달리느냐.”고 하셨습니다. 본시 사람이란 흙 밟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목사님이 주시고자 했던 말씀이셨죠. 이어 보내신 편지에서도 다시 한 번 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흙 같은 가슴들일랑 흙가슴으로 만나야 한다고요. 처음 목회 떠나왔을 땐 말씀대로 걸었습니다. 걸을 수밖에 없기도 했고요. 뱀처럼 늘어진 길을 땀으로 목욕하며 걷기도 했고요, 아픈 아기를 안고 그냥 비를 맞고 걸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2020. 10. 15.
상처 한희철의 얘기마을(114) 상처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힘든 일이지 싶어 저녁 어스름, 강가로 나갔다.모질게 할퀸 상처처럼 형편없이 망가진 널따란 강가 밭, 기름진 검은 흙은 어디로 가고 속뼈처럼 자갈들이 드러났다. 조금 위쪽에 있는 밭엔 모래가 두껍게 덮였다.도무지 치유가 불가능해 보이는, 아물 길 보이지 않는 깊은 상처들.한참을 강가 밭에 섰다가 주르르 두 눈이 젖고 만다. 무심하고 막막한 세월.웬 인기척에 뒤돌아서니 저만치 동네 노인 한분이 뒷짐을 진 채 망가진 밭을 서성인다.슬그머니 자릴 피한다.눈물도 만남도 죄스러워서. - (1991년) 2020. 10.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