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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과 빈탕 텅 빈 충만의 얼굴과 빈탕의 얼굴이 닮았다 고요와 평화가 하나의 얼굴이듯 침묵과 기도가 하나의 숨결이듯 거울 속의 거울처럼 비움이 비움을 비춘다 텅 빈 마음을 채우는 건 빈탕한 하늘뿐이다 2021. 5. 8.
물기 스미듯 뒷문이 열리고 몇 명의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문소리에 뒤로 눈을 준 교우들이 벌떡 일어나 뒤로 간다. 손을 잡으며 인사를 나눈다. 자연히 설교는 중단되고 말았다. 과수원을 하는 서울집 아주머니와 친척 되시는 분들이 설교가 끝나갈 즈음 들어온 것이다. 아무도 그 분이 교회에 나오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오래전 일로 교회완 거리를 두고 다른 종교에 몸담고 있던 그 분, 설교시간을 의식하지 못하고 반가움에 달려가 손을 잡고 인사 나눈 성도들, 비록 설교가 중단되긴 했지만 그들의 모습이 아름답고 좋았다. 예배 후 사택에 모여 얘기 나눌 때 차 한 잔을 놓고 시누이라는 분이 기도하게 됐는데, 울먹여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오빠 교회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한지 꼭 한 달 만에 이곳 단강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이야길 듣.. 2021. 5. 8.
보고 싶다 광철 씨가 있다. 우리교인이다. 더없이 순하고 착하다. 그 마음을 말이 못 따를 뿐이다. 서른이 넘었지만 아직 장가 못 갔다. 못 갈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봄, 가을 짐을 져 나르는 일이다. 사람들은 그럴 때 그를 필요로 한다. 봄에는 거름을, 가을에는 볏가마니를, 야윈 몸에 무거운 짐 지고 새벽부터 어둠까지 품을 팔지만 안으로 자라는 약함의 뿌리는 보이질 않고, 염두에 둘 여유도 없다. 그렇게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다. 봉헌 예배 땐 땔감 하라고 나무 한 짐 지게에 져 내려온 광철 씨. 이번에 되게 앓았다. 단순한 몸살일지. 거의 빠짐없이 저녁예배에 나와 예배드리고 꺼칠한 손을 마주잡아 인사를 한다. 안쓰럽게 마주함이 결국 모든 것일까. 으스러져라 눈물로 안아야 할 .. 2021. 5. 7.
시리고 아픈 사랑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 하루”(찬송가 559장 1절) 아름다운 5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로 이어지는 5월의 첫 주간입니다. 뭔가 기대를 품은 아이들의 눈빛이 귀엽습니다. 꽃 가게마다 카네이션을 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네요. 교회에서 보내준 선물 상자를 개봉하며 신나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았습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준다는 사실이 주는 위안과 기쁨은 어른과 아이가 다르지 않을 겁니다. 환청처럼 제 귀에 낭랑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비 개인 아침 공원을 천천히.. 2021. 5. 6.
한 개의 입 가려야 할 곳이 두 눈이 아니라서 막아야 할 곳이 두 귀가 아니라서 아직은 한 개의 입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쯤에서 문명의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면 만약에 눈과 귀까지도 가리고 막아야 할 때가 온다면 정신 의식이 미개한 국가가 일으키고 있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탐욕과 전쟁과 어리석음 미개한 국가가 만들어 놓은 허상인 풍요의 굴레 그 늪과 같은 감옥에서 벗어나 맑은 가난이 주는 선물 같은 자유와 배달의 하늘을 오늘 내가 앉은 이 자리에서도 볼 수 있다면 아직은 입 하나쯤은 가려도 괜찮은 것이다 마스크가 주는 고요와 침묵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으며 2021. 5. 6.
더 어려운 일 무관심 하지 말 것. 형식적으로 의무감으로 관심 갖지 말 것. 무책임하게 다른 이의 가슴 깊이 들어가지 말 것. 목회를 하며 얻게 된 작은 깨달음. 무책임하게 뛰어듦보단 책임 있게 바라보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 - 1998년 2021. 5. 6.
고집은 세고 어둑하기 한이 없어라 시편 4편 2절 너희, 사람들아! 언제까지 나의 영광을 짓밟으려는가? 언제까지 헛일을 좇고 언제까지 거짓 찾아 헤매려는가?(《공동번역》) 嗚呼濁世子 冥頑盍有極(오호탁세자 명관함유극) 세상에 물들면 고집은 세고 어둑하기 한이 없어라 그러니 허망한 것에만 빠져드네(《시편사색》, 오경웅) 가인(歌人) 박보영 씨가 부른 노래가 떠오릅니다. 바람은 보이지 보이지 않지만 나무에 불며 녹색의 바람이 되고 꽃잎에 불면 꽃바람 된다 방금 나를 스쳐지나간 바람 무슨 바람되었을까? 일본의 어느 장애를 지닌 분이 지었다는 시에 붙인 노래입니다. 그는 자신을 스쳐 지나간 바람은 세상에 어떤 의미로 흘러가는지를 묻습니다. 저도 그리 묻고 싶습니다. 저는 시방 무엇에 물들어 있고 어떤 결로 흐르고 있습니까? 당신을 믿는다고 하는데.. 2021. 5. 5.
아이들 입맛 달래, 냉이, 언개잎, 두릅, 제피잎, 쑥 털털이 쓴 나물 입에도 대지 않으려는 우리 아이들 치킨, 피자, 떡볶이에 자꾸만 봄이 밀려난다 올해도 아이들의 몸 속에 봄을 심지 못해서 큰일이다 이 아이들이 커서 맞이하는 봄은 무슨 맛일까 내 어린 시절 뒷동산에서 뛰놀다 심심해서 꺽어 먹던 배추 꽃대 맛은 지금도 푸른데 아이들 고사리손으로 캐온 쑥을 모아서 쑥 털털이 해서 나눠 먹던 마을 아주머니들은 고향 어린 몸에다 봄을 심을 수 있었던 가난이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인 줄을 두고두고 곱씹는다 2021. 5. 5.
“나댐 없이, 드러남 없이, 흔적 없이” 시간차가 있긴 하지만, 저자와 나는 공유한 역사의 시간대가 넓게 겹친다. 비록 같은 하늘 밑에 살았어도, 그는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현장에서 살았고, 나는 현장과는 철저히 격리된 상아탑 속에서 스스로 갇혀 살았다. 학문적으로도 남미 해방신학에 대한 긍정적 관심과 수용, 우리의 민중신학에 대한 성서학 쪽에서의 지원을 자처했으나, 나 자신의 공헌은 미흡했다. 70년대 말, 어느 날 오후, 신촌 세브란스병원 앞에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피폐해진 모습의 청년을 만났다. 그는 한때 모 대학 기독학생회에서 내가 인도하는 성경공부에 참여하였고, 그 후 현장에 뛰어들었다가, 모진 고문 끝에, 건강을 잃었다. 그때 거기에서 그를 만나고 나서, 나는 한 국립대학교와 두 사립대학교의 기독학생회에서, 정기적으로 때로는 부정기적.. 2021. 5.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