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2663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데 왜 잔이 넘칠까? 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데 왜 잔이 넘칠까? 독자적인 몇 개의 낱말들이 서로 모여 구(句 phrase)나 절(節 clause)을 형성할 때 각 개별 단어의 본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결합된 낱말들이 만들어내는 전혀 새로운 뜻을 우리는 숙어(熟語) 혹은 관용구(慣用句)라고 한다. 이러한 특수 표현의 형성은 언어마다 다르다. 같은 언어라고 하더라도 시대마다 다를 수도 있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뜻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관용적 표현이 축자(逐字) 번역이 될 때에는 그 의미를 옮기지는 못한다. 한 언어의 관용적 표현에 대한 의미론적 연구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사고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하기도 한다. 히브리어 특유의 표현들은 번역된 성서 중에서 직역의 경.. 2019. 5. 8. 그냥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29) 그냥 후둑후둑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다. 오래된 흙집 흙벽 떨어지듯 견고하다 싶었던 마음이 허물어질 때가 있다. 태연하던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어디에도 뿌리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미동도 없이 마음이 가라앉을 때가 있다. 손을 휘저어도 무엇 하나 잡히는 것이 없을 때가 있다. 어떤 것도 마음에 닿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일도, 음악도, 책도, 커피도, 세상 풍경도, 전해지는 이야기도,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뒷걸음을 친다. 한 순간 내가 낯설고 세상이 낯설다. 모래알 구르듯 시간이 지나가고, 어둠이 깊도록 종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침내 향방이 사라진다. 그럴 때면 발버둥을 치지 않는다. 고함을 지르지도, 안간힘을 쓰지도 않는다. 미끄러지.. 2019. 5. 8. 50밀리미터 렌즈처럼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27) 50밀리미터 렌즈처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 중에 송진규 선생님이 있다. 강원도에서 태어나 강원도에서 살며 강원도의 아이들을 가르친 선생님이시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모습 속에는 강원도의 이미지가 담겨 있지 싶다. 원주에 있는 육민관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다 교장으로 은퇴를 하신 뒤, 지금은 고향 호저에서 살고 계시다. 어느 핸가는 동네 이장 일을 보았다고도 들었다. 이장이라는 직함도 잘 어울리신다 싶었다. 선생님의 성품과 삶과 글과 사진을 나는 두루 좋아한다. 언젠가 선생님께 들은 사진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선생님은 50mm 렌즈로만 사진을 찍는데, 그렇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50mm 렌즈가 사람의 눈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자.. 2019. 5. 7. 너무나 섬세해진 영혼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26) 너무나 섬세해진 영혼 “악마가 영혼을 거칠게 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반대로 영혼을 과도하게 섬세하게 하는 데 주력한다. 그리하여 너무나 섬세해진 영혼은 ‘죄가 없는 곳에서도’ 끊임없이 모든 것을 죄로 보고, 결국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참소(讒訴)한다.” 예수회의 창시자 로욜라가 한 말이다. 내면을 성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영혼의 방에 등불을 밝힌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 너무나 섬세해진 영혼은 섬세해진 자신을 과신하여 정작 바라보아야 할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2019. 5. 6. 빛을 바라본다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25) 빛을 바라본다면 가만 보니 창가에 놓아둔 화초의 여린 줄기들이 한 쪽 방향을 향하고 있다. 오랜 시간 함께 연습을 한 싱크로나이즈 선수들이 보이는 팔이나 발동작 같다. 우리는 하나, 모두가 같은 마음이랍니다, 작은 목소리 하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유리창 쪽을 향하고 있었다. 모두가 빛을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면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빛을 바라본다면 같은 빛 안에서 하나인 것이었다. 2019. 5. 5. 사랑 안에 있으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24) 사랑 안에 있으면 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가문비나무의 노래 두 번째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책이다. 마틴 슐레스케가 속 깊은 대화를 나무와 나누며 나무를 깎아 바이올린을 만들다가 자신이 일하는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 잠깐 손을 멈추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일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성급하거나 서두르지 않는 그의 속도 때문일까, 책도 천천히 읽게 된다. 마음에 닿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데, 또 하나의 줄을 긋고 싶은 문장이 있었다. 마틴 슐레스케가 나무와 연장과 악기와 노동 등 일상의 모든 것들과 내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문장이었다. “사랑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말을 걸어온다.” 2019. 5. 4. 비움과 채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23) 비움과 채움 이른 아침부터 안식관 공사 현장에서는 일이 시작이 되었다. (감리교 은퇴여교역자를 위한 거처인 ‘안식관’을 두고 이웃들 중에는 납골당을 짓는 것이냐 묻는 이들도 있어 이름을 바꾸는 것에 대해 여선교회에 건의를 했는데, 그 결과는 아직 모르겠다.) 지난겨울부터 그날그날 주어진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건물 모양을 갖추고 있다. 새로운 층을 올리기 전 바닥을 합판으로 덮는다. 그리고 그 위를 스티로폼으로 덮는다. 아마도 보온과 방음을 위한 공정이지 싶다. 나중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부분을 소홀히 하면 후유증이 생긴다. 합판과 스티로폼으로 덮은 부분이 한 층의 바닥이 되지 싶다. 바닥면 사이사이로 바둑판처럼 이어지는 빈 공간이 있는데, 건축에.. 2019. 5. 2. “벽에 소변 보는 자” 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 “벽에 소변 보는 자” 좀 지저분한 말이 되어 주저스럽지만, 서서 오줌 누는 이들 때문에 벽들이 애꿎은 수난을 당한다. 벽에다 대고 함부로 소변을 보는 것은 남자하고 개뿐이다. 아직도 서울의 으슥한 골목길 벽은 남자들의 공중 화장실이 되기 십상이다. 소변금지를 알리는 구호도 갖가지다. 어떤 곳에는 가위를 그려놓고 위협을 주기도 하고, 어떤 곳에는 “개 이외는 여기에 소변을 보지 마시오”라고 써서 주정뱅이 오줌싸개들을 개로 깎아 내리기도 한다. 그래도 노상방뇨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또 이런 것은 동서와 고금을 가리지 않는 것 같다. 히브리어에서 사내를 경멸하여 일컬을 때 “벽에다 대고 오줌 누는 놈”이라고 한다. 즉 “서서 오줌 누는 놈”이란 말이다. ‘남자’나 .. 2019. 5. 2. 하나님의 음성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22) 하나님의 음성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오치용 목사님이 페북에 올린 글이다. 오목사님의 성품을 아는지라 충분히 공감이 되는 글이었다. 누군가의 글에 답을 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 그래도 다음과 같은 글을 달았다. 글을 읽고 답을 달며 옛 시간 하나가 떠올랐다. 단강에서 목회를 할 때였다. 단강 이후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고 심경을 밝혔을 때, 가까이 지내던 두 선배가 한 말이 있다. 한 선배는 말했다. “그걸 왜 생각해? 나는 이제까지 백지수표를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왔어.” 또 한 선배는 말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음성이 부엌에서 들려올 거야.” 2019. 5. 1. 이전 1 ··· 183 184 185 186 187 188 189 ··· 29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