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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 그늘 한희철의 얘기마을(182) 지게 그늘 달리는 오토바이를 핑계 삼아 못 본 척 그냥 지나쳤지만 아닙니다. 분명 보았지요. 유유히 강물 흘러가는 강가 담배 밭. 지난해 물난리로 형편없이 망가진 밭을 그래도 땀으로 일궈 천엽따기까지 끝난 담배 밭, 대공들만 남아 선 담배 밭 한 가운데 두 분은 계셨지요. 불볕더위 속 담배 대공 뽑다가 세워놓은 지게 그늘 아래 앉아 두 분은 점심을 들고 계셨지요. 이글이글 해가 녹고 가만히 있어도 비 오듯 땀줄기가 온 몸을 흐르는 더위. 밭 한가운데 지게를 세우고 지게 그늘 속 두 분이 마주 앉아 점심을 들 때 난 차마 두 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게 그늘, 그 좁다란 그늘을 서로 양보하며 밥을 뜨는 당신들을 그냥 쉽게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못 본 척 그냥 지나쳤지만 마.. 2020. 12. 24.
몸이 불편한 자는 출가를 할 수 없는가? 신동숙의 글밭(294) 몸이 불편한 자는 출가를 할 수 없는가? 이 글은 한 사람을 생각하며 적는다. 10년 전 가을 그때에 일을 떠올리는 마음이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뒷좌석에 두 자녀를 태우고, 남편이 운전을 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서 라디오 불교 방송, 고상한 음성이 흘러나오는 정목 스님의 유나방송을 청취하고 있었다. 그때 라디오로 사연이 하나 올라왔다. 스님은 그 사연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연인 즉, 자신은 젊은 청년이라고 소개를 하며, 하반신이 불편해서 휠체어를 타고 생활을 하고 있으며, 평소 불교 유나방송의 애청자라고 한다. 그러다가 발심이 생겨 출가를 해 부처님 법을 따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출가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 또한 20대 초반에 출가의 뜻을 세.. 2020. 12. 23.
밥 탄내 한희철의 얘기마을(181) 밥 탄내 김천복 할머니가 밭에서 참깨를 베다보니 어디선가 밥 탄내가 나더랍니다. 누구 네가 밥을 태우나, 일을 계속 하는데 그래도 탄내가 계속 났습니다.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웬걸, 냄새는 다름 아닌 당신 코에서 나는 것이었습니다. ‘코에서 탄내가 나도록 일한다’는, 어릴 적 처음 들었을 땐 뭘 그럴까 못 믿었던 노인들의 말을 할머니는 당신이 노인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 (1992년) 2020. 12. 23.
3분의 오묘함 신동숙의 글밭(293) 3분의 오묘함 그림:, 황간역의 강병규 화가 추운 겨울엔 언 손을 녹이는 따뜻한 차 한 잔이 다정한 벗이 된다. 잠을 깨우며 몸을 움직이기에는 커피가 도움이 되지만, 피를 맑게 하며 정신을 깨우는 데는 예나 지금이나 잎차만한 게 없다. 가끔 선원이나 사찰, 고즈넉한 성당이나 수행처를 방문할 때면, 혹시나 그곳 둘레 어딘가에 차나무가 있는지 먼저 살피는 버릇이 있다. 반가운 차나무를 발견할 때면, 그 옛날 눈 밝은 어느 누군가가 차씨나 차묘목을 가져다가 심었는지 궁금하고, 얼굴도 모르는 그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인다. 차나무의 어린 잎을 발효한 홍차를 우릴 때면, 찬바람이 부는 날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군불을 지피는 풍경이 그려진다. 단풍나무 시럽이 가미된 '메이플 테피 홍차'.. 2020. 12. 22.
죽은 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80) 죽은 소 미영이네 소가 며칠 전 죽었습니다. 소 끌러 저녁에 가 보니 소가 언덕 아래로 굴러 네 다리를 하늘로 쳐들고 죽어 있었습니다. 배가 빵빵한 채였습니다. 소는 반드시 오른쪽으로 눕는데 잘못 왼쪽으로 쓰러지면 혼자 힘으로 못 일어나고 그러다 보면 10분도 못돼 숨이 멎는다고 합니다. 죽기 며칠 전 새끼 송아지를 낳은 어미 소가 거짓말처럼 죽어 자빠졌으니 미영이네가 겪은 황당함이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죽은 소는 송아지 값도 안 되는 헐값에 고기로 팔렸고, 젖먹이 송아지 어떻게 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그래도 우유를 잘 먹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참 슬프고 속상한 얘기를 안 그런 척 합니다. - (1992년) 2020. 12. 22.
신작로 잠 한희철의 얘기마을(179) 신작로 잠 변학수 아저씨가 신작로에서 3일 밤을 잤습니다. 도로 가장자리에 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잘 잤습니다, 더위가 심해 피서 삼아 그랬구나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만한 낭만이 고단한 이 땅에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말리느라 길에다 널어놓은 고추들. 질컥질컥 짓물러지는 병과 허옇게 대가 마르는 희한한 병들, 온갖 병치레 끝에 딴 고추를 길가에 내다 말리며 혹시나 싶어 고추 옆에서 잠을 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하나 먹거리에 배인 손길들 생각하면 어느 것 하나 가벼운 마음으론, 허튼 마음으론 대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총총 별 이고 길에서 잔 변학수 아저씨. 붉은 고추 속엔 고추보다 맵고 붉은 농부의 시간들이 담겨 있습니다. -.. 2020. 12. 21.
우리 마을 속옷 가게 신동숙의 글밭(292) 우리 마을 속옷 가게 아이들이 태어나서부터 걸음마를 떼기 전까지는 내복으로 사계절을 살았다. 조금 자라선 내복이 실내 활동복이 되기도 하다가, 어느날 문득 잠옷을 입히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찾아간 곳이 큰 도로 건너 우리 마을 속옷 가게다. 손쉬운 인터넷 쇼핑의 저렴한 유혹을 물리치고, 직접 가게로 발걸음한 이유는 직접 눈으로 보고, 옷의 촉감도 느껴 보고, 한 치수 큰 걸로 해서 잠옷이 주는 전체적인 감성과 아이들의 마음을 서로 짝을 지어주듯 직접 이어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서이다. 자라나는 몸이라고해도 적어도 한두 해 동안은 집 안에서 동고동락해야 하는 옷이 잠옷이 아니던가. 딸아이는 하절기와 동절기 계절에 따라서 잠옷을 바꾸어가며 늘상 입다보니, 나중엔 물이 빠지고 천이 해지.. 2020. 12. 21.
토엽과 천엽 한희철의 얘기마을(178) 토엽과 천엽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새로운 말을 배웁니다. 단강에서는 담배 잎을 처음 따는 것을 ‘토엽따기’라 합니다. 그에 비해 마지막 잎을 따는 것을 ‘천엽따기’라 합니다. 미루어 짐작하기로는 ‘토엽’은 ‘土葉’ 아닐지, ‘천엽’은 ‘天葉’이 아닐지 싶습니다. 토엽따기와 천엽따기.담배 농사를 지으면서 땅과 하늘의 이치를 헤아린 옛 어른들의 삶의 자세가 문득 경이롭습니다. - (1992년) 2020. 12. 20.
뻥튀기 공장 한희철의 얘기마을(177) 뻥튀기 공장 신작로께 마을 입구에 있던 단무지 창고가 과자 공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단무지를 절이던 창고가 과자 공장이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과자 공장을 운영하던 이가 단무지 창고를 사 이사를 온 것입니다. 공장이래야 거창한 것이 아닌 뻥튀기를 튀기는 일이지만 나란히 줄맞춰 놓은 기계가 자동으로 돌아가고, 튀긴 뻥튀기는 또 기계를 따라 봉지에 담는 곳까지 자동으로 운반되니, 공장은 분명 공장입니다. ‘뻥!’ 하는 뻥튀기 소리에 놀라기도 하지만 이따금씩 간식 삼아 싼 값에 뻥튀기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장 앞에 켜놓은 불이 마을로 들어서는 어둔 길을 비춰줘 밤마다 전에 없던 불빛이 고맙기도 하지만, 과자 공장이 들어서는 것을 보며 그 중 반가웠던 건 마을에 사.. 2020. 1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