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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58

목사님들은 뭐하고 있었어요?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09) 목사님들은 뭐하고 있었어요? 지난 여름 끝자락에 있었던 일이니, 벌써 제법 시간이 지난 일이다. 꽃무릇이 지기 전에 사진을 찍자며 지인이 안내한 곳이 길상사였다. 언젠가는 찾아가 봐야지 마음에만 두었던 길상사를 그렇게 찾게 되었다. 길상사의 꽃무릇은 벌써 시들어 있었다. 사진으로 찍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꽃무릇 대신 잠시 길상사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서울 한복판 북한산 자락에 그처럼 호젓하고 넉넉한 공간이 있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넓고 그윽했고 아름다웠다. (출처: 한겨레 휴심정) 동행한 또 다른 지인에게 아는 척을 했다. 김영한과 백석에 얽힌 이야기, 김영한과 법정 스님에 얽힌 이야기, 특히 김영한이 법정 스님에게 요정 대원각을 시주.. 2019. 11. 10.
진짜는 항상 아름답다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08) 진짜는 항상 아름답다 자신을 찾아온 병을 넉넉한 웃음으로 받아들여 변함없는 삶을 살아낸 사람, 그는 떠났지만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남아 있다. 장영희 교수의 을 다시 꺼내들었다. 꾸밈없고 반듯하고 따뜻한 내용 하나 하나가 가슴에 와 닿는다. 삶을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되며, 쉽게 절망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책 속에는 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서양 동화 하나가 소개되어 있다. 한 아이가 가지고 있는 말 인형과 장난감 토끼가 나누는 이야기다. "나는 '진짜' 토끼가 되고 싶어. 진짜는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잠자는 아이의 머리맡에서 새로 들어온 장난감 토끼가 아이의 오랜 친구인 말 인형에게 물었다. "진짜는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는 아무 상관이 없어. 그.. 2019. 11. 9.
이야기의 힘을 신뢰한다는 것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07) 이야기의 힘을 신뢰한다는 것 가 끝났다. 정릉교회가 부흥회라는 이름 대신 말씀축제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이름이 달라지면 성격도 달라질 수가 있다. 걸음을 멈추고 말씀을 듣는 시간, 누구를 청할지는 늘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꼭 청하고 싶은 선배가 있어 말씀을 드렸더니 끝내 고사를 했다. 그 또한 귀한 가르침이었다. 그러던 중 떠오른 한 사람이 있었다. 을 쓴 송대선 목사였다. 연락을 했고, 오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예(禮)가 아니다 싶으면서도 두 가지 양해를 구했다. 주제와 일정이었다. ‘시편의 바다를 헤엄치자’로 주제를 정했고, 말씀을 듣는 시간을 10회로 정했다. 선배의 말이기 때문이었을까, 받을 수 있는 범위의 일이었을까, 두 가지를 모두 받아.. 2019. 11. 8.
생각하지 못한 위로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06) 생각하지 못한 위로 드물게 뵙고 이따금씩 통화를 하는 한 지인이 있다. 내게는 삶의 스승과 같은 분이다. 지난번 통화를 하다가 잠깐 책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분이 모르는 책이었다. 누구보다도 책 읽기를 좋아하는 분, 마틴 슐레스케가 쓴 와 를 보내드리기로 했다. 통화를 마치고 인터넷으로 책 주문을 하는데, 그만 막히고 말았다. 내가 책을 받아 다시 보내는 것보다는 그분의 주소로 직접 보내드리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런 주문은 안 해 본 일이었다. 별 것 아니었을 텐데도 나는 막히고 말았다. 그만큼 컴퓨터와 친하질 못한 탓이었다. 누군가에게 물어서 다시 해야지 했는데, 그리고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두어 주가 지난 뒤 지인이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 2019. 11. 7.
집으로 돌아오는 소처럼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05) 집으로 돌아오는 소처럼 마주앉아 밥을 먹던 권사님이 자기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자라난 고향은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외진 시골, 사방이 논으로 둘러싸인 동네였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 농사일을 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다지만 아이에게 농사일이 얼마나 고되었을까, 어렵지 않게 짐작이 된다. 권사님은 지금도 보리밥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어릴 적에 하도 먹어 물린 것이다. 아버지가 시키는 농사일은 모두가 고된 것만이 아니어서 기다려지는 일도 있었다. 소꼴을 먹이는 일이었다. 소를 몰고 강가로 나가 풀어놓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소를 풀어두면 소가 알아서 풀을 뜯어먹는데, 그러는 동안 친구들이랑 멱도 감고 고기도 잡을 수가 있었으니 그보다 좋.. 2019. 11. 3.
이사를 가는지, 오는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04) 이사를 가는지, 오는지 책상에 앉아 있는데, 맞은 편 창문 밖으로 사다리차가 보인다. 3층에 닿은 사다리차를 통해 연신 짐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누구의 상상력이었을까, 복도를 통해 짐들을 옮기면 얼마나 힘이 들까만 사다리차를 통해 손쉽게 짐을 옮기고 있다. 상상력은 상상력에 머물지 않는다. 효용성도 크다. 사다리차를 보며 누가 이사를 오나 보다 했는데, 아니었다. 이사를 가는 것이었다. 가만 보니 가서 묻지 않고도 책상에 앉아 이사를 가는지 오는지를 알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사다리차가 상자를 싣고 3층 창문까지 올라가면 창문 안에 있던 누군가가 상자를 받는다. 유심히 보니 올라간 상자는 가볍고 내려오는 상자는 무겁다. 빈 상자가 올라가 짐을 채운 뒤에 내려오는 것이다... 2019. 11. 2.
돌멩이 하나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03) 돌멩이 하나 어제 오후였다. 지나가며 보니 예배당 초입 구석진 곳에 돌멩이가 하나 눈에 띄었다. 조금 펑퍼짐한 돌이었다. 웬 돌멩이가 저기 놓였을까 싶어 치워야지 했다. 오늘 아침이었다. 창문을 통해 보니 누군가 한 사람이 예배당 입구 바닥에 앉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닥에 그냥 앉지 않았다. 목장갑을 벗어 돌멩이 위에 깔고 앉았다. 가만히 앉은 뒤에는 쓰고 있던 안전모를 벗어 옆에다 내려놓았다. 바로 앞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잠깐 쉬는 것이었다. 그는 그 단순한 동작들을 예식을 치르듯 천천히 하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는 동작 속에 어떤 의미가 스미고 있었는데, 돌멩이는 고단한 노동을 하는 한 사람에게 의자였던 것이다. 돌멩이를 치우지 않기로 한다. 2019. 11. 1.
갈 줄 모르는 집난이 같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02) 갈 줄 모르는 집난이 같이 설교를 듣다가 시를 인용하는 대목을 만나면 마음이 즐겁다. 인용하는 시가 말씀과 어울릴 때 말씀은 깊이와 향기를 더하게 된다. 송대선 목사의 설교를 듣다가 백석의 시 한 구절을 들었다. 몰랐던 구절이었는데, 주님을 찾았을 때의 즐거움과 평온함을 말하며 인용한 구절이었다. ‘집난이’는 ‘시집간 딸’을 의미 했다. 시집간 딸이 친정집을 찾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꿈에 그리던 엄마를 만날 수가 있다. 엄마는 어떻게 엄마 노릇을 했을까, 묻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이 많다. 보고 싶던 가족들과도 어울릴 수가 있다. 밀렸던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른다. 아무 일을 안 해도 된다.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 모든 자유를 누린다. 고단했고 무거.. 2019. 10. 30.
줄탁동시(啐啄同時)와 곤달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01) 줄탁동시(啐啄同時)와 곤달걀 ‘줄탁동시’라는 말은 줄(啐)과 탁(啄)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알 속에서 자란 병아리가 때가 되면 알 밖으로 나오기 위해 부리로 껍데기 안쪽을 쪼는데 이를 ‘줄’(啐)이라 하며, 어미 닭이 병아리 소리를 듣고 밖에서 알을 쪼아 새끼가 알을 깨는 행위를 도와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한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동시에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가장 이상적인 사제지간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곤달걀’이 있다. 계란이 병아리로 부화되기 전에 알속에서 곯아버린 것을 말한다. 병아리 모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결국은 알속에서 죽어 버린 계란을 말한다. 가난한 유년시절, 징그럽다는 생각도 없이 곤달.. 2019.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