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희철의 '두런두런'1158

텅 빈 들판 한희철의 얘기마을(128) 텅 빈 들판 들판이 텅 비었다.볏가리와 짚가리 듬성듬성 선 들판모처럼 소들이 한가하다어미 소와 송아지가 진득이 편한 시간 보내기도 드문 일,커서 할 일 일러라도 주는 듯어미 소와 송아지가 종일 정겹다.송아지와 어미 소가 대신하는 이 땅의 평화. - (1992년) 2020. 10. 29.
변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27) 변소 언젠가 아내의 친구가 단강에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와서 지내다 아내에게 화장실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더니 고개를 흔들며 “여기 아닌데” 하며 그냥 나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배를 잡고 웃었지만 허름한 공간 안 땅바닥에 돌멩이 두 개만 달랑 놓여 있었으니, 도시 생활에 익숙한 친구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네를 가도 익숙해졌지만 저도 단강에 처음 왔을 땐 변소 때문에 당황했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한쪽 구석에 돌멩이 두 개만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생각하다 틀리지 않게 일을 보긴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수세식에 익숙해진 터에 돌멩이에 올라앉아 맨땅 위에 일을 본다는 것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편해.. 2020. 10. 28.
은희네 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26) 은희네 소 은희네 소가 은희네로 온 지는 10년이 넘었습니다. 정확히 그 연수를 아는 이는 없지만 대강 짐작으로 헤아리는 연수가 십년을 넘습니다. 이젠 등도 굽고 걸음걸이도 느려져 늙은 티가 한눈에 납니다.은희네 소는 은희네 큰 재산입니다. 시골에서 소야 누구 네라도 큰 재산이지만 은희네는 더욱 그러합니다. 팔십 연줄에 들어선 허리가 굽을 대로 굽어 고꾸라질 듯 허리가 땅에 닿을 할머니, 은희네 할머니가 온 집안 살림을 꾸려갑니다. 아직 젊은 나이의 아들과 며느리가 있지만 그들조차도 이런 일 저런 일 크고 작은 일에까지 할머니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중3인 은희야 제 할 일 제가 한다 해도 이제 초등학교 3학년과 2학년인 은옥이와 은진이 뒷바라지는 역시 할머니 몫입니다. 이런.. 2020. 10. 27.
들꽃 한희철의 얘기마을(125) 들꽃 단강에 와서 깨닫게 된 것 중 하나가 들꽃의 아름다움입니다. 곳곳에 피어있는 이런저런 들꽃들. 전엔 그렇게 피어있는 들꽃이 당연한 거라 여겼을 뿐 별 생각 없었는데, 요즘 와 바라보는 들꽃은 더 없이 아름답고 귀하게 여겨집니다. 쑥부쟁이, 달맞이꽃, 달개비, 미역취 등 가을 들꽃이 길가 풀섶에, 언덕에 피어 가을을 노래합니다.때를 따를 줄 아는 어김없는 모습들이 귀하고, 다른 이의 주목 없이도 자신의 모습 잃지 않는 꿋꿋함이 귀합니다. 제 선 자리 어디건 거기 넉넉히 뿌리를 내리고 꽃으로 피어나는 단순함이 또한 귀합니다. 꾸밈없는 수수함은 또 얼마나 정겨운지요. 필시 우리도 들꽃 같아야 할 것, 지나친 욕심과 바람일랑 버리고 때 되면 제자리에서 피어나 들꽃처럼 세상을 수놓.. 2020. 10. 26.
되살이 한희철의 얘기마을(125) 되살이 죽을 사람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살아나 이어가는 삶을 단강에서는 ‘되살이’라 합니다. 우속장님을 두고선 모두들 되살이를 하는 거라 합니다. 십 수 년 전, 몸이 아파 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의사가 아무런 가망이 없다고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개울에서 빨래를 하다 ‘병원 하얀 차’가 마을을 지나 속장님 집으로 올라가는 걸 본 허석분 할머니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곧 무슨 소식이 있지 싶어 집에 와 두근두근 기다리는데 밤늦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올라가 봤더니,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쇠꼬챙이처럼 말라 뼈만 남은 몸을 방바닥에 뉘였는데, 상처 부위가 형편이 없어 정말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렇게 몇 달이나 갈까 동네.. 2020. 10. 25.
어느 날의 기도 한희철의 얘기마을(124) 어느 날의 기도 위로를 말하기엔 아직 우리는 슬픔을 모릅니다. 어둠속 잠 못 이루는 눈물의 뿌리가 어디까지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나눔을 말하기엔 아직 우리는 속이 좁습니다. 저 밖에 모릅니다. 받는 건 당연하면서도 베푸는 건 특별합니다. 축복을 말하기엔 아직 우리는 은총을 모릅니다. 가난한 들판에 가득 쏟아져 내리는 햇살, 가난한 영혼 위에 고루 내리는 하늘의 은총을 우리는 모릅니다. 스스로 기름져 툭 불거져 나온 탐욕으론 이미 좁은 길을 지날 길이 없고, 하늘 뜻 담을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도 위로를 말하는, 나눔을 말하는, 은총을 말하는, 말로 모든 걸 팔아버리는 우리들입니다. 용서 하소서. 주님 - (1994년) 2020. 10. 24.
죽이면 안 돼! 한희철의 얘기마을(123) 죽이면 안 돼! 때론 개미만 보아도 “엄마야!” 하며 기겁을 하던 소리가 주일 저녁예배 시간, 무슨 담력이 어디서 났는지 예배당에 들어 온 파리를 발을 번쩍 들어 밟으려 했다.] 할머니를 따라 교회에 왔던 다섯 살 준이가 그 모습을 보더니만 눈이 휘둥그레져 하는 말, “죽이면 안 돼, 걔네 엄마가 찾는단 말이야.” - (1991년) 2020. 10. 22.
제 각각 세상 한희철의 얘기마을(122) 제 각각 세상 물난리 지나간 뒷모습은 참으로 참담했다. 강가를 따라 그림처럼 펼쳐진 기름지고 널따란 밭들은 이미 밭이 아니었다. 김장 무, 배추, 당근 등 파랗게 자라 올랐던 곡식들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수북한 모래가 그 위를 덮고 있었다. 흙이 다 떠내려가 움푹 파인 자리에 흰 뼈처럼 돌들만 드러난 곳도 적지 않았다. 미끈하게 자라 올랐던 미루나무들도 어이없이 쓰러져선 깃발처럼 폐비닐만 날리고 있었다. 쉽게는 치유되지 않을 깊은 상처였다. 부론에 다녀오다 보니 강가를 따라 난 도로변에 웬 차들이 기다랗게 줄을 서 있었다. 수해복구의 손길이 이곳까지 미쳤구나,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 반가운 마음으로 차창 쪽으로 바싹 당겨 앉아 내다보니 웬걸, 강가 그 많은 사람들은 한결.. 2020. 10. 22.
고향 친구들 한희철의 얘기마을(121) 고향 친구들 재성이가 며칠 놀이방에 못 왔습니다. 엄마아빠를 따라 외할머니댁에 다니러 갔기 때문입니다. 외할머니 댁은 해남, 아주 먼 곳에 있습니다. “재성이 언제 와요?” 재성이가 외할머니 댁에 간 후 놀이방 친구들은 날마다 물었습니다. 그래야 며칠, 곧 있으면 다녀올 텐데도 아이들은 툭하면 재성이 언제 오냐고 물었습니다. 재성이 왔나 보러 가자고 놀이방이 끝나면 아이들은 재성이네 집으로 쪼르르 가 보곤 했습니다. 어둠이 다 내린 저녁, 재성이네 집에 불이 켜졌는지를 확인해 보기도 했습니다. 며칠 만에 재성이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재성이는 집에 오자마자 놀이방으로 왔습니다. 재성이가 교회마당으로 들어설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함성을 질렀습니다. “재성이가 왔다!” 박수까지.. 2020.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