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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의 첫날, 오늘도 무사히 신동숙의 글밭(301) 2021년의 첫날, 오늘도 무사히 기대와 설레임으로 서서히 다가오던 새해의 첫날로 추억한다. 오늘 맞이하는 2021년 신축년(辛丑年)의 새해 첫날에선 고요함 속에 생명들의 묵직한 아픔의 소리가 들어있다. 자연의 흐름을 따라서 겨울에는 멈추어야 할 생명들이 문명의 흐름을 따라서 더는 멈추지 못하고서 여기저기 생가지 꺾이듯 터져 나오는 소리들이 그치질 않는다. 빙판길로 변해버린 제주의 도로에선 미끄러진 차량들과 사람들. 거제시에선 새벽 출근길에 가장들이 탄 오토바이가 달리던 도로 위 블랙아이스에서 줄줄이 미끄러져 내동댕이 쳐지는 사고가 일어나고, 늘어나는 배달 음식 주문량을 소화하느라 위험천만한 도로를 달렸을 오토바이 배달업 종사자들 그들의 더운 한숨으로도 이 추운 겨울날이 따뜻해지지.. 2021. 1. 1.
교수님께 한희철의 얘기마을(190) 교수님께 끓여주신 결명자 차 맛은 아무래도 밋밋했습니다. 딱딱할 것 같은 권위의 모습 어디에도 없어 특별히 몸가짐을 조심할 것도 없는 편한 교수실 분위기와 예의 잔잔한 교수님 웃음이 그 밋밋한 결명자 차 맛까지를 또 하나의 편함으로 만들어 난로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보기에도 좋았습니다. 작은 난로 앞, 마치 큰 추위에 쫓겨 온 사람들처럼 난로를 바짝 끼고 앉아 나눈 이야기들, 혹 나눈 이야기는 잊는다 해도 그런 분위기는 오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듯싶습니다. 큰 배려였습니다. 농촌에서 구경꾼처럼 살아가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그저 서툰 글로 썼을 뿐인데, 농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농촌의 바른 이해를 위해 책을 읽게 하였다는 이야기야 의미 있는 일이라 여기면서도, 그것이 다름 아.. 2021. 1. 1.
눈 비비는 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89) 눈 비비는 소 소/윤여환 작 소가 눈 비비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지요? 소가 눈을 비비다니, 전혀 관심 가질 일이 아니다 싶으면서도 소도 눈이 가려울 때가 있을 텐데 그땐 어떻게 하는 거지, 막상 그런 생각을 하면 딱히 떠오르는 모습이 없습니다. 사람이야 눈이 가려우면 쓱쓱 손으로 비비면 그만이겠지만 말이지요. 소가 눈을 비비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는데 정말 의외였습니다. 가만히 서서 뒷발 하나를 들더니(뒷발 두 개를 한꺼번에 들 수는 없겠지만) 아, 그 발을 앞으로 내밀어 발끝으로 눈을 비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덩치가 큰 소가 한 발을 들고도 쓰러지지 않는 균형감각도 신기했지만, 억척스럽게 논과 밭을 갈던 그 투박하고 뭉뚝한 발끝으로 눈을 비벼대다니, 뒷발로 눈을 비비고 있는.. 2020. 12. 31.
제야(除夜)에 한희철의 얘기마을(188) 제야(除夜)에 살되 흔들리지 말라걷되 따르지 말며날되 가볍지 말라 일어서되 감추며넘어지되 솔직하라반복하되 흉내 내지 말며쓰러지되 잠들지 말라 떠나되 사랑하며남되 용서하라촛불 타는 가슴종을 치는 사람아 살되 흔들리지 말라남되 용서하라 - (1992년) 2020. 12. 30.
하루가 익으면 밥이 되지 신동숙의 글밭(300) 하루가 익으면 밥이 되지 저녁 노을에 두 눈을 감으며쌀알 같은 하루를 씻는다 하루가 익으면밥이 되지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가슴으로 바람이 지나간다 쌓인 게 많을 수록나누어 먹을 밥이 한 가마솥 너무 오래 끓이다 태워서가슴에 구멍이 나면 하늘을 보고 가슴에서 일어나는 건눌러붙은 밑바닥까지버릴 게 하나도 없어 시래기처럼 해그늘에 널어서웃음기 같은 실바람에 말리는 저녁답 피어오르는 하얀 밥김은오늘 이 하루가 바치는 기도 하루가 익으면 밥이 되지 2020. 12. 30.
마늘이 매운 맛을 내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한희철의 얘기마을(187) 마늘이 매운 맛을 내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배추도 뽑고, 가을 당근도 뽑고 나면 한해 농사가 끝납니다. 그때 마늘을 놓습니다. 서리가 내리고 추위가 오지만 언제나 마늘은 늦가을, 모든 농사를 마치며 놓습니다.찬바람 속 심겨진 마늘은 그대로 겨울을 납니다. 땅이 두껍게 얼어붙고 에일 듯 칼날 바람이 불어도, 때론 수북이 눈이 내려 쌓여도 마늘은 언 땅에서 겨울을 납니다. 한 켜 겨를 덮은 채로, 맨살 가리듯 겨우 한 겹 짚을 두른 채로 긴긴 겨울을 납니다.마늘이 매운 맛을 내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그냥 언 땅에 묻혀 맨 몸으로 받으며 그렇게 받아들인 추위를 매운 맛으로 익혀내는 것입니다. 그 작은 한쪽 마늘이 온통 추위 속에서도 제 몸에 주어진 생명을 잃지.. 2020. 12. 29.
안전한 장소가 뒤바뀐 시대 신동숙의 글밭(299) 안전한 장소가 뒤바뀐 시대 인간의 역사는 안전한 장소를 찾으려는 탐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재지변과 야생 동물의 습격으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마침 동굴이 되었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한숨 돌린 인간은 비로소 동굴벽에 그림을 그릴 여유가 생겼으리라 짐작이 간다. 차츰 주위에 흔한 돌과 나무와 흙을 모아서 움집을 세우고, 한 곳에 터를 잡고 모여 살게 되면서 부락이 형성되고, 세월이 흐를 수록 집의 형태는 더욱 정교해지고, 나아가 집은 하나의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고, 안전한 집터 주변으로 농경과 목축이 발달하면서 잉여물이 생기고, 잉여물은 그보다 더 커다란 권력과 국가를 낳고, 급기야 집은 인생의 목표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오늘날의 집은 주거지의 목적에 덧붙.. 2020. 12. 29.
창문을 선물하고 싶어 신동숙의 글밭(298) 창문을 선물하고 싶어 하늘 한 쪽만 보면 닫혔던 마음이 열릴 텐데 햇살 한 줄기만 쬐면얼었던 마음이 녹을 텐데 집밖으로 못 나가서두 발이 있어도 못 나가서 몸이 아프거나마음이 아프거나 그럴 수만 있다면작은 창문 하나 선물하고 싶어 크고 화려하지 않아도하늘이 보이는 햇살이 내려앉을 낡은 창틀이라도 좋은 집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는때론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너의 맑은 두 눈을 닮은투명한 창문 하나 2020. 12. 28.
저녁 연기 한희철의 얘기마을(186) 저녁 연기 겨울 해는 짧습니다. 한껏 게으름 떨던 해가 느지막이 떠올라 어정어정 중천 쯤 걸렸다간 그것도 잠깐 곤두박질하듯 서산을 넘습니다. 그러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땅거미가 깔려들고 마을마다엔 흰 연기가 솟습니다. 기름보일러 서너 집 생기고, 연탄보일러 늘어가지만 여전히 쇠죽 쑤는 아궁이, 그 아궁이만큼 장작을 땝니다. 그을음투성이인 검은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솟아올라 마을은 저녁마다 흰 연기에 둘립니다. 보면 압니다. 바람처럼 쉬 사라지고 말 것 같은 저녁의 흰 연기는 어둠이 다 내리도록 마을을 떠나지 않습니다. 손도 없는 그놈들이 손을 마주 잡은 듯 둘러 둘러 마을을 감싸고 흐릅니다. 어쩜 저녁연기보다도 쉽게 떠난 자식들, 마른 가지 아프게 꺾는 주름진 손길을 두고, 저.. 2020. 12. 28.